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사는사람들   (갈라디아3:1~9)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목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사를 사람이 되게 하셔서 구두장이 세몬이라는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그 집에 살면서 궁금증을 풀어간다는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입니다. 이 천사가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궁금증은 세 가지입니다.
그 첫째는 “사람들 마음 깊은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세째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궁금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천사 미하일의 궁금증을 빌어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들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물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힘겹고 고달프지만 우리를 버티게 해 주고 견디게 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견디고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어리석도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생각하며 탄식하는 말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와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와같은 같은 탄식을 하지 않을까요?
성경을 보면 두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인가 가진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지고 소유한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지탱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거기서 나오고 살아갈 힘도 거기서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돈으로 삽니다. 손에 돈 좀 가지게 되면 세상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돈을 잃어버리면 세상 끝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어떤 분들은 권력으로 삽니다. 그 잘난 권력 잡아보려고 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다 권력을 잡으면 의시대고 권력 휘두르는 재미에 정신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지식으로 삽니다. 남보다 많이 알고 그 아는 지식을 자랑하는 맛으로 삽니다. 눅 12장에보면 소유의 허상을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는 부자가 나옵니다. 많은농사를 지어 풍성하게 거둬들인후“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자위하고 있을 때 주님은 이렇게 사는 자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걸 소유하려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어리석은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지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은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인가를 지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주어진 위치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라도와 같은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자리를 위해서 선도 공의도 이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없으신 예수님을 본인스스로도 알았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기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라고 한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기준으로 정해 놓고 이것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금지옥엽 철저하게 지켜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에 얽매이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의로운 사람이되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는 율법주의자들을 “어리석도다!”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이란 전체 조항을 다 지켜야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100가지 조항 중에 100가지 다 어긴 사람도 범법자요, 100가지 중 1가지만 어겨도 범법자가되는 것입니다. 죄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범법자라는 사실은 같습니다. 법은 얼마나 많은 조항을 지켰느냐로 따지지 않습니다. 전체를 다 지켰느냐 하나라도 어겼느냐 그것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 많은 율법 조항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주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자기가 정해 놓은 인생의 기준을 정해 놓고 지키는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두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들 외에 지혜로운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우선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자기의 무능을 철저하게 통감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만 바라봅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믿으며 인생의 항로를 향해 달려갑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해 갈 때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됐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항복해서 피해를 예방할 것인가 아니면 결사항전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존경받는 교회의 사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고 이 위기를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종을 힘차게 치고 모든 교인들을 모아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 외곽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가 교회의 우렁찬 종소리와 시의 뜻밖의 움직임을 보고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괜한 희생을 더 치르지 말고 다른 공격루트를 찾기로 하고 작전을 변경하고 이 펠드리히 시 공격을 취소했습니다.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그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절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게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 것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받고 성령받은 것이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그 자격 때문에 된 것이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성령받은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요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믿음을 잃게 됩니다.
출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들이 신광야에 도착했을 때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고, 가축에게 먹일 풀이 없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꼼짝 없이 죽게 됐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작은 인생의 시련 앞에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들은 애굽을 나올 때 자기들의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직접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체험했습니다. 거친 사막 가운데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도 인도하셔서 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과거에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더 놀랍게 인도하실 것을 믿지 못해서 원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과거에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작은 시련 때문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받은바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기억해야 오늘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믿음으로 산 사람의 예를 성경을 통해서 들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이방인이었습니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만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말씀하셨고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를 들면서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다시 믿음의 길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지게 됐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만 제대로 기억한다면 결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24장을 보면 여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을 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들이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고 무덤 속에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놀라고 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서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 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니까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서 두려워했고 걱정했는데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니 인간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고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세 가지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입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이 소리는 한편으로는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탄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고 들어갑니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어야만 우리가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 하나님의 소리는 우리 심령에 말씀이 충만할 때 강하게 들려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우리 심령 속에 우렁차게 울려 퍼집니다. 이 하나님의 소리를 강하게 듣게 될 때 우리는 믿음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무엇인가를 지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만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성경을 기억하셔서 믿음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출처/서재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