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의 사람              (창37:1-11)                

*요셉은 성경 인물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난관을 헤치며 마침내 하나님의 때를 움켜쥔 사나이요,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용서한 통큰 사나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꿈을 꾼 친구입니다.  단순한 개인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꿈이었습니다.
이 비전이 요셉을 요셉되게 했습니다.
그가 오랜 고난의 기간동안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비전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모두 젊은 시절에 이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만한 분명한 꿈’이 젊은이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소유와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사람은 비전의 소유자입니다.
간디는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전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한 엄청난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됩니다.

*백여년 전 미국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모두가 타 버려서 비탄에 빠져 있을 때, 한 가게에 이런 방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 가게가 이번에 몽땅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아직 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부터 정상 영업을 하겠습니다.”

비전은 어려운 때일수록 필요합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비전을 창고에 방치해 놓는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비록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오막살이가 다 쓰러져 가더라도
비전이 있다면 그 집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가족은 그 희망을 바라보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공사장의 흙을 나르는 허름한 트럭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공사장 트럭 운전한다고 나를 깔보지 마십시오. 이래봬도 큰딸은 A대학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B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자식의 미래를 준비하는 아버지이기에 그는 자부심을 갖고 힘든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냐는 것과 비전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비전이 필요합니다.

*지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스물 다섯 명의 탈북 동포들이 꿈에도 그리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목숨을 걸고 스페인 대사관에 달려들어가, 자신들의 입장을 전 세계에 알리며 구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 대모험이 성공한 것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그동안에도 많은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일 것입니다. 그럼 이미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행복합니까?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에게 "왜 출근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요?  몇 사람이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출근한다고 말할까요? 또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정으로 향하는 직장인에게 "행복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요?  몇 사람이나 행복하다고 말할까요?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에게 묻는다면 또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오늘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는 건, 그리고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건, 바로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그걸 잊고 삽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니 가끔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것 같이 반복된 삶 속에서도, "과연 나는 행복한가?", "오늘 아침 나는 왜 출근하는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인은 행복해져야 합니다. 행복한 직장인은 늘 머리 속에 '행복'을 그리며 삽니다. 머리 속에 그런 '그림'이 있는 사람은 사는 목적, 일하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복도 존중할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이 직장을 행복하게 만들고,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생활인의 행복 열쇠 -- 그 첫 번째는 꿈과 비전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놀다가 저녁을 맞았습니다. 메뚜기가 말했습니다. "이젠 내일 놀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이 있는 인생에 행복이 깃듭니다. '내일'이 없는 인생이란 죽음과도 같은 삶입니다.

젊은이에게 '내일'이란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목표가 '내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 신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일'은 오늘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꿈'입니다. '내일'이란 다름 아닌 비전(vision)입니다. 비전이란 공기와 같아서 우리가 잠시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그 무엇입니다. 도무지 기대할 '내일'이 없다는 것, '꿈'이 없다는 것, '비전'이 없다는 것 -- 그것은 인생에 크나큰 슬픔입니다.

*세 사람의 석공에게 "당신 지금 뭘 하고 있소?" 하고 물어봤습니다.  "돌을 깨고 있잖아?",   "보면 몰라? 먹고 살려고 이 짓 하고 있어"  이런 대답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 지금 호텔 짓고 있는 거야."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째 석공은 자신이 하는 일을 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왜 그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석공은 왜 그 일을 하는지는 알지만  그 목적이 꿈도 비전도 아닌 사람입니다. 세 번째 석공은 머리 속에 미래를 향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하는 자세, 일하는 마음가짐, 일의 품질과 성과가 다릅니다.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비전과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일'을 향한 가슴 두근거림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가슴에 비전을 품고 사는 사람 옆에 가보십시오. 뚜렷한 비전을 갖고 사는 가정엘 가보십시오. 가치 있는 비전을 지닌 기업엘 가보십시오. 사람들의 눈빛이 다르고, 나누는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 꿈이 없는 학생, 직장인을 보십시오. 삶에 지친 채 습관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씨앗을 뿌리면 씨앗은 곧 흙에 파묻힌다. 차갑고 어둡고 습한 흙 속에 '생매장'된 채 지내온 씨앗이 어느 날 싹을 내고 세상으로 솟아 나오는 걸 보십시오. 바깥 세상을 그리지 않았다면, 고통의 세월을 참고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 씨앗은 흙 속에서 이미 오래 전에 썩어버렸을 것입니다.

비전을 품은 사람은 쉽게 무너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힌 죄수일지라도, 비전이 없는 이는 날마다 창살을 바라보며 신세타령을 하지만, 비전을 지닌 이는 창살 밖의 하늘과 세상을 바라보며 그 창살 밖에 나가 살 미래의 날들에 희망을 갖습니다.

꿈과 비전을 품은 사람은 판단이 신속하고 행동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오래 고민하지 않습니다. 목표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과 노력과 땀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한 곳에 집중할 줄 압니다.

비전을 품은 사람은 내일을 기대하고 내일을 위해 기도하고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삽니다.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아파치족이 추장을 뽑게 되었습니다. 최종 선발된 세 후보가 높은 산 정상에 갔다 오는 경주를 벌이게 됐습니다. 하루가 지나서야 한 후보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높은 산에서 뽑은 작은 풀을 증거물로 내놨습니다. 다음 후보가 달려왔습니다. 그는 작은 돌을 하나 내보였습니다. 마지막 후보가 달려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가 말했습니다. "추장님, 우리는 내년 봄에 저 산 너머 들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거기엔 좋은 평야와 강이 있습니다." 누가 추장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당장 다람쥐 쳇바퀴같이 돌아가는 삶의 바퀴를 세워놓고, '내일'을 그려보십시오. 사람의 존재가치는 그가 품은 비전에 종속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하여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 앞에 당신의 진정한 소원을 아뢰십시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목표 -- 그것이 나의 비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젼의 사람에게 끝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출처/박순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