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리더와 참된 제자  (느 13:1-9)


어느 날,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교회 중직 모임에서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날 어떤 문제로 논쟁을 하다 감정이 격화되니까 교회 중직들이 멱살을 잡고 싸웠는데, 바로 그때 예배 시작 신호가 왔습니다. 그들은 급히 방을 옮겼고, 조금 전에 멱살 잡고 싸웠던 사람이 사회를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참된 표시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 이제 ‘사랑으로 저들은 알리’라는 찬양을 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수많은 부조리를 목격합니다. 무대 앞에서의 삶과 무대 뒤에서의 삶이 너무 다른 것,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성장추구, 돈과 이성과 명예욕에 이끌리는 삶, 교단정치와 교회정치, 마음의 고통을 숨기고 웃는 얼굴 뒤에서 슬퍼하는 모습, 잘못된 동기로 일을 행하는 기독교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재정을 바벨탑을 쌓는데 쏟아 붓고 잘못 사용하는 모습 등을 목격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참된 리더란 제자가 보지 않을 때에도 잘하는 사람이고, 참된 제자란 리더가 보지 않을 때에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볼 때는 잘하고 남이 보지 않을 때는 방종에 빠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은밀한 기도는 가장 능력 있는 기도이고, 은밀한 헌신은 가장 복된 헌신입니다. 대개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할 때 공동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는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교회 내에 파당이 있었고, 자기 계모와 동거하는 자도 생겼고, 교인끼리 싸우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도 벌어졌고, 은사와 방언 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다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은 대부분 엄한 감독자인 바울이 떠나고 온유한 지도자인 아볼로가 목회할 때 생겨났습니다. 그처럼 강한 지도자 아래서는 긴장하고, 온유한 지도가 아래서는 방종에 빠지면 안 됩니다.

참된 제자는 어느 지도자 밑에 있든지, 심지어는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맡은 자리에 충성하고 자기의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개혁되려면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참된 지도자와 참된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개혁의 기수는 되지 못해도 개혁의 기대를 가지고 진실하게 살려고 할 때 교회는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 교회 개혁에 필요한 것 >

느헤미야 13장에는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이 잘 묘사된 장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교회 개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2가지가 필요합니다.

1.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쫓아내야 할 것을 쫓아내지 못하면 결코 새로운 역사는 펼쳐지지 않습니다. 특히 영혼과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3가지를 반드시 쫓아내야 합니다.

1) 암몬과 모압을 쫓아내야 합니다.

성벽 봉헌식 후 백성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행한 것이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이방인을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때 느헤미야는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모세오경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왜 그런 말씀이 있게 되었습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원래 암몬과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라 혈통적으로 한 뿌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까지 주셨습니다(신 2:9,19).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양식과 물이 필요했을 때 모압 왕 발락은 복술가 발람을 초청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어려운 때에 형제 민족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일 수 없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섞인 무리’는 ‘신앙을 해치는 이방인 무리들’을 뜻하는데, 그들을 강제로 쫓아내 이스라엘 백성들과 분리시켰습니다. 이 구절에서 암몬과 모압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 침투한 온갖 세속주의 사상을 뜻하는데, 우리는 그런 세속주의를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2) 도비야를 쫓아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 동안 예루살렘 총독으로 있었을까요? 느헤미야 2장 2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간 것이 아닥사스다 왕 20년 때였고,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간 때가 아닥사스다 왕 32년 때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느헤미야의 총독 재위기간은 12년이었습니다.

그 12년 동안 느헤미야의 헌신적 신앙으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갔다 오느라 약 1년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있게 되었을 때 제사장 엘리아십이 성벽 재건을 방해했던 암몬 족속 도비야와 내통하며 큰 특혜를 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그때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내어준 큰 방은 원래 소제물과 여러 성물과 성전 종사자들에게 줄 양식과 헌물들을 두는 곳이었습니다. 그처럼 중요한 곳을 도비야에게 내어줌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올 때마다 도비야의 말을 듣고 신앙이 흔들렸고, 동시에 성전 곳간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라는 감독자가 사라지니까 리더와 백성들이 금방 방종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가 알고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던지고.” 느헤미야는 성전 안에 똬리를 튼 도비야를 통해서 문화적 종교적 침투가 이루어질 것을 염려해서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내어던지고 예수님처럼 성전 청소를 감행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도비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인간적인 수완과 기복주의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사실 도비야는 산발랏의 주구로 있으면서 성벽 재건을 방해했기에 공적 1호로 이스라엘 총회에서 쫓겨나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왕에게 간 사이에 어느새 대제사장 엘리아십을 꼬드겨서 성전 가운데 큰 방 하나를 차지했고, 그 일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인 수완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도비야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도비야를 중심으로 수많은 기득권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도비야를 몰아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느헤미야는 과감히 도비야를 성전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런 단호한 조치로 도비야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알고 보니 도비야는 종이호랑이였습니다.

어떻게 느헤미야가 그런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습니까? 도비야에게는 산발랏 장군과 기득권 세력이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느헤미야에게는 아닥사스다 왕이라는 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어떤 배경보다 더 든든한 하나님이란 배경이 있음을 깨닫고 과감히 우리 안에 있는 도비야를 척결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침체는 교회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장시키려는 각종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제일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어떤 세미나는 노골적으로 교묘한 탈법 및 편법을 가르칩니다. 그린벨트를 자연녹지로 만드는 방법, 불법 건축물로 건축비 보상받는 방법, 전도할 때 아파트 경비 속이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런 방법들이 바로 도비야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살려면 세미나부터 줄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돈을 노리고 교회를 찾는 도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드는 행동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가증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도 그런 도비야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야 할 내 영혼에 뱀 같은 도비야가 똬리를 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물질에 욕심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는 기복주의의 도비야를 철저히 쫓아내야 합니다.

3) 엘리아십을 쫓아내야 합니다.

왜 엘리아십이 대적 도비야에게 성전의 큰 방을 내어주었습니까?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둘 사이가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도비야의 달변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장 큰 이유는 도비야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자기의 입지를 넓히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지도자의 야욕과 지도자의 타락이 얼마나 큰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도비야보다 엘리아십입니다. 도비야가 아무리 달변이고 수완이 있어도 엘리아십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성전에 큰 방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내부의 대적이 외부의 대적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실상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야욕을 비전으로 포장한 교회 리더의 타락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도비야와 엘리아십을 척결해야 합니다. 물질주의의 도비야를 쫓아내야 하고, 물질주의와 외형주의를 조장하는 교회 리더인 엘리아십을 쫓아내야 합니다. 또한 지금의 물량주의적인 교회성장 방법들도 철폐해야 합니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내세워 바벨탑을 쌓고 심지어 세습까지 하는 엘리아십과 같은 사람 때문에 한국 교회 전체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 모릅니다.

물론 엘리아십도 한때는 순수한 신앙적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벽 재건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엘리아십도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성벽 재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제사장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느헤미야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엘리아십은 사명을 잃고 직업의식에 빠져 세속화되고 결국 도비야와 내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은혜란 지속되어야 진짜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과거에 큰 은혜를 체험하고도 지금은 빈껍데기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인간의 죄성과 욕심이 수시로 찾아와 은혜를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은혜를 막는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잘라 내버려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남의 죄가 아니라 내 안의 죄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가면 쓴 사람이 계속 자신을 악한 길로 끌고 다녔습니다. 자신은 잘하고 싶은데 그 가면 쓴 사람이 계속 선한 행동을 못하도록 방해를 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의 가면을 확 벗기자 가면 뒤로 나타난 얼굴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나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나 자신의 죄성과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려면 버릴 것을 잘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버리는 결단을 아주 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제일 원리는 과감한 결단이었고, 베드로의 축복의 제일 원리도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 불편하게 살고, 조금 재미없게 살고, 조금 당하면서 사는 한이 있어도 세상 원리대로 살지 말고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편안보다는 평안을 추구하고, 재미보다는 의미를 추구하고, 당하는 한이 있어도 등쳐먹지 않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도비야와 엘리아십을 내쫓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2. 채울 것을 채워야 합니다.

참된 개혁을 위해서는 잘못된 것을 버리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좋은 것을 채우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느헤미야가 성전의 방을 정결케 하고 그 방에 다시 성물과 헌물들을 들여놓은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순수한 신앙과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그 방은 레위인에게 줄 십일조와 제사장들에게 줄 거제물을 두는 곳이었습니다. 십일조와 거제물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전 종사자들에게 줄 사례비입니다. 느헤미야가 그것을 제자리에 놓게 한 것은 신앙회복을 위해서 무엇보다 헌신하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 우리 마음을 말씀과 기도와 감사와 헌신으로 채우고 정결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도 깨끗하게 될 수 없고, 내가 개혁되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런 거룩한 삶이 무엇보다 큰 축복입니다.

특히 지도자일수록 더욱 거룩함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레위기 21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는 북한의 침략이나 경제 위기가 아니라 영적 지도자의 타락입니다.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했고, 다윗 정권이 흔들린 것도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건 이후의 일이었음을 생각할 때 영적 지도자의 타락은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새 교회마다 건축을 하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오로지 성장과 과시를 목적으로 바벨탑을 쌓고, 마치 교회 건축만이 교회의 사는 길인 줄 알고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고, 바벨탑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벨탑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한때 세계를 영적으로 삼킬 것처럼 폭발적으로 부흥했고, “우리 한민족이 영적 장자국가다!”라는 자부심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25% 정도의 복음화를 기록하고 지금 후퇴 중입니다.

개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대단히 열심이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도 많이 시들어 있는 모습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성벽 재건 후에 신앙이 후퇴하고 지도자들이 타락한 본문에 나오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봐도 확실히 신앙의 순수성을 많이 잃었고, 옛날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때에 다시 한번 신앙 건축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받은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이겨내고 순결한 믿음을 회복해서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어둡다고 할 때 자기 욕심을 버리고, 이런 때일수록 더욱 진실한 신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진실한 신앙을 보여주십시오 >

중국 문화혁명으로 선교사들이 추방 명령을 받았을 때, 한 선교사가 자신이 양육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된 중국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큰 환난과 핍박이 있을 텐데 저와 함께 이곳을 피해 내일을 도모합시다.” 그때 중국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녹차가 뜨거운 물에서 진짜 맛을 우려내듯이 저도 환난과 핍박 속에서 저의 진실한 신앙을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우리도 그런 순결한 신앙을 되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되려면 지도자의 회복이 중요하지만 지도자만 판단하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우리가 다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항상 판단하는 마음이 들 때 자기의 모습부터 먼저 살피고, 교회의 타락을 질책하기 전에 나에게 타락한 모습이 없었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누나 미리암이 모세의 아내를 까만 여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오히려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미리암아! 너의 얼굴 하얀 게 그렇게 잘났니? 그렇다면 네 얼굴을 더 하얗게 만들어주고 네 얼굴에 꽃도 그려주마.”

우리는 판단하는 습성을 버리고, 남을 판단할 때에는 언제나 철저히 자신을 먼저 살핀 후에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간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철저히 살핀 사람은 남을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도둑이면 자신은 강도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판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결코 행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서울에 한 똑똑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명문대를 나왔는데, 직장을 다닐 때 직장에 갖다 오면 날마다 “그런 더러운 놈들과 일 못해먹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직장 동료들을 비난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아내와 의논도 없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문대 출신이라 그런 대로 괜찮은 교회를 맡아 목회를 잘했고 교인들로부터는 영성과 지성이 겸비한 지도자요, 세속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목자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너무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자신과 남에게 엄격하고 정죄를 잘하니까 언뜻 보기에는 의롭게 보였지만 사모님에게는 이중인격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하루는 카운슬러를 찾아 자신의 사정을 다 말하고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카운슬러가 말해주었습니다. “사모님! 성공은 능력과 관련이 있지만 행복은 성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격이 비난하는 성격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도 항상 불행을 느끼고, 칭찬하는 성격이면 부족한 배우자와 살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도 절대로 변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상대도 반드시 변합니다. 사람들은 다 당신이 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변하면 목사님도 변합니다. 그러므로 사모님의 가정문제는 꼭 목사님의 문제만은 아니라 두 분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분 지적대로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건강한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건강한 성격으로 2가지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구절에서 ‘쉼’은 ‘행복’을 뜻하는데, 그 행복을 얻으려면 ‘2격 1행’이 필요합니다. ‘2격’이란 ‘온유한 성격’과 ‘겸손한 성격’이고, ‘1행’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거만한 모습으로 남을 비판하며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은 목회에 성공해도 행복과 기쁨은 없습니다. 교회는 크지만 교회 중직에 대한 분노가 있고, 아내에 대한 분노가 있으면 행복은 점차 멀어집니다. 그러면서 더욱 비판적인 모습이 되고, 그런 모습을 자신만의 거룩한 모습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 딸 하나가 있는데, 우울증에 걸려서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사귀지도 않고, 그냥 방구석에 쳐 박혀 지내고 있었습니다.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부모와 살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행복한 가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상황에서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식구들입니다. 그것이 자기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개혁만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불행한 결말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 개혁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모두 리더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제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참된 리더와 참된 제자가 필요합니다. 항상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리고, 채울 것은 힘써 채우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리더와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