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이사야 40장 12-31절)


옛날 유럽에는 소위 '중세의 꽃'이라 불린 '기사(騎士, knight)'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물론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존재 가치가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지만, 평소에도 '토너멘트'라고 불리는 실전에 가까운 시합들을 통해서 실력을 연마함으로써 자기가 모시는 주군을 위하여 언제든지 목숨을 내어 놓고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기사들은 연습이든지 실전이든지 항상 기사로서의 충성심과 사기를 유지했어야만 했는데, 그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각기 귀부인 한 명 씩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애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관계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 같은 것으로서, 그저 자기 혼자만 마음속으로 사모할만한 공주나 귀부인 등을 점찍어 놓고 그 숭배심을 토너멘트 시합이나 전투 시에 자신의 사기와 투지를 고양시키는 데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저 그런 귀부인 한 명을 마음으로 흠모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 기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과 싸우며 또 토너멘트에서 상대방을 창끝을 겁내지 않고 돌격해 나가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성도 역시 그런 식으로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선포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 '앙망하다'라는 말은 '희망하며 기다리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걸고 기다림으로써 세상의 다른 것들로부터는 전혀 얻을 수 없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과연 성도는 하나님을 어떻게 앙망할 때 새 힘을 얻게 됩니까?

  1. 성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앙망함으로써 자신의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고 한량없으신 까닭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위대하심을 판단조차 완전히 할 수 없다는 이 사실부터 먼저 깨닫고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12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선 인간의 그 어떤 '과학 기술'로도 측량할 수 없음을 12절 말씀이 밝히기를 "12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사람은 그 하나님은커녕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조차도 아직까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닷물의 깊이와 하늘 공간의 크기와 땅을 이루고 있는 흙의 양과 성분을 사람이 그 만들어낸 여러 가지 계량기와 도구들을 이용하여 '재어보고 달아보고' 했지만 여전히 오차가 포함된 미지수일 따름입니다.
  비록 "손바닥으로" 떠보고 "뼘으로" 재어 보곤 하던 선지자 이사야 시대 때보다는 그래도 과학 기술이 많이 발달이 되어서, 제법 심해 탐사선도 내려 보내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땅에 시추구를 파기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사람의 기술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이리저리 만져 보는 것은 여전히 '빙산의 일각'이며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에 불과함을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의 "13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뇨"라는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판단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그 주위에 "모사" 즉 참모가 필요하며 고문과의 "의논"이 있어야 하며 전문가의 "지도" 조언이 없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신 까닭에 이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 어떤 보좌관도 그 어떤 정보부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결코 도울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세우시고 이루어 나가시는 그 뜻과 계획을 이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며 판단이나 평가는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조차 제대로 제거나 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그 하나님 자신을 그 알량한 지혜로 달거나 재어 볼 수가 있겠습니까?

  15절 말씀은 인간의 강력한 '사회 조직'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합니다.
  기록하기를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는 바벨론 제국이나 앗수르 제국 같은 "열방"의 세력은 정말 거대하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를 보며 이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국력에 압도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눈에는 세상의 국가라는 조직이 이처럼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계산의 가치에도 포함 못 될, 그저 "물" 한 방울, "티끌" 하나, "먼지" 한 톨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자기 눈에 대단하게 보이면 하나님 눈에도 대단하게 보일 것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16절은 조금 다른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천명하고 있는데 "16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물'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나타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고 하니, 사람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 이후에도 그 위대하심의 격에 맞을 만한 제사조차 드릴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넓고 울창한 삼림 지역 "레바논"에 있는 모든 "짐승"을 다 잡고 그 모든 나무들을 다 "화목(火木)" 즉 땔감으로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걸맞을 만한 제사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크기는 이처럼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 끝까지 관찰한다는 최첨단의 '과학 기술'로도, 노벨상들에 빛나는 모든 석학들의 머리들을 총망라한 '지혜'로도, 강력한 군대와 대 재벌 기업과 최고 선진 국가를 만들어 내는 인간 '사회의 조직력'으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상대하기는 어림도 없고 아예 측량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가진 능력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상대하기는커녕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다음에도 그 위대하심에 어울릴만한 '예물'조차 마련할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에서는 아예 "17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존재와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그 무엇들은 다 "아무 것도 아니며 (nothing)," "없는 것 (less than nonexistent),"이며 "빈 것 (unreality)"에 불과한 것이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사람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것저것 다 끌어 모아도, 사람이 제 딴에는 최고라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다 내 놓아도, 왜 하나님 앞에서는 비교의 대상은커녕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사람이 판단하거나 이해할 수 있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처럼 위대하신 까닭에 참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시지 않다면, 하나님이 만일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어떻게 견주어 볼만한 그런 대상이라면 그 하나님이 어찌 참 신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앙망하는 자만이, 그 하나님의 전지전능, 즉 사람의 그 어떤 지혜도 능력도 초월하시는 그 위대한 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지극히 높고 크심을 믿지 않는 사람,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 주시겠습니까?

  유명한 '대부 1편'의 첫 장면에 보면, 어떤 장의사가 대부를 찾아와서 자기 딸을 강간한 자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대부는 "당신은 여기까지 찾아와서도 나를 'godfather'라고 부르지도 않고 아무 경의도 표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게 살인청부업을 시키려하느냐?"라고 거절합니다.
  결국 그 장의사가 허리를 굽혀 그의 손에 입 맞추면서 "대부님"이라고 부르자 비로소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대부가 자신의 힘을 발휘해 주고자 하는 대상에게서 바란 것은 오직 자신을 높이 받들어주는 절대적 존경심, 이것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유한한 지혜와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힘의 도움을 받는 길 역시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직 사람이 견주어 보기는 고사하고 판단조차 다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먼저 깨닫고 고백하고 앙망함으로써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만 내려 주실 수 있는 새 힘을 얻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앙망함으로써 다른 그 어떤 존재로부터도 도움 받을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의지하고 소망할만한 대상 가운데 하나님에 비교할만한 다른 존재가 결코 없음을 믿고 하나님만을 앙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본문 18절에서 "18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라고 시작하여 25절까지 계속하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비슷해 보이는 것'과도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유일무이하신 존재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세계 밖에 계시는' 이 하나님의 존재를 자신의 '경험 세계 안에 있는' 피조물들과 나란히 놓고 그 어떤 유사성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죄를 반복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우상'을 하나님과 같이 여긴 것이었습니다.
  19절과 20절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상의 존재란 순전히 사람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어떤 "장인"이 얼마나 그럴듯한 형상을 부어 만들어 내느냐에 그 존재가 달려 있고, 어떤 "장색"이 얼마나 금과 은으로 잘 꾸미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우상을 사모하고 앞에 와서 손을 비비느냐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금은으로 우상을 만드는 반면에 "궁핍하여" 그런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다 값싼 재료인 "나무를 택하여" 우상을 만든다고 했으니, 우상의 존재는 또한 사람의 재력에 좌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만들어진 우상을 "흔들리지 않도록 세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명색이 신이라는 것이 자기 몸 하나 바로 가누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이 바로 세워 주어야 서 있을 수 있는, 실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사람이 만들어 놓고 섬기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사상은 바로 이처럼 '사람의 생각과 솜씨에 좌우되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아서 시작된 불교와 마호메트가 신비한 체험을 해서 시작한 이슬람교가 '스스로 계신 자'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의 숭고한 사상이 '태초부터 말씀' 되신 주님을 결코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종교요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 종교를 만든 사람이 사람이며 그 사상을 생각해 낸 사람이 사람인 한에는 결코 그것이 사람이 참으로 숭배할 신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사람의 능력에만 의존해 있고 그 수준의 정도와 발전이 순전히 사람의 지적 능력에만 비례하는 우상과, 오직 '스스로 영존하시는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그 어찌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조차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상숭배자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신을 신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연 만물'과 비기며 거기에서 유사성을 찾아서 자연을 신처럼 섬기는 죄 또한 인간이 오랫동안 저질러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잘못을 본문 21절과 22절에서 반박하기를 "21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오늘도 자연 즉 물질세계 그 자체가 온 우주 존재의 시작이며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고 스스로 변화하게 되었고 스스로 진화하게 되어 무생물계가 생물계를 만들어 내고 생물계는 점점 더 발전하여 인간을 창조해 내게 되었고 그 인간이 정신과 영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 그 자체를 갖다 앉혀 놓고서 모든 존재의 근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자로 섬기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아무 확증도 없어서 그들 자신도 그저 가설(假說, hypothesis)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존재 세계에 대한 최고의 진리인양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깨닫지 못하였느냐"라고 질책하십니다.
  "태초"와 "땅의 기초"는 사람들이 만물의 기원으로 혹은 존재의 궁극적 근원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 태초와 기초는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태초 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을 진작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땅 위 궁창에 앉으시고 하늘을 차일 같이 펴신" 즉 우주공간 세계에서 무소부재하신 영원한 창조주이실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피조물에 불과한 물질세계를 마치 존재의 창조주처럼 모시는 행위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위대한 인간' 또한 결코 하나님 앞에서 비교의 대상이나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23절과 24절에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라고 기록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세상의 훌륭한 위인들이나 영웅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곤 합니다.
  존경할만한 박애정신을 남달리 발휘하며 평생을 산 사람들, 지식의 수평선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훌륭한 학자들, 혹은 총칼로 천하를 호령하며 영토를 넓힌 군주들, 이런 사람들을 칭송하면서 무슨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들 떠받듭니다.
  그런 "귀인들"과 "사사들"을 칭송하고 귀감으로 삼는 것까지야 좋지만, 문제는 그같이 남달리 훌륭했던 위인들이 곧 사람이 존경하고 받들어 모셔야 할 최고의 존재라고 착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 가운데 특히 본받을만한 훌륭한 인물들의 생을 잘 따르고 그 명철한 사람의 지식을 계속 발전시키고 그 영웅호걸의 기개를 새로이 적용시켜 나가면 점점 더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이며 심각한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을 신격화시키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훌륭하다 해도 결코 하나님과 비길 수는 없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귀인들과 사사들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폐하시며 헛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 하나하나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훌륭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저 "겨우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풀뿌리와 같은 것이며 종내 "하나님의 부심" 곧 가벼운 바람에 말라버리고 휘날리게 되는 "초개" 곧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 할지라도, 또 그 사람 가운데서 빼어나고 빼어난 위인과 성인과 용사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 대신 사람이 섬길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 어떤 다른 존재, 다른 신이나 만물이나 사람과 비길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25절은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25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것과 "비길" 대상이나 "동등"이 여길 대상이 전무한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다른 비슷해 보이는 종교의 신이나 과학자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해 보이는 유물론이나 온 인류에게 귀감이 되기에 손색없어 보이는 위인들과 비교해 보고 동등하게 여기는 행위, 아니 그것들로써 하나님을 대체해 버리는 행위는 그야말로 최악의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이것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하나님 믿고 의지한다고 해 보았자 헛일입니다.
  하나님과 비슷해 보이는 또 다른 '유사(類似) 신'도 모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대용(代用) 신'까지 마련해 놓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마음이 나시겠습니까?
  당신 앞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을 '질투'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를 사람을 위해 힘을 써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회에서도 '양다리 걸치면서' 도움 받으려 하는 사람은 얄밉습니다.
  "제게는 총재님밖에 없습니다."라고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뒤로는 여차하면 당적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국회의원 후보 지명을 해 주고 싶은 당총재가 어디 있겠으며, 지금 자기 말고도 다른 남자와도 사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여자에게 자신의 저금통장을 다 털어서 결혼반지 사 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아무 다른 신이나 사람이 없음을 확실히 믿는 자라야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전능을 동원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앙망함으로써 다른 우상이나 자연이나 인간을 의지하는 자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새 힘을 바로 그 살아 계신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27b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라고 장탄식할만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가 차례로 망하고 남은 백성은 이제 남의 나라인 바벨론 땅에 잡혀와 있으니 그 얼마나 암담한 현실이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기 사정을 자신의 좁은 시야에서만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그처럼 자기에게 있는 제한된 힘만 가지고 계산할 때에는 제아무리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질"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오히려 지극히 낙천적인 어조로 당신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 속에서는 더 이상 힘이 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신"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공급해 주실 새 힘이 무한정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곧 긴 시야를 가지고 멀리 내다보시는 하나님이시며,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 곧 그 계획이 지역적으로 제한되지 아니하고 전 공간을 다 포함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러니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무능한 자"라 하더라도 그런 무한정하신 하나님을 앙망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무한정 힘을 얻게 됩니다.
  그 힘은 사람이 걸어가든지 달음박질해 가든지 아니면 날아올라 간다 할지라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실로 온갖 불리한 처지와 악조건을 다 극복할 수 있는 진짜 힘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한 현실은 바위에 던져진 유리잔 같이 다 깨어지고 조각만 남은 백성 같았지만 그들이 이 위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한에는 여전히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내 어려운 사정이 하나님께 아직까지 숨겨졌다고,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 처지를 알지 못하고 계신다고 생각되십니까?
  정말로 알지 못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도 빠짐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모르는 나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억울하기 짝이 없는 환난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다고 생각되십니까?
  정말로 안타까운 쪽은 아직도 하나님의 주권의 무한한 폭과 깊이를 모르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사정이 이처럼 희망이 없고 내 원통한 것이 이처럼 풀리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아직까지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앙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극히 어려울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그 때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앙망하는 기회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하기를 "낙심할만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까운 때이다."라고 했고, 어거스틴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속히 성취하여 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절히 원하도록 하시려는 까닭이다."고 했습니다.
  이차대전 때 일본군은 자국 병사들로 하여금 천황을 극단적으로 사모하는 힘에 이끌리어 소위 옥쇄와 가미가제 돌격까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갓 귀부인이나 왕을 사모하는 것도 이런 힘을 내게 할진대 하물며 위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에게 주어질 새 힘은 어떠하겠습니까?

  창조주요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어려울 때 힘 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러' 할 때에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실 이는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임을 고백하는 성도에게 어찌 주님께서 '세상을 이길 힘'으로써 도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은 자신 속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지만 오직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서만 나올 수 있으며, 세상 모든 사람과 자연과 조직과 기계의 힘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은 오직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께로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함으로 받게 되는 이 놀라운 새 힘으로써 항상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승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