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전도   (행14:1-7)

Ⅰ. 들어가는 말

키엘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한 개인이 홀로 서는 단독자의 결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까지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한 일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 있는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땅에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섬기는 모든 사람들과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교회라고 말하는 모이는 교회는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적인 의미에서의 교회가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이미 아시다 시피 여러분 개개인이 다 교회입니다. 그래서 혼자 신앙 생활해도 될 것 같은데 왜 모여서 복잡하게 공동체를 이루고 부대끼면서 생활해야 합니까?

그것은 첫째로, 공동체로 모이는 교회 생활이 없이는 신앙과 인격의 성숙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관계의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독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함께 살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속에서 인격이 성장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말하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는 성품을 사회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바로 이렇게 함께 어우러져서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에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노소, 흑, 백, 황인종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다 보니까 그 속에서 인격 훈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간절한 노력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따금 우리 어른들이 자기 자녀들을 출가시킬 때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기피하는 현상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이야 거의가 다 외동딸 외동 아들 이어서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 이유는 혼자 자라나는 동안에 인격적인 균형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많을수록 싸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밀고 당기고 고집부리고 고집이 꺾이기도 하고 양보하면서 그들은 인격적인 성숙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 두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인격적인 성숙을 도모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 깊숙이 들어와서 함께 부대끼면서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당장은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결코 평생에 신앙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인격들, 성품들이 만나서 서로 부딪히면서 성장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입니다.

둘째로, 지속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따금 개인적으로 심경을 읽고 기도를 함으로써 신앙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무교회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규칙적인 시간에 모임을 갖습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무교회 신앙이 아니라 무교회 주의라는 또 하나의 교파일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믿음 안에서 교제함으로써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사실상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요사이 혼자 새벽 예배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혼자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못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금요일에 못 일어났는데 하필 목사가 못 일어날 때는 어느 분이 다녀가시더라구요. 혼자라는 것은 약한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도 한 두 번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힘을 공급받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약함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등한히 하면 반드시 기도 생활도 경건 생활도 다 등한히 하게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시간을 개인적으로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게 모여서 하는 새벽 예배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혼자서 선교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헐버트 케인이라는 선교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혼자서 선교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이다." 선교라는 것은 너무 엄청난 세계적인 과제입니다. 선교에 관한 한, 영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교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홀로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는 사역의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함께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들은 모여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언어와 문화와 계층의 차이를 포함한 모든 다양성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하나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함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함께 유무 상통하면서 교제의 기쁨을 누립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미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사역은 한 마디로 함께 하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팀(team)을 이루어 사역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최초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함께 하는 사역의 중요성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여행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오늘 이고니온에서 일어난 일들을 특별히 함께 하는 전도라고 하는 측면에서 함께 관찰해 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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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문 관찰

1. 함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우선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主)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1-3절).
여기에서 {두 사도}라는 말은 바울과 바나바를 말합니다. 행13:50절을 보십시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城內)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그럽니다. 사도행전을 조심스럽게 관찰해 보면, 사도행전 초반부의 기록들에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가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후반부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로 그 순서가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리더십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가 먼저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에게서 지도자로서의 위대한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서서히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여전히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기자(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라고 바울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주(主)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 누가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좀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전파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함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하나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도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사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오래 이고니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이서만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초대 교회 최초의 선교사로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았다는 사실을 살피고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서 역사상 유래 없는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무엇을 했겠습니까? 아마 날마다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사의 새로운 장이 안디옥 교회와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후원의 기도를 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 두 사람이 교회에서 얼마나 역량 있게 사역했던 사람들입니까? 정말 보내기 싫은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들을 보내놓고 교회가 잠만 자고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만이 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姓)도 이름도 몰랐던 우리들, 배경도 저마다 다른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하시고 신앙의 한 가족이 되게 하신 이유가 본질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너와 나의 모든 장점과 모든 은사와 모든 가능성을 동원하여,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입니다. 말을 바꾸면 {함께} 지어져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일구어 가는 일도 함께 할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서 야유예배를 가지는 것도 함께 해야할 일입니다.

2. 함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본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그럽니다. 악감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장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그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이 함께 했습니다. 3절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아주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主)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그랬습니다. 많은 핍박과 반대와 능욕이 있었지만 구원의 드라마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주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은 두 사도가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함께 그 도시에 오래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심을 입은 것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디옥 교회에 역사 하실 때 바울만을 구별하여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뒷날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할 때도 바울은 실라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삼고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시키실 때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눅10:1절).
여러분! 만약 바울이나 바나바나 혼자 이런 고난을 당했더라면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면 가능이야 했겠지만 훨씬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둘씩 함께 고난을 받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잠4:9-1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오늘날 교회 생활의 최대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믿음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말을 바꾸면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말은 청산 유수네. 내가 어려울 때는 아무도 나와 함께 있지 않더니.... 말이 좋아 함께 고난이지 뭐 정말 내가 어려울 때 물질이 필요해서 보증을 원하고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다 남이던데... "등등의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함께 고난을 당한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까?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두가 어려울 때 왜 나를 돌아보아 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것은 자신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내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더구나 우리의 눈은 너무나 철저하게 내면 세계를 보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늘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섭섭이가 되는 것이지요. 목사도 섭섭하고, 교회 누구도 섭섭하고......

오래 전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서 어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골 교회의 따뜻한 분위기 대신에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마 일년 가까이 출석을 했는데도 아무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그들의 인내가 한계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결판을 내자."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서로 달랐습니다. 한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자신이 먼저 누구에게든지 말을 걸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다음 주일 날 한 친구는 자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자 그것으로 교회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사람은 자신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리차드 백스터라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교제를 찾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관계가 형성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고, 나의 존재 이유를 알기 시작합니다.
함께 삶을 나눌 친구가 있을 때 그리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이라는 것을 단순히 어려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도전해 볼 만한 삶의 과세로 수용하게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부부가 맞이한 어떤 고난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는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것으로 인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같이 뚫고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사도행전의 드라마였습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5-7절). 그들은 그 도시에 머물 수 있는 한계가 지났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이 생겼다고 금방 옮긴 것이 아닙니다. 3절에 의하면, 그들은 그곳에서 견딜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버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고, 그들은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고니온을 떠난 것은 단순히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다음절에서 분명해집니다. 7절입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그들은 다른 마을로 옮겨가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전도하다가 고난을 당했을 경우 다음과 같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내가 욕먹으면서 이 짓을 왜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 고비만 넘기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되고, 신앙도 위대하게 성숙해 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때문에 전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도의 새로운 장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장소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그들에게 변할 수 없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환경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계속해서 나갈 수 있었던 그들의 용기와 능력과 힘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함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이 교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3.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13장의 마지막 부분인 45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45절).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가득한 시기를 받으면서도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웃들에게 가득한 시기를 받아 가면서도 내적으로는 가득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역설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이 허락하신 기쁨을 맛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기뻐했을까요? 물론 그들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전도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그들이 기뻐했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목표를 가지고 함께 삶을 나누며 전진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괴테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난은 함께 나눌 사람만 있다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을 함께 나누고 인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기쁨, 이 교제의 기쁨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는지요?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리고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삶의 고난과 슬픔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과 영감(靈感)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교제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면 이런 기쁨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의 교제처럼 순수할 수 있는 교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우리가 만난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만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아래서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들이 만난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해 타산을 따지기 위해서 만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 우리를 세우시고 그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우리를 사랑방 교회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끼리 돈을 빌려주거나 얻어 쓰는 일들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니 성경적인 원리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자놀이나 돈을 빌려주는 행위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습니다. 빌려 줄 때는 아예 그냥 주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교제가 깨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절대로 돈 거래를 하지 말고 그냥 주십시오 우리는 돈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만난 것입니다. 돈이 관계에 개입되게 되면 이래도 서운하고 저래도 서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권세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제때 주려고 했지만 형편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이미 그 시간에 맞추어서 모든 계획을 진행시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돈을 갚을 수 없게됩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돈이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교회의 교회 됨을 해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보증이나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이해관계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이해 타산이 얽힌 관계로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입니다.
우리는 출세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닙니다. 사업차 만난 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이런 목적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로 되면 교회 안의 교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기를 가진 교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가지 때문에 만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만난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 때문에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그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한 가족으로서 누릴 누 있는 이 교제처럼 근원적으로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교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교제는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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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야유예배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함께 고난을 받으며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관계의 성숙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차라리 이 주일에 함께 모여서 술이라도 먹고 각종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관계의 증진을 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가운데서 이것을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통 쪽에 더 무게 중심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족은 가족인데 아주 서먹서먹하고 피상적인 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저절로 성숙되는 관계를 보셨습니까? 그런 관계란 없습니다. 시간을 들이고 노력해야 서로의 관계가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간의 교제를 위한 방편으로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사도행전을 공부해 가면서 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불행이 될 것입니다. 함께 전도하고 함께 고난을 받으며 함께 기뻐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모임을 통해서 함께 하는 기쁨을 누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 )

출처/김종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