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수와 십일조 헌금 문제

출처/박윤선 목사님 자료 중에서

I. 주일성수에 대하여(창 2 : 1-2)

우리는 주일 성수에 대하여 우선 두어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1. 안식의 의미로 보아서 중요함.

신약시대의 주일은 구약시대 안식일의 후신(後身)이다. 사람이 안식일에는 모든 걱정과 불안과 노고에서 해방되어 안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을 본받는 의미의 것이다. 즉, 그것은 내세(來世)의 하나님 중심한 안식을 소망하는 안식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창 2 : 2-9의 말씀과 히 4 : 4-11의 말씀이 밝혀 준다.

창 2 :2-3에,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함으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 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특별히 하나님 자신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은 중요하다. 그것은 그의 창조의 활동이 큰 노고였었는데, 그가 그 노고에서 해방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2) 여기 “안식하시더라”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완전 자충족하신 영원한 존재 상태로 들어가셨다는 뜻이다. 즉, 영원하실 그의 나라로 들어가셨다는 의미이다. 이 해석이 정당한 이유는, 출 31 :17 에 하나님에서 말씀하시기를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창 2 : 2 과 같은 내용인데, 창세기의 “안식하시니라”란 말의 내용을 설명해 준다. 곧,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히 4 ; 4-11의 말씀에서 ‘안식’이란 것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천국의 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류도 그 날을 지킴으로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와 교통하게 되고, 그 나라를 소망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란 말씀이 역시 그 뜻이다. 그는 온 인류로 하여금 안식일에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영적 안식(예배와 말씀을 통하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2. “주일”이란 명칭으로 보아서 중요함.

   이 날은 사도시대부터 예배일(禮拜日)로 정해진 날이다. 그 증거는, 계 1 : 10에 “주의 날”이라고 하였고, 행 20 :7에는 “안식 후 첫 날”이라고 하여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억시킨다. 즉, 구약의 “안식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중요한 사건을 기억케 하고, 신약의 “주일”은 천지 만물과 인생을 개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케 한다.


그리고 “주일”이란 칭호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날’이란 뜻이기도 하다(막 2 : 28). 사도시대에도 이 날이 예배의 날이었다. 행 20 : 6-12: 고전 16 : 1-2 참조. 특별히 사도 후 시대의 교부들이 이 날을 예배일로 강조한 것을 보면 “주님의 날”이란 개념이 중요시된다. 사도 요한이 죽은 후 오래지 않아서 바나바 서신에, “주님이 다시 사신 날”이라고 지적하였고, 그 밖에 순교자 유스티노(A.D. 140)와 터툴리안(제 2세기)도 그렇게 말하였다.




   이 날이 사람들의 형편을 따라 어떤 경우에 다른 날로 대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날의 중요한 의미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중(週中) 어느 날을 우리가 임의로 정해 놓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날인 일곱째 날만 거룩하다고 해야 된다.

우리가 이 날을 거룩히 지키는 그 여부(與否)는 다른 사람의 감시나 판단보다도 신자 자신의 양심의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이다.
   주일 성수를 소홀히 하는 신자는 자기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 공사 간 여행하게 되는 경우, 어떠한 이유든 간에 주일 성수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할 일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선적으로 육신의 편의를 도모한다면, 보다 중요한 영적(靈的) 문제에 손해를 당하게 된다.

(2) 주일에 영리(營利)를 위한 매매는 물론 금지된 사항(느 10 : 31, 13 : 15)이지만, 부득이한 경우, 즉 선한 목적으로는 이 날에 식료품을 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부득이”를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때에 그것은 거짓된 핑계가 될 수 있다.

(3)주일에 오락을 구하지 말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사 58: 13)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예배와 선한 일)을 위해서만 그 날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3. 안식의 보편성으로 보아 중요함.


   안식일은 유대의 율법에만 국한된 제정이 아니고 그것은 전 인류를 상대한 것이다. 안식일을 복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날에 선포하실 것(창 2 : 2)이니,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복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법이다.

이것은 일반 윤리 도덕처럼 사람의 성품과 관련된 규정인바, 인류의 영원을 사모하는 성품(전 3 : 11)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레 중 하루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안식하도록 하실 것이다. 머레이(John Hurray)는, 제 4계명의 안식 제도가 주 안에서 지켜지는 주일 성수의 거룩한 성격을 지적하면서, 겸하여 엿새 동안의 노동 신성(Sanctity of labour)도 이 계명에 포함시켜 말하였다. 그리고 하지(A.A. Hodge)는 안식일이 인류의 신체적, 도덕적, 영적 또는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II . 십일조 헌금과 신약시대

1. 십일조 헌금의 역사적 유래

십일조 헌금 제도는 구약 율법이 성문화되기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 시대에도 있었다. 창 14 : 20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멜기세덱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주고 받은 것을 보면, 이 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하나님께 십일조 헌납을 서원하였다(창 28 : 22). 그의 이 서원, 곧 하나님께 드릴 예물의 수량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啓示)에 의해 그 가정에서 지켜 오던 하나님의 명령 이었다.

모세 때에 이르러서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지 일은 여호와의 것”(레 27 : 30)이라고 명백히 성문화(成文化) 되었다. 느 13: 10-13: 말 3 : 8-10 참조.


2. 신약시대의 교회와 십일조 헌금

신약 교회의 신자들도 십일조 헌금을 반드시 실행해야 되는가? 다음 성구들을 해석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본다.

(1) 마 23 : 23,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십일조 헌납 실행을 장려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십일조 헌납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제외되지는 않았다. 특히 예수님이 여기서 강조하신 것은 십일조 헌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십일조 헌납과 함께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헌납자의 실생활에 있어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란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건은 미 6:8: 렘 9 : 24에도 강조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신학적 사색이 필요하다. 신약 교회의 신자들의 물질적 봉사가 구약 교회의 십일조보다 더욱 풍성해져야 한다는 것은 구원사의 성숙에 따라 자동적으로 요청된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구약의 제도가 신약에 와서는 더 풍부한 예언 성취의 형태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십일조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의 최소량으로 알고 그 이상 더 풍성히 바쳐야 할 입장이다.

즉, 신약 교회의 신자들은 물질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의 소유라고 생각하므로 무엇이든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릴 수 있다. 롬 14 :8참조.

    (2)고전9:13-14,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
    핑크(A.W. Pink)는 이 문구에서 “이와 같이”란 말을 중요시 한다. 즉,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십일조(민 18:25-26: 대하 31 : 4-10)에 의하여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와 같이 신약 교회의 교역자들은 신자들의 십일조 헌금에 의하여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의 “이와 같이”란 말을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지 문제이다.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이 이런 방법으로든지 교역자들의 생활비를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 원칙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약 교회의 제도가 구약의 제도와 똑같은 것도 아니고, 또 신약시대 교역자들의 위치도 구약시대 제사장들의 위치의 연속이 아니다. 제사장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신약시대에는 모든 신자들(교역자나 평교인)이 마찬가지로 다 일반 제사장(General pries-thood)들이다. 벧전 2:9 참조.

   (3) 고전 16: 1-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 이른바,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란 말이 십일조를 의미하는가? 핑크는 그렇다고 한다. 그는 그 논거를 말 3 ; 10에 둔다. 곧,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란 문구에 있어서 “창고”란 것은 성전에 시설된 물치실들(store-chambers)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십일조 헌물들의 저장실들이었다.

그처럼 신약 교회의 신자들도 십일조를 비축해 두었다가 연보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는 읽었다. 그러나 고전 16 : 2의 “저축하여 두어서”란 말은 어떤 물질의 수량을 예비하여 교회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매주 자기의 수입대로 얼마를 각기 집에 저축해 둘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의미는 말 3 ; 10과 똑같은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원했던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교역자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롬 15 : 26: 고전 16:3 참조. 신약 성경에는 십일조 헌납을 금한 말씀도 없고, 또는 그것을 구약 교회에서처럼 헌금의 법적 표준액으로 명령한 말씀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십일조를 잘못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최고의 헌금인 듯이 오해되기 쉽다. 신약 교회의 초대 교부(敎父)들이 십일조를 최소량의 헌금으로 간주하였고, 헌금열(獻金熱)이 없는 신자들에게 “십일조라도 바쳐라”는 권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이 폐지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구약의 율법 제도(성전 중심의 제사주의)의 일부였던 점에서는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문제는 히 9 : 9-10의 말씀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거기 말하기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한다.

이 말씀 중에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헬라 원어의 의미는, ‘신 질서에 이르기까지 부과(賦課)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제도로서의 형태는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 교부들의 정신을 본받아 십일조를 최소량의 헌금으로 간주하고 십일조 이상의 헌금도 감심으로 드려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이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으로 십일조라도 장려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데, 십일조 헌금을 장려하면서 그것이 율법주의적으로 시행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신약 교회의 헌금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실행되어야 한다. 곧,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 : 7)고 한 말씀대로 우리는 실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