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정신으로 산다  (갈라디아5:16-26)

‘필립 코틀러’와 ‘낸시 리’가 공동집필한 “필립 코틀러의 사회 책임경영” “착한 기업이 성공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기업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공통된 하나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를 원하고 있으며, 지역사회들은 그 희망을 실현시키고자 기업의 협조와 지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협조와 지원에 기꺼이 자산을 내놓아 사회참여 사업을 펼치는 기업들은, 좋은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높이게 되고, 고객들의 신뢰도 받을 수 있어서 비즈니스상의 실리까지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의 사회참여를 통하여 ‘선행’과 ‘이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성공적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세계 최고의 부자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한 ‘빌 게이츠’입니다.
게이츠부부는 “세상의 모든 생명은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고, 에이즈와 말라리아로 얼룩진 세계의 어두운 구석에 밝은 빛을 비추기” 위하여 2000년 1억 달러를 기부해서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게이츠재단의 기금은 현재 320억불(약30조원)인데, 그 동안 (잠비아 등 5개국에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를 위해 7억 6,500만 달러,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글로벌펀드에 6억 5,000만) 약 1조4000억 원을 투입해서 약7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1만 1,000여개의 도서관에 인터넷을 설치했고, 소수그룹에 속하는 7,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대학에 보냈습니다.
이들의 헌신에 자극을 받아, 2004년에는 유럽연합이 개발도상국어린이들의 질병예방을 위하여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세계 두 번째 부자 ‘워런 버핏’이 자기 재산의 80%에 해당하는 370억 달러어치의 주식을 사회사업에 기부하기로 선언했고, 그 중에 300억불을 게이츠재단에 헌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말합니다. “나는 부를 사회에 되돌려 줄 책임이 있고, 또 최선의 방식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의 재산 500억 달러 중에 단1,000만 달러만 자녀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화사업에 내 놓겠습니다. 그리고 2008년부터 회사 일에 완전히 손을 떼고 재단 일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 기업에서 8,000억 원을, 또 한 기업에서 1조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선언한 일이 있었는데, 웬지 모양세가 어색했습니다. 기업이 스스로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헌납을 약속하는 듯해서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기업이 일만 열심히 해서 돈만 벌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통해서 좋은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때는 교회가 부흥되어, 큰 교회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지도력을 인정받고, 존경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교회가 세상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일에 무슨 공헌을 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좋은 교회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큰 교회에 나간다면 당연히 좋은 교회 교인이라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각자의 삶의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실제로 건강한 가정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직장과 일터에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오는지, 실제로 인생의 질을 더 높여 주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어떻게 좋은 교인이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갈등의 삶입니다.
갈라디아5:17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개인의 특별한 노력 없이 그야말로 믿음으로 얻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고 하는 것, 성장하고 성숙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개인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긴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 자아 속에 육체의 요구와 성령의 요구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요구가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어서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살 때는 성령이 슬퍼하고, 성령의 요구를 따라 살려면 육체의 요구를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의 요구를 따라 살 때는 제법 성자 같은 거룩한 모습의 자신을 보며 흐뭇해 할 때가 있습니다만 육체의 요구에 빠져들 때는 아직도 속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7:15-24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바울사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후55년경 3차 전도여행 중에 기록한 고린도전서11:1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15:9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그로부터 7년 후 62년경, 2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중에 기록한 에베소서3:8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
그리고 그 다음해 죽음을 불과 1년 앞둔 63년경에 기록한 디모데전서1:15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신 있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던 그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낮아지고, 급기야 “죄인 중에 괴수”로 전락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겸손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갈수록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더 정직해진 것입니다. 갈수록 더 못해졌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족한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고등학교 3년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36년 만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목사’라고 부르면서 야자 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 나에게 참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대화중에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와는 많이 달랐었어, 항상 표정이 밝았고, 모든 일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아주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보다 언제나 생각이 깊어 우리들과는 많이 달라서, 너 좋은 목사가 될 줄 알았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때도 그 정도였으면 지금은 성자가 되었어도 대단한 성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의 내가 그만큼 미치지 못하니 하나님과 여러분들 앞에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가끔 갈등합니다.
영적으로 갈등하며 사는 삶이 신앙인의 현주소입니다.

둘째, 벗어 버려야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5: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세상에 속하여 살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육의 지배를 받으며 불의의 병기로 살던 우리가 이제는 성령님께 속하였습니다. 의의 병기로 살아갑니다.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사람입니다. 내속에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과거에 정욕과 욕망을 좇아 살았던 내가 이제 그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거듭난 내가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과에도 이미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습니다. 나의 죄의 정욕으로 살려고 하는 나를 날마다 죽입니다. 바울사도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이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습니다.  

에베소서4:22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갈라디아5:19,20,21의 일들은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마치 옷을 벗어버리듯 옛 사람의 사람의 삶의 방식을 벗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행해야할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그 옛 사람의 방식은 내 것이 아닙니다. 벗는다는 말은 뽑아버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밭에서 잡초를 뽑아버리듯 악한 습관들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벗어야할 과거들이 다를 수 있지만 스스로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1.술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술집 근처를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친구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치 못할 경우에는 술 대신 콜라든지 사이다든지 큰 잔에 시켜놓아야 합니다.
2.컴퓨터 게임에 빠졌었다면 경건한 친구에게 게임시간을 점검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3.포르노의 유혹을 받고 있거나, 인터넷상에서 불건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한계를 정하십시오. 컴퓨터를 거실에 두고 하든지, 혼자 있는 시간이나, 밤늦은 때에는 사용을 제한하십시오.
4.불건전한 잡지나 책들에 잡혀있었다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십시오.
5.데이트 상대와 육체적인관계를 맺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면, 둘만의 데이트는 피하도록 하십시오. 데이트시간과 장소를 제한하십시오.
6.텔레비전의 불건전한 내용에 잡혀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끄십시오.
7.잘못된 인간관계는 청산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그 동안 나를 지배해 오던 나쁜 습관들이 하루아침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습관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단호한 결단과 새로운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테복음5:30에 이러한 삶에 아주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또 네 오른 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셋째, 반드시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갈라디아5:25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삽니다.
성령은 영어로 Holy Spirit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영 Jesus Spirit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의 영, 예수의 정신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5:22,23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삽니다.
에베소서4:23입니다.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낡고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며 삽니다.  
1.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을 습관화  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살아있으면 그 말씀이 힘입니다.
2.죄의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과 삶 앞에서 우리의 죄를 겸손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고백은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입니다. 1903년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바로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 자신이 야만적인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고 교만했던 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회개가 모든 사람들의 죄의 고백으로 이어지면서 부흥의 물결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고백은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이 동시에 있습니다.
3.기도를 습관화하십시오.
새벽, 작정, 금식기도의 습관을 가지십시오.
4.예배에 참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에 참여하십시오.
5.성도의 교제를 늘리십시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에서 헌신하고 참여하십시오. 성도들 간에 함께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신앙적인 적절한 멘토를 가지십시오. 신앙생활을 점검받으며 잘못된 생활들을 버리도록 하십시오.
6.선한 봉사에 참여하십시오.
7.성찬에 참여하십시오.
주의 만찬에 정기적으로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죄를 살피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신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의 힘으로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야구 방망이와 공을 가지고 집에서 나와 뒤뜰로 걸어가며 혼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타자다.” 그러고 나서 그 공을 공중으로 던지고는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공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신이 심판인양 큰 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원 스트라이크!” 소년은 다시 공을 주워서 공중에 던지고는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역시 맞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소리쳤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소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공을 던지기 전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역사상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타자이다.” 공을 던지고는 다시 방망이를 세게 휘둘렀습니다. 세 번째 공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쓰리 스트라이크!” 하고 소리친 소년은 이렇게 말을 덧붙였습니다. “와! 얼마나 놀라운 투수인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투수이다.”

예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실패까지도 더 나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신앙적인 실패를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 때문에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의 뿌리는 더욱 십자가를 붙들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아픔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땅에 사는 하늘 사람은 예수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예수정신으로 사는 자들에게 실망이나 실패는 없습니다.
더 나은 내일의 승리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