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벧후 2:9-22)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생각한 바 있는 베드로후서 2장 4절 말씀에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 말씀에 대한 결론이 9절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경우를 다루고 있는데 결국에는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면서 마음속에 가진 목적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서 신앙에 대한 위협을 받으면서 배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서 확고한 신앙의 자리에 서게 하기를 바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그렇게 한 것은 성경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교훈 중에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는 그들에게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 본 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인 권고의 말과 함께 경고의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위협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대적하라고 경고받을 필요가 있고 또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일깨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홍수 전에 노아로 말미암아 살아남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가 파멸되기 전에 롯에 의해서 살아남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 일깨워 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경에서 항상 나오는 것과 같이 개인적인 권고를 한 후에 격려의 말과, 위로의 말과, 우리가 부름을 받은 이 큰 일을 위하여 우리를 자극하기 위한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과 시련에 직면하게 되면 언제나 그들이 당하는 가장 큰 위험은 절망하고,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마 초대 교인들의 생활과 흡사한 현대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모든 고난 가운데서 가장 큰 위험일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대단히 크고 조직화되고, 그리고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 이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시골 마을에서도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 문제뿐만 아니라 이론과 사상,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잊어버리게 하는 이론과 사상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과 신앙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도 하나님이나 신앙과는 먼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하나님께 반대하는 사실을 알고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따르고 그들의 옳지 않은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타락하는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고 이 세상에 노아의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전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수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진리를 위해서 인내를 계속하도록 우리에게 어떠한 격려를 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사도 베드로가 오늘 주신 말씀 9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먼저 베드로 사도가 말하지 않은 것부터 생각하십시다.

베드로 사도는 만사가 그저 잘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운 환경이 곧 변해서 모든 문제되는 것이 사라질 것이니까 조금만 참으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것을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금방 좋은 세상이 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경박한 낙관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시련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어서 곧 이 모든 죄와 악이 제거되고 파멸될 것이라고 말함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동안에 인기에 영합하여 온 거짓 이상주의와 낙관론과 인도주의입니다.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든 아니면 불행이라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근절되고, 그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경박한 낙관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만사가 잘 될 것이며 환경이 이제 곧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 사람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를 택하든지 혼돈한 세상을 택하든지 하라고 전파해야 된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도의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떻게 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강하게 하고 격려해주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세 가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교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교리와 별도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을 살펴보세요. 그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이론적이고 교훈적인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보다도 더 위로를 주고 격려해 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30절 말씀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아주 교리적인 말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교리와 함께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를 세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보세요. 온세상이 하나님과 믿음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줄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일입니다. 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며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현존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이렇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인 설명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말해온 바와 같이 능력 있는 분이라고 하면 어째서 세상이 이 지경입니까? 악의 세력을 보세요. 여러분 주위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보좌 위에 계시며,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을 동안 모든 것을 지배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간접적인 방법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니다.

성경은 이러한 악의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악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욥은 아무 연고 없이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사단이 하나님께 송사하고 하나님이 사단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계획 안에서 악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악은 결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으며 또한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락하셨는가”라고 물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각으로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락된 사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말한 천사들도 루시퍼를 따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거룩하시고 크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 만드신 완전한 세계로 악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허락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신 후에 악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어느 정도 한도를 넘지 못하도록 적당하게 허락하십니다. 욥이 재산이 없어지고, 자녀가 다 죽는 불행을 당했어도 슬퍼하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입술로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니까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재차 공격을 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단서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욥기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욥에 대해 비평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통제하고 계시며 사단은 어떤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에 국가와 정부와 관리들과 그밖에 권력이 존재합니까? 성경은 모든 권세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며 악의 결과를 제한하기 위하여 계획되어졌다고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력이 없었다면 전 세계는 훨씬 전에 파멸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그것에 한계를 정하시고 그것이 도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을 다스리십니다.

이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또다른 사실은 여러 차례의 부흥의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역사의 특성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넘치게 부어주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은 눈에 띄게 시들어가고 전 세계는 불경건하고 비종교적으로 되어갔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부흥시키시고, 부흥의 결과 악은 억제되었습니다. 부흥을 경험한 나라들은 더욱 더 융성해집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더 나은 생활을 누리게 되고 도덕성의 기준이 올라가면 어떤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으면 다시 그런 경향이 없어지는 것 같고 또다시 그 나라, 그 사회는 불경건함과 불신앙의 상태로 되돌아가는데 마치 모든 것이 파멸의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다른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의 역사도 하나님께서 악을 통제하시고 그것으로 하여금 일정한 도를 넘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증거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명확한 방법은 오늘 주신 말씀 중에 나타난 베드로의 큰 주제, 다시 말하면 인류의 역사상 특별한 심판의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일 것입니다.

세상이 완전하게 창조되었는데 그 뒤에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죄가 발달하기 시작했고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악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기록된 말씀을 봅니다.

악은 그 도를 넘어서 극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악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심판하실 때에 진노를 내리시겠다고 결정하실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한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온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다시 신앙심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습니다. 그 도시들이 너무 부패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심판하시고 벌을 내리시며 파멸시켜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의 긴 역사를 보세요. 그들의 배신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사를 보내셨으며 그의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호소했고 그들은 어떤 때는 귀를 기울여 일시적으로 개혁을 하게 되었고 조금씩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또다시 서서히 뒤로 물러가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죄를 범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으로 다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성전을 부수며,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그 뒤에 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세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세요. 한때는 왕성하던 교회가 이제는 그 교회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점까지는 악을 허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악이 그 시점에 이르면 악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은 공의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편 73편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불경건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까?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한 것이 실로 헛됩니다. 나는 선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불경건한 자들은 제가 고통받는 동안 번성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리입니다. 여기에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악과 불의를 벌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형벌 중에 어떤 것은 즉시 나타납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오직 죄에 대한 일부분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가 행한 잘못한 일을 증오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부분입니다.

또한 죄는 언제나 불행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 전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그 얼마나 무서운 혼란이며 불행한 상태입니까? 온 백성을 유혹했던 소돔과 고모라성의 외적인 화려함과 매력에 이끌려 살았던 사람들을 보세요. 그러나 그것은 천하고 추하고 타락한 생활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세요. 세상은 신앙을 비웃고, 기독교를 경멸하고, 마치 종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행복한 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을 따라 사는 생활은 실제로 비참한 생활입니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로마서 1장 후반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기한 인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당시의 사람들의 생활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항상 “제자의 길은 험하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왔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불 속에 넣어 보세요. 그러면 손은 탈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 떠난 탕자를 보세요.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 잠깐 동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멋진 생활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열하고, 쓸모 없고,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즉시 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이단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로 말미암아 휩쓸려 가는 자들은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벌은 언제나 계속됩니다. 베드로에 의하면 형벌은 현재의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의 생활에서도 역시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사람은 그가 죄를 짓는 순간에 죄에 대한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불의한 자들은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는 순간에 죄에 대한 형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죽음 후에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형벌의 상태에 두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불경건한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는 ‘어두움의 사슬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어 최후의 심판 때까지 형벌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너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최후의 심판뿐만 아니라 온세상의 모든 피조물, 곧 천사들과 정사와 권세와 죄와 지옥 등의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베드로는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세력이 크다고 놀라지 마세요. 마귀의 군대가 강하다고 겁내지 마세요. 주위 환경이 험하다고 두려워 마세요. “주께서 불의한 세력은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주권의 마지막 원리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능력 안에서, 그의 공의와 심판에서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의 사랑 안에서도 그 모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죄를 다루실 공의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인간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을 아십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위로를 주는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해주십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는 고통과 시련과 환난을 피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런 약속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롯이 어떤 고난도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악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약속은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장의 주제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단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비적인 경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 때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경건한 자와 불의한 자, 노아와 롯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과 반대하는 자들의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경건하면 우리는 최후의 파멸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경건하다면 우리는 최후의 파멸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우리가 경건한 자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의 표시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를 사신 주님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입장과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주님을 떠나서는 잃어버린 자 되고, 전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한 자의 표시는 세상이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과 구별되게 삽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들의 소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의 크시고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모든 시험으로부터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굳게 서십시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최후의 파멸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