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11)   (마 16 : 13 - 20)


서울 어느 교회에 장군 출신 장로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명예와 자리를 탐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그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장로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장로님이 꿈을 꾸셨답니다. 꿈에 천당엘 갔는데 천당에 가보니 그곳에 면류관들이 잔뜩 있더랍니다. 사람마다 자기 면류관을 찾아서 하나씩 쓰고 나가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장로님 면류관은 없었습니다.

면류관이 하나 밖에 남지 않게 되자 그 장로님은 급한 나머지 임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 면류관을 낚아 채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쓰고 보니 그 면류관은 개털로 된 면류관이었습니다. 창피하여 그것을 벗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개털 면류관은 머리에 꼭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답니다. 밤새 애를 쓰다 꿈을 깼는데, 장로님은 그 꿈이 하나님의 교훈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 많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별명을 ‘개털 장로’라 하시고는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간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우리에게 유전처럼 전해지게 된 죄인데,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사탄은 그것을 따 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원죄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죄 된 본능’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죄 된 본능’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좇을 수 없고, 하나님을 좇아 살지 않으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역사를 돌아보아도 언제나 자신과 사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언제나 실패하고 언제나 망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참으로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소위 계급에서 황제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달리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남달리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결국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승리하여 드디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천주교는 박해 때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국교가 되고 교황의 권위가 권력이 국가의 황제보다 높고 컸을 때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박사는 참으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애국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독재자가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4.19 때 꽃과 같은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재앙의 뿌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독재를 싫어합니다. 독재자가 정치를 하는 나라치고 나라가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독재자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약할 때 한국교회는 오히려 강하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부요해 졌을 때, 유명한 스타 목사들이 나오면서부터 교회는 오히려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여러분 혹시 서울 대 병원 병원장이 누구신지는 아십니까? 아니면 혹시 그 유명하다는 삼성의료원이나 현대중앙병원의 병원장이 누구신지는 아십니까?

혹시 여러분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누군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소망교회 담임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광림교회 원로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여의도 순복음 교회나 소망교회 그리고 광림교회의 목사님들 모두가 다 훌륭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에 서울대학교 총장님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병원의 병원장님들이 그 목사님들 보다 못하신 분들은 아니실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 총장님이나 병원장보다도 크고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을 더 잘 알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회의 저명인사보다 교회의 목사들이 더 유명해져있는 세상이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장과 병원장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대학과 병원이 담임목사와 원로목사가 누군지 다 아는 교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고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혹 아십니까?

서울대학교의 총장은 대단한 자리임에 틀림이 없으나 서울대학교에는 지금 총장 말고도 얼마든지 총장직을 감당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교회 안에는 그 목사님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그 어떤 조직보다 더 권력지향적이고 봉건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학교와 병원은 총장과 병원장이 바뀌어도 별 큰 문제없이 돌아가지만 교회는 목사가 바뀌면 교회 전체가 왔다갔다 할 만큼 큰 몸살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면을 생각하면서 한 사람의 자리와 영향력이 사람의 욕심으로 커지게 될 때 얼마나 조직의 체질을 오히려 약화시키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우리의 앞길을 막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막다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되면 전략을 바꾸어서 우리의 앞길을 필요 이상으로 밀어 줍니다. 띄워 줍니다. 스타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과속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가 교만하여지게 되면 그 교만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즉사하게 하는 전략을 쓰는 것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위하여 제가 앞으로 힘써 싸워야 할 것은 더 유명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낮추는 것입니다. 부인하는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겸손해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숨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입니다.

전에 있던 동안교회에서 교회를 건축 할 때 안식년을 할 타이밍이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교회 건축 중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하나님이 안식년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6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짓다보면 자기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사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기 때문인지가 오락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농사를 쉬라 하십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이 한해 농사를 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을 지키라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저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으신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일이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6년 동안 열심히 목회를 하다보니, 그리고 교회가 제법 성장하고 큰 예배당도 건축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져서 교회가 나 때문에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꽉 차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안식년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네가 없어도 교회는 된다’ 그리고 ‘네가 없어도 교회가 되어야 정말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년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안식년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없다고 예배당도 짓지 못할 교회라면 차라리 예배당을 짓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당회에 내놓게 되었고 당회에서도 그와 같은 저의 생각을 받아주어 건축 중에 안식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완공 6개월을 앞두고 6개월 안식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절반짜리 믿음이었습니다. 예배당을 완공한 후에는 시무를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꼭 그러지 않아도 좋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교회 건축 중이라 안식년 비용을 많이 쓸 수가 없어서 국내에서 넉 달을 있었습니다. 천안 사과 농장에 있는 별장을 빌려 넉 달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 제가 안식년을 하던 그 사과 농장이 이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수련원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달을 미국과 카나다 그리고 중남미를 다니며 밀린 숙제를 하듯 집회를 하였습니다.

카나다에 있을 때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아내까지 함께 집을 떠나 있을 때였는데 걱정이 되어 병원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전화를 받으신 분이 바로 남국치 장로님이셨습니다. 안식년을 하면서 저는 일부러 교회에 전화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하면 또 이것 저것 의논을 할 것 같아 참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면서도 도 닦는 심정으로 전화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전화가 장로님들과의 첫 전화인 셈이었습니다.

제 전화를 받자마자 남 장로님이 하신 첫 마디를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이상 무’ 처음에 조금 섭섭했습니다. 제가 속으로 은근히 기대하던 말은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교회가 엉망입니다. 목사님 좀 빨리 오실 수 없으시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의 ‘목사님 교회 이상 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안식년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기간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 것이 동안교회를 약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상당히 겸손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장로님들의 6년 단임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동안교회에서는 그것을 시행하기 어려워 우선 장로님들의 안식년제를 시행했었습니다. 6년 시무하시고 일년을 안식년을 하시라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그것을 불편해 하셨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왜 꼭 안식년을 하라 하십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시기에 서슴치 않고 장로님에게 대답해 드렸습니다. ‘장로님이 시무하지 않으셔도 교회가 아무 문제없이 잘 된다는 것을 배우시라고요...’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목사님 장로교니까 장로가 주인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이분이 장로교를 prebyterian church로 이해하지 않고 elder"s church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로교를 장로교 정치를 하는 교회로 이해하지 않고 장로들이 주인 노릇하는 교회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님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목사들 중에는 교회를 목사가 주인인 pastor"s church로 이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많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파워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서로 타협하며 목사와 장로의 자리를 높여 나가고 넓혀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는 비단 목사 장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우리 한국교회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더니 우리 한국교회는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이고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입니다.

양재동에 있는 어느 미션 스쿨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장로님이신데 선생님들에게 존경을 받으시는 훌륭한 교장이시라는 소문이 있기에 일부러 집회 후 그 장로님과 차를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대화 중 평생의 잊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삶의 목표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있으나 마나 한 교장이 되려고 힘씁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을 쓴다는 것은 그냥 있으나 마나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감동은 이루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너무나 많으십니다. 그와 같은 분들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는 오늘 바로 그와 같은 분들 때문에 다시 몰락하고 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니(은퇴 혹은 사망) 교회는 당연히 안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훌륭한 신앙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사람이 된 후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재빨리 자기가 없어도 되는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후배를 세워주고 자기는 슬며시 역사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바나바가 좋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첫 어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 비하면 새카만 후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고 파송을 했고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 선교여행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사로 세웠을 때 굳이 이야기하자면 바나바가 주연이었고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조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늘 성경에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날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역할이 바뀌게 됩니다. 바울이 점점 주연이 되고 바나바는 조연이 됩니다. 결국엔 이름도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라고 씌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나바가 그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과 원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세우며 잠잠히 조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바나바를 배워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훌륭한 후배를 찾아내고 그를 자기 앞에 세우며 그의 길을 열어주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호수아를 세워주고 자기는 느보산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죽은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실력을 가진 후 스스로 있으나마나한 사람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득권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절대로 손해나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잘 버리셨습니다. 앞으로도 그와 같은 계급 같은 직분에 연연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오직 우리 하나님만 높여 드리며,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게 해 드리며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장로나 목사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로와 목사의 책임과 실력을 부인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을 계급으로, 권력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되십니다. 처음부터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다. 그러나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끝까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자리에 있지 마십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슬그머니 느보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다. 새카만 후배 바울을 세우고 그를 섬기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다.

그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상으로 주시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고 닫으며 사는 복을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