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공동체   (사도행전 4:32~37)


아마도 우리 모두는 지난 며칠간 엄청난 충격 속에 지냈을 줄로 압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는 9.11 테러사건 이후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32명의 죽음에 대해 전 세계가 경악과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학살행위를 저지른 범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재미동포들은 물론 모든 한국국민들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뿐 아니라 죄스러움과 부끄러움과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보복의 두려움까지 떠안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과 한국의 여기저기에서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애도와 추모의 기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범인이 한국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이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과 참사를 당한 버지니아공대와 미국민 전체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사건은 아직도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지만 범행동기와 배경이 차차 드러나고 있고 앞으로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이 사건의 보도를 접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인 대학생에 의해 이런 참극이 벌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당혹감을 가졌으며 미국 내 한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이 받을지 모르는 혐오나 비하 또는 보복이나 불이익을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보도를 통해 미국인들 대부분은 이 사건이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한국 국민 전체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이며 한국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거나 책임질 일도 아니고 이 사건이 미국 내에서 인종갈등이나 한미관계에 악화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그러한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고와 태도 앞에서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위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은 범인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범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사람의 문제로 여기며 한국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오히려 달래주는 미국인들의 차분한 모습이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나타난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의 훈련 중 사고로 숨진 두 여학생을 두고 얼마나 많은 군중이 밤마다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며 두 미군병사가 아닌 미국 자체를 반인류적인 범죄국가로 몰며 반미의식을 고취하고 분출하는 데 열광했습니까?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생각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런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원인을 우리는 범인에게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언론에서는 그의 정신질환이나 과대망상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성격 속에 형성된 소외감과 폐쇄성을 그 원인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다 불특정다수나 사회에 대한 그의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그의 극단적인 폭력행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일 것입니다. 범인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일의 동기에 대해 그 자신이 설명한 과대망상적인 발언을 보면 자살테러를 신앙화하고 미화하는 어떤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그의 성격의 형성과정이 어떠하든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에게서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분노를 바르게 다스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불특정다수나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분노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고 그를 측은히 여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분노를 분출한 방법을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런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해소하게 만든 사고나 이념이나 종교나 어떤 집단이나 세력이 있다면 그것들은 정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범인이 겪은 소외감이나 좌절감이나 분노는 그만이 겪은 것도 아니며 그가 가장 심하게 겪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외국에 가서 피부색갈이나 얼굴모습이 다른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충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애로와 분노를 긍정적으로 소화하고 해소하는 길도 여러 가지이며, 그러한 어려움이 있기에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고 더 위대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그러한 긍정적인 해결의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12:16),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14:17),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15:18),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19:11),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22:24-25),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27:4),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29:11),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29:22)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했습니다. 야고보 또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19-20) 했습니다. 성경의 이 많은 가르침을 그 청년이 배우고 깨달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의 또 다른 문제점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계명 열 가지 중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듯이 아무리 분노가 컸다 해도 사적인 살인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이고 하나님이 그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되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도적질한 것은 갚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한 것은 취소할 수 있습니다. 명예를 더럽힌 것은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진심과 정성으로 시간을 두고 치유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끊어놓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버지니아공대 학살사건의 범인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더라면 그런 방법으로 자기의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난사범이 저지른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인간적인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아무런 설명도 불가능한, 단지 범인 한 사람에게만 모든 책임이 돌려져야 하는 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살며 성장한 사회와 환경과 주변사람들이 이 사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한 뒤틀린 성격의 청년이 저지른 것입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에 유독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극단적인 방식으로 반발한 한 개인의 과대망상적이고 소영웅주의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가난할 이유도 없고 가진 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질 아무런 명분도 없으며 그가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한 적도 없으며 그가 무시를 당했거나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여길 만한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어디서든 그러한 비극이 재발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다같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살피며 그 책임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버지니아공대의 참사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의 문제점은 공동체의식의 결여라는 것입니다. 특히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공동체의식과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라는 관점에서 미국사회는 우리 사회보다 많이 앞서있다고 봅니다. 사실 오늘날 선진복지사회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공동체의식과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서 앞서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미국사회를 향해 질책할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미국사회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며 그곳에서도 이번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같은 자가 생겨날 소지가 있음을 직시하고 우리 사회를 공동체의식이 강하고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세심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 시급히 더 크게 기울여야 할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같은 비극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관해서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깨닫게 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초기의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 완벽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예루살렘교회에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는데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그 이유는 32절이 증언하듯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며 34-35절에서도 보듯이 밭과 집이 있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가진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이들이 그 가진 것을 모두의 필요에 따라 나누고 사용하게 하는 것이 누구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기 쉬운 내 형제 이웃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이 온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에게 가져온 사람 중에 키프로스 출신의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36절은 전합니다. 그런데 그 요셉을 사도들은 바나바라고 불렀는데 바나바란 이름의 뜻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의미 있게 들립니다. 가진 이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나눔으로써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적이 되고 원수가 되고 저주와 타도의 대상이 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모두가 불행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가진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위로가 되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아예 없어지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부족하고 소외되기 쉬운 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나 그들을 위한 희생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오늘 본문 중 32-33절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든 이가 다 재물 앞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첫머리 말이 무엇입니까? “믿는 무리”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그렇게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3절 끄트머리의 말이 무엇입니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이들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에 은혜를 받았습니까? 33절을 다시 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가진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하며 물질적으로도 유무상통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에게 먼저 희생이 되고 위로가 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고 또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은혜 받은 사람들의 능력이고 또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만 아니라 우리 사회까지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의 중심에 서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참극은 언제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왕따 만드는 일은 국민 모두가 합력하여 없애야 합니다. 내 아이가 왕따 되는 일에는 흥분하면서 내 아이가 남을 왕따시키는 것은 대견스럽게 여기는 부모는 자기 아이가 왕따시킨 아이에 의해 자기 아이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할 사태를 준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 인색함이 나의 인생과 행복을 파괴하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2의 버지니아공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부터 먼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사랑, 그것만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아픔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입니다. 다시 한 번 이번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크나큰 위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