성령의 열매 - 오래 참음  (시103: 8-14 약5:7-11)

어떤 글에 인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인내는 믿음을 수호하고 평화를 보존하고, 사랑을 간직하고, 겸손을 가르친다. 인내는 육신을 지배하고, 영을 강건케 하며, 기질을 순화시키고, 분노를 억누르며, 질투를 소멸시키고, 자만을 억제한다. 인내는 혀를 제어하고, 손을 통제하며, 유혹을 견뎌내며, 박해를 참아내고, 순교를 성취한다. … 인내는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남자를 가치 있게 한다. 소년시절의 인내는 사랑을 받고, 청년 시절의 인내는 칭찬을 받으며, 노년의 인내는 존경을 받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서든 인내는 아름다운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89년 6월호)에서 수 백년 동안 꿈꾸어 오던 흑색 튤립이 네덜란드의 한 육종가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튤립 육종 전문가인 헤르트 하헤만은 어려서부터 흑색 튤립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가 23세 되던 해에 튤립 품종개량 연합회의 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품종개량에 착수했습니다. 79년 5월에 시작하여 7년만인 1986년 2월에 마침내 그가 꿈꾸던 흑색 튤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화초세계에 있어서 첫 달 착륙과 같은 사건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흑색 튤립이 상품화되려면 향후 20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20kg의 구근을 만드는데 14년이 걸리고 그 후 6년을 더 재배해야 시장에 내 놓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튤립의 새로운 한 품종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무려 27년이나 걸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로 오래 기다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운이 좋아서 목표하였던 검은 색의 튤립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하였지만 완전히 검은 색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영국에 전해지는 금잔디의 에피소드도 그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의 금잔디를 보고 감탄한 어떤 외국 손님이 그 비결을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금잔디의 주인은 태연히 대답을 했습니다. "이건 11대나 걸려 다듬어진 거랍니다." 끈질긴 인내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인내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교통신호가 바뀌고 나서 0.5초 이내에 차가 출발하지 않으면 뒤차의 운전사가 짜증을 냅니다. 컴퓨터 앞에서 화면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3초 이상이 걸리면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각종 매표소에서 큰돈을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 시간이 30초를 넘기게 되면 사람들은 짜증을 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3분을 넘기게 되면 역시 짜증을 냅니다.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5분 이상 되면 기다리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낚시꾼이 한 곳에서 3시간 앉아 있었으나 한 마리도 못 낚게 되면 그는 십중팔구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현대인은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째에는 그 자리에 아예 드러누워 버리고 맙니다. '오래 참지'못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인내'로 번역될 수 있는 두 개의 낱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낱말은 고난에 직면하여 낙심치 않고 굳건하게 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욥의 인내(휘포모네)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낱말입니다(약5:11). 욥은 여러 가지 환난을 만났으나 끝까지 그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의 낱말(마크로두미아)은 갈라디아서 나온 성령의 네 번째 열매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오랜 시간을 견딘다는 뜻으로 농부가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조급해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면서 정해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의 낱말입니다.


'마크로두미아'라는 단어는 원래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마크로스'와 '두모스'가 합친 낱말로서 '마크로스'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형용사 또는 부사이고 '두모스'는 '진노, 분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노를 억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8)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그러나 그 진노를 즉각 나타내셔서 그 인간들을 심판하시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정한 시간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때까지 그의 진노를 억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의 계획을 위해서 결코 서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아브라함 때부터 2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지 또 2천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급하게 서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에서 종들은 서둘러 밭에 돋아난 가라지를 뽑아 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 하시므로 조급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알게 만드신다는 의미에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조급하게 서두를 때 우리 믿는 이들은 오래 참음의 미덕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오래 참아야 할까요?


첫째로 영적 성장에 있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라고 있는 것을 결코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몸이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성장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 가노라면 얼마 후에 보면 영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조용히 배우는 일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 성장을 서두를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곧 신앙 성장의 척도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라도 받으면 마치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꾸준히 세끼 밥 먹고 활동하면 몸이 자라는 것처럼 쉬지 않고 꾸준히 영적 성장을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사랑을 실천해 가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이 성장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낙심치 않는 것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 아이 상태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교회도 성숙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에 낙심치 말고 내일의 성숙함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노력도 없이 지나가면 영적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급속히 그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추수 때 열매 없는 자되지 않기 위해 꾸준히 길이 참음으로 노력해 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바울의 권면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최선을 다할 기회를 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라고.


우리는 전도할 때 한 번 예수 믿으라고 말 한 것으로 그가 금방 교회에 나와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삶은 완고하여 예수 믿기 틀린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맙니다. 서 아프리카에 선교사가 파송되고 나서 최초의 개종자가 나오기까지에는 14년이 흘렀습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10년이 걸렸고, 뉴질랜드에서 최초의 세례교인이 나오기까지에는 9년이 걸렸으며, 타이티에서는 16년이 걸렸습니다. 인도에서 윌리암 캐리가 힌두교인을 최초로 기독교도로 개종시켜 세례 받게 하기까지에는 7년이 필요하였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추수를 원한다면 그 때가 올 때까지 기쁨으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송이 검은색 튤립을 얻기 위해 7년을 기다리고 그의 번식을 위해 20년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몇 십 년을 기다린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몇 십 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가족의 구원을 위해 쏟아 붇는 노력은 결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민주문화형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현재는 민주문화를 수용할 능력이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점차적으로 훈련을 통하여 능력을 길러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오래 참음으로 마침내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라 없이 2천년을 헤매어 다녔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948년에 독립을 선언할 수 가 있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두르지 아니하고 황무지를 착실하게 개간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금기로 절어 있는 땅을 4년이나 빨아서 염분을 제거하고 마침내 거기에다 작물을 심는 인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남쪽 네게브 사막 지대를 개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막을 바꾸어 옥토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인내력입니다. 우리도 이런 인내력을 가지고 통일문제에 접근하고 민주사회를 이루는 일에 노력해 간다면 언젠가는 마침내 통일이 올 것이며, 민주문화가 꽃피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오래 참아야 할 까닭은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바탕을 다지는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고난을 통해서 그 기초를 단단히 다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오래 기다리시게 한 것도 그의 신앙을 다지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서두르는 사람은 신앙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은 소망과 관계된 것이요, 소망은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젊어서 부르시지 아니하고 다 늙어서 도저히 생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부르셨고 그러고도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도록 명령하시므로 또 한번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와 같이 다지신 것은 그것이 모든 구원의 역사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초가 든든할 때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모든 역사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 바탕을 다지시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초 작업을 든든히 하였음을 의미하합니다. 반석과 같이 단단하게 기초가 이루어질 때까지 다지고 다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신앙의 바탕을 다지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바탕만 확실하면 그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지루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작업을 무시하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집만을 짓고 싶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까닭이 바로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기초 작업은 확실히 하지 않고 서둘러 집사 권사 장로가 될 때 그것은 본인에게나 교회에나 덕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초 작업을 생략한 사람은 먼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나 그 집은 폭풍이 불어 칠 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바탕을 다진 사람은 시간이 많이 걸려 나중 집을 짓게 될 것이지만 폭풍이 불 때 그 집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면서 우리 신앙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바탕이 확립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 역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래 참음의 열매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집시다. 시간이 걸려도 꾸준히 노력하노라면 마침내 든든한 기초 위에 아름다운 신앙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매사에 좋은 일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을 우리가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인류에 대한 그의 긍휼과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서두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진다면 결코 서두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서두를 때 교통사고가 나는 것처럼, 영적 생활에 있어서 서두르는 자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소망을 갖고 인내하는 기간이야말로 생략될 수 없는 중요한 훈련의 기간입니다.


한 번의 설교로 여러분의 신앙이 화끈하게 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런 설교는 없습니다. 한 번의 어떤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신앙의 거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그런 비방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단계씩 올라갈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5-7)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특별히 먹는 보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먹는 세끼 밥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적 훈련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길이 참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내 개인의 영적 성장이나 교회의 성장이나 이 사회의 민주문화 형성 나가서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길이 참음으로 노력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노력하노라면 마침내 우리는 아름다운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길이 참음으로 풍성한 추수 때를 맞이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