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사무엘하 12장 15-25절)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새 제가 정길진 목사님이 4월에 사모님을 보내시고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약속을 하면 저에게 몇 번이나 확인 전화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약속한 날짜가 내일인가요?” 그러면 제가 가끔 핀잔을 줍니다. “목사님! 거의 치매 수준이 되었어요. 이제 사모님 그만 잊으세요.”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