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마 6:2-4)

인간은 욕구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 욕구 중에 가장 강렬한 욕구는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욕구일 것입니다. 특히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이 아름다움이 우상입니다. 모두 아름다워지려고 처절할 정도로 굶고 살을 빼고 날씬해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저는 오랜만에 만난 어느 여성분에게 “건강해지셨습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했다가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인사법은 여성에게는 상당한 실례라고 합니다. 여성에게는 무조건 ”그 동안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날씬해졌습니다“하고 인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고 목적입니다.

  어느 부인이 살을 빼려고 병원엘 찾아갔습니다. 의사에게 “살을 빼려 왔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부인에게 “부인은 그저 멀건 죽 한 그릇에 과일 두 쪽만 잡수시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방법이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 말은 받고 부인이 이해 안 된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을 식후에 먹습니까 식전에 먹습니까”. 오늘은 이 살 빼는 일이 전투입니다.  

그리고 인정받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것도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사람들이 칭찬 받으면 모두 좋아하고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 합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하는 일에서 능률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칭찬을 해주면 좋아합니다. 화초도 칭찬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가면 더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만큼 칭찬은 능률을 오르게 합니다. 또한 행복해지려고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 더 넓은 집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이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큰집으로 늘려 나갑니다. 행복이 그렇게 넓은 집에서 나온다면 사람이 얼마나 살아가기가 쉽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외형적인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외면적인 것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행복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은 일시적이고 길게 만족함을 주질 못합니다. 집 큰 것은 일시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 큰집에서 오래 살면 그것도 별로입니다. 더 큰집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50평에서 70평으로 100평으로 자꾸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외형적인 조건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갈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큰집을 짓지만 그것이 사람의 욕구를 채우질 못하는 합니다. 참 우리나라는 문제가 많습니다. 돈이 많아도 그렇지 30억 원짜리 100평의 아파트를 짓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수준이 물량을 가지고 따지는 사회는 그만큼 미성숙한 사회입니다. 고급인생이나 성숙한 사람들은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질로 먹고 맛으로 먹습니다. 삶도 양이 아니고 내용과 질로 살아갑니다.    

행복은 지극히 내면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행복이 근본적인 행복의 요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순교하고 고난 받고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바램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지극히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바램입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의 바람과 똑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고 크게 되는 것 보다 건강하게 살고 재미있게 살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바람이고 우리 부모님들의 소박한 바램입니다.

                                    I

오늘 본문을 보면 내면적으로 행복한 삶을 발견하게 하는 성숙한 삶의 요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나눔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나누는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나누면 무엇을 얼마나 크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크게 엄청나게 나누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고 뜻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삶, 그것이 나눔의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기쁨과 행복이 만들어지고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서구세계는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구사회는 기부문화가 정착되어 아주 활발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서구사회는 기부생활을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국가가 노후생활을 보장하고 우대해주고 존중해 줍니다. 이 문화가 어디서 발생되었는가 하면 성경에서 나온 정신입니다. 성경에서 나온 이 청교도적인 정신과 문화가 오늘의 미국 땅에 심겨진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미국을 향해서 별의별 부정적인 말들을 말하지만 그 사회는 그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이런 장점을 가진 나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사회는 이 기부문화가 아주 미숙합니다. 서툴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직 훈련이 안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의 속성은 움켜쥐고 소유하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돈이 많아 30억 원짜리 100평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눈다는 것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현금으로 몇 억 원씩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어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먹고 살만해졌다고 선진국이 다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무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유는 했는데 만족감이 없고 감사함이 없고 행복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좀 살게 되었다고 거드름 떨고 살고 있으니 선진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볼 때 참 우습게 볼 것입니다. 행복함의 지수는 소유의 양, 집의 크기, 자리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기부는 소유가 많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다고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이 기부문화가 우리사회에서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기부 릴레이 행사”라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서 “어려운 딸들을 위한 100인 릴레이“라는 기부행사가 마련되었습니다. 주최 측에서 선정한 최초 100인이 기부를 시작하고 그 100인이 한사람씩 소개해 릴레이로 이어나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시작할 때 몇 사람 소개되면 끝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1500명이 줄을 잇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사회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런 삶에서 어떤 맛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나눔의 삶은 숨겨져 있는 행복의 요인을 발견하게 합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무엇을 조금하면 얼굴부터 이름부터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름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상당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눌 때는 “나팔 불지 말고,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그러면 하나님이 갚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요인입니다. 이 은밀함은 더 깊은 행복을 만들어주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이 은밀함, 무명, 누군지 모름, 살며시, 아무도 모르게, 이것들이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복하고 그 행복은 너에게로 전달되고 또 그 행복은 이 세상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나누는 삶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 가끔씩 꽃을 사다 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말입니다. 무명으로 사다놓고 모두를 즐겁게 합니다.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돈이 얼마나 들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자체로서 마음이 향기롭습니다. 가끔씩 구제하는데 보태라고 헌금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고 행복을 나누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그렇게 향기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II

그렇게 보면 인생에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고, 받고, 베풀고, 나누는 삶”.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공식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인생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어디서나 이 공식이 적용되고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영국수상을 지낸 처칠이 어려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동네친구가 그를 건져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처칠의 아버지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보니 아주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처칠의 아버지는 그 아이가 의사가 될 때까지 공부를 시켜 마침내 의사가 되도록 안내해 줍니다. 얼마나 향기로운 이야기입니까. 능력이 있으면 꿈은 있으나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의 앞길을 이렇게 열어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일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랜 후에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처칠이 폐렴에 걸려 위기에 처합니다. 그 당시는 폐렴을 치료할 약이 아직 개발되기 전입니다. 처칠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의사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친구는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병은 폐렴이야, 그런데 치료할 약이 없어, 내가 지금 폐렴을 고치는 항생제를 연구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실험을 하지 않은 거야, 위험하기는 하지만 자네가 한번 맞아보겠나, 지금은 다른 길이 없네”. 그래서 처칠이 그 항생제를 처음으로 맞고 살아납니다. 그 사람이 항생제 페니실린을 처음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이라는 의사입니다. 그가 나중에 그 공로로 노벨상까지 받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를 돕게 되는데 그것은 또 결국은 나를 돕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행복을 창조하게 되고 삶의 보람과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그 속에서 비로소 뜻이나 행복 그리고 기쁨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들까지 느끼고 경험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깊고 원숙하고 만족함을 주는 삶입니까.

그러면 그렇게 얻어진 느낌과 행복한 마음을 나 혼자서 간직하게 됩니까. 그래서 그 느낌을 전하고 알리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선전하고 전해야 합니다. 행복은 나누면 나눌수록 그 행복은 이 세상에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전해서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여러분, 어디 맛있는 음식점이 있으면 혼자만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먹게 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내가 수난 받고 고통 받고 고난당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좋은 음식점만 발견해도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먹게 하고 알게 해 주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체험하고 만났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 알고 느끼고 체험한 그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전도입니다.

                                   III

저는 엊그제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요즘 이지선이라는 처녀가 한창 인터넷으로 책으로 화제로 뜨고 있습니다. 이 이지선이라는 처녀는 1978년생으로 이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아주 예쁘고 발랄한 처녀입니다. 그런데 2000년 7월30일 날 음주운전자의 운전실수로 6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고에서 이지선양이 전신 3도의 화상을 입게 됩니다. 7개월 동안 입원해서 11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화상으로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가락은 절단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쁜 모습은 아주 완전히 일그러졌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억울한 일이고 분통터질 일입니까. 자살해 죽어도 시원찮을 원망의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11차례 수술을 받는 동안 신앙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신앙은 참 묘한 것입니다. 인생도 참 묘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 처녀가 아주 완숙한 인간이 되고 깊은 신앙인 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현실을 뛰어넘는 깊이 숨겨져 있던 진정한 행복의 요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손길,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사고를 당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감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신앙과 인생의 신비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는 그런 마음을 이렇게 고백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리고 내 손이 왼손 보다 오른 손이 짧아졌지만 그 짧은 왼손이라도 남겨놓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손가락을 절단하려고 수술실에 갔다 나오면서 나는 손가락을 더 짧게 자르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다시 한번 감사드렸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서울을 나에게 통째로 준다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게 위로자 하나님이 계셔서 나는 행복합니다. 나의 모습, 이 모습이면 세상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로자가 될 수 있고 나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지금 내 몸이 엉망으로 망가지고 불편해졌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때로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이 삶의 기막힌 비밀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얼굴과 짧아진 손가락들 그리고 치료실에서 지낸 수많은 낮과 밤을 통해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 값이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고 신비롭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깊이 감추어 있는 행복의 요소를 발견하게 되고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발견한 행복을 어찌 나 혼자만 간직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지선양은 사람들이 이렇게 깊이 감추어진 행복을 모르고 건 듯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죽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내가 발견한 이 행복을 함께 나누려고 그 얼굴로 세상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그 행복한 삶을 예수께서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누라, 그리고 나눌 때는 오른 손이 하는 것 외손이 모르게 하라,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것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행복의 요소들입니다. 이 마음의 나눔, 생각의 나눔, 물질의 나눔, 신앙의 나눔, 관심의 나눔의 생활 얼마나 고급스런 삶입니까.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 원리로 세상을 행복을 창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