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통과하게 하옵소서  (신 8:1-3 히5:1-7)  


누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새벽 기도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을 보면 입시철이 다가오면 가정에 입시생을 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그리고 입시가 끝나면 기도자의 숫자도 다소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긴박함이나 어려움에 처해서 더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신앙의 내용은 현실의 깊은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천상에서 출발해서 땅의 문제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땅의 문제에서 하늘의 문제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문제 속에서 그것이 단순히 이 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려면 이 세상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대답을 찾기 위해 들어 올 때 대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예배 의식의 순서에 따라서 무의미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코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를 자신의 언어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시험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시험에 시달리는 우리의 현실이 전제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는 시험을 당한 사람이 시험 속에서 하나님께 외치는 절규인 것입니다.



시험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시험이란 무엇입니까?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적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적인 시련입니다. 교육적 훈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파괴적 시련은 세상과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시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도 악한 의도로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2:1).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어하십니다(신13:3).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해서 그 신앙의 진실성을 알아보시고, 사람이 신앙의 시험을 통과하면 더 큰 복을 주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4-16).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시험은 사실은 시험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구원과 복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악의의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 중에 ‘시험하는 자’란 이름은 없습니다. 도리어 성경에서 ‘시험하는 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1:13-15).



악과 시험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불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없는 현실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그러면 쉬지 않고 인간들을 시험으로 인도하는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행과 고통만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복과 번영도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궁핍할 때보다 풍요로울 때 더 많이 시험에 빠집니다.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성욕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는 금욕,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욕구, 그리고 영적인 욕구를 채우는 경건한 수련 등 모든 것이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부와 함께 가난, 노동과 함께 휴식, 고독과 친밀한 교제, 명예욕 등등 모든 것이 인간에게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의 냉대가 시험이 될 수 있다면 친밀한 가족 역시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시험과 유혹은 동의어힙니다. 사람들은 유혹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혹은 인간의 내부에서 올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유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큰 유혹이 있다면 유혹에 관하여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을 유혹으로 생각하지 않고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1912년 4월 10일, 사상 최대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승객 2206명을 태우고 첫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은 스케쥴로는 4월 17일 수요일에 미국 뉴욕 항에 도착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장 스미스는 16일 화요일에 하루 일찍 도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23노트로 전속 향해를 했습니다. 그는 빙원지역에 들어서서 빙산 경고를 6~7번을 받고도 23노트라는 최고 속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빙산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가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배가 빙산에 부딪쳐서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의 승무원은 불과 10 마일이 떨어져 있는 배 캘리포니안 (Californian)호한테 비상 요청을 하였습니다. 캘리포니안 호는 타이타닉하고 매우 가까워서 배가 다 침몰하기 전에 와서 모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안 호의 오퍼레이터(operator)가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은 밤이여서 응답장치를 꺼놓았던 겄입니다. 그래서 타이타닉호는 불꽃으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구조 싸인을 보냈습니다. 캘리포니안 호의 선원들은 이 불꽃놀이 싸인을 봤지만 타이타닉이 위험한 상황 이란걸 모르고 구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타이타닉 호의 사고는 대형사고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타이타닉은 구명 조끼는 넉넉했지만 구명보트는 미관상의 이유로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과정 하나 하나가 시험을 시험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생긴 커다란 사고인 것입니다.



유혹의 원인

그러면 우리가 왜 유혹을 받습니까? 우리가 유혹을 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1. 피조성

우리가 유혹을 받는 첫째 원인은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우리는 제한된 삶을 살아가므로 고난을 당합니다. 불완전함과 무의미성 때문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며, 절대자를 만나려고 노력하며, 유한 속에서 무한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것을 동경합니다. 우리는 유한과 영원의 경계선 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이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유혹을 받기 쉽게 만듭니다.



2. 자유

우리가 유혹을 받는 두 번째 원인은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온 뱀의 유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지혜로워지며 하나님 같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혹하는 것은 항상 생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보이고, 더 큰 행복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에 더 가깝게 될 것이라는 거짓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유혹의 결과는 더 큰 자유가 아니라, 속박과 종살이와 고통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도덕과 이성만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한계 없이 쓰려고 하는 곳에, 자신의 자유를 무제한 실험해보고자 시도하는 곳에 시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언제나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의 자유를 역이용해서 우리를 노예로 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도리어 유혹의 도구인 것입니다.



3. 죄

우리가 유혹을 받는 세 번째 원인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죄악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지길 원했으며, 하나님 없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말과 행동과 마음과 생각이 모두 부패하였습니다. 사람 중에서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험의 극복 방법

그러면 시험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 동안 갖가지 시험들이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시험을 받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까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났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라

시험을 이기는 첫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먼저 40일 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때 마귀가 항상 반복하여 하는 질문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해 보아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내게 절하라.” (마4:3,6) 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극복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2. 성령님을 의지하라

시험을 이기는 두번째 방법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서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으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삶을 사셨습니다.



3. 기도하라

시험을 이기는 세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반기신 것이 아니라 시험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8-39) 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시험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는 시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시험(Test)은 진리의 시간이요 능력을 증명하는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때때로 기독교 역사 속의 경건한 사람들은 시험을 반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시험을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고 강하게 하는 기회로 생각하고 반겼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우리의 신앙이 정화되고 성숙해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우리 신앙을 측정해볼 의도로 시험을 찬양하거나 시험을 원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시험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만하면 문제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주어진 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운송회사에서 트럭 운전수를 채용하기 위해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 문제의 하나는 누가 벼랑길을 낭떠러지에 접근시켜 가면서 운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1미터 가량 거리를 두고 운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30센티 가량 거리를 두고 운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바퀴를 벼랑에 걸치고도 운전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은 자기는 위험한 길을 운전할 때면 되도록이면 벼랑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으로 운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채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피하기를 원하셨지만, 그 뜻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서 순종을 배우신 분이십니다.



언제 이 기도를 드리는가?

그러면 언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불안한 상황에 처할 때,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때, 주변 상황이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할 때, 이때가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죽음의 위협이 우리를 엄습할 때, 생의 의욕이 없으며, 내게는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욕망이 나 자신도 용납하지 못하는 비열하고 부정적인 곳으로 향해 있을 때, 내게는 악을 이길 힘이 전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여, 나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이 희미해 보일 때, 진리와 비진리가 구별이 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풍요한 삶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할 때,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때,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주여, 나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이 세상의 일들이 잘 되어 가는데도 나의 영혼은 점점 공허해 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멀리 느껴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마지막까지 가기 전에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주여, 나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기도입니다. 시험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우리가 시험에 빠져서 다시는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지점까지, 막다른 골목까지 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늪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점점 더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상황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유혹 가운데서도 결정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쓰러지기를 거듭해도 완전히 넘어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확신 속에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노라”(고후 4:8-9).



우리를 돕는 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를 돕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시험을 받으셨으므로 시험 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히브리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고난과 시험의 학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교장선생님이요, 선배요, 동창생이요,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함을 동정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절한 때에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주님께로 신뢰를 가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5:2).

예수님은 무지해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연약함에 휩싸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을 이기도록 용기를 주시고, 신앙을 일깨워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중에 시험에 드신 분이 있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시련 가운데서 지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받는 공동체로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을 이기는 공동체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만이 우리의 등불이 되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으로, 그리고 우리를 돕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복을 충만히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