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소문이 있는 교회  (살전1:2-8)


“말이 말을 만든다.”,“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이란 한입 두입 건너 전해지는 과정에 말하는 사람의 주관이 섞이고 보태여 지면서 과장되기 쉽습니다. 또“나쁜 소문은 날아가고 좋은 소문은 기어간다.”는 명언도 있습니다. 말이란 잠깐사이에 먼데까지 퍼지므로 언제나 말을 하는 것과 듣는 것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계하여 이르는 말들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예민한 감각이 무엇이냐 하면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우]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설탕이 미각에 주는 쾌감은 소리가 건강한 귀에 주는 쾌감보다는 못하다.”우리가 먹는 것에 참 민감한 것 같습니다만 실상은 그 먹는 것보다도 듣는 것에 더 민감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찌개를 먹다가 짜면 물을 좀 더 부으면 됩니다. 그래도 짜면 안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남의 흉보는 이야기는 절대로 물을 안탑니다. 희석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아니면 좀 더 붙여서 듣습니다. 그리고 음식처럼 안 먹을 수도 없는 것이 ‘아, 저 이야기는 들어서 좋지 않은 이야기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안 들으려고 그냥 지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대부분이 그만 듣는 다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기를 쓰고 들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꼭 한 가지 더 붙여서 남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죠.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슨 말을 듣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무슨 말을 하느냐 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하느냐가 소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문에는 좋은 소문도 있고 나쁜 소문도 있습니다. 좋은 소문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나쁜 소문은 사회를 황폐케 합니다. 그래서 소문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소문으로 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좋은 소문 보다는 나쁜 소문이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멀리 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느냐하면 인간들에게 감출 수 없는 죄 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의 죄 성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 어두운 것을 즐기려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신문에도 보면 사건, 사고, 비리 이런 것은 특종이라 하여 일면에 대서특필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밝은 내용은 언제나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인 <알고자 하는 욕망>도 결국은 긍정적이고 선한 것 보다는 부정적이고 악한 것에 훨씬 더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아름다운 소문,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 성도들의 좋은 소문은 하나님나라를 유익하게 하지만 좋지 않은 소문, 아름답지 못한 소문은 하나님 나라를 욕되게 합니다. 자고로 교회는 아름다운 소문이 나야합니다. 믿음의 좋은 소문이 있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원하기는 우리교회가 이런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으로 이 지역에 우뚝 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의 구체적 결과가 나타난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과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예배시간에 그냥 습관적으로 와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무엇인가가 달라지고, 말씀을 듣고 삶이 변화 되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 살아서 움직이는 결과가 있는 믿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명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인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라나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믿음이지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약2:26). 그리고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들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구약의 전도서에 보면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을 허탄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역사가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운전을 하고 가는데 차가 무척이나 막힙니다. 웬일인가 하고 차에서 내려가 봤더니 길 한 복판에서 두 사람이 대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다가 차량접촉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조금만 양보했으면 될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많이 상한 것도 아닌데 서로 잘했다고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조금 있자니까 육두문자의 욕까지 섞어가면서 싸우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길을 지나가던 여자 한 분이 오더니“아니, 김 집사님! 아니세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하는 겁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여 집사님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자기도 창피했던지 얼굴이 뻘개가지고 얼른 차를 빼서 가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 속에는 믿음의 역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도무지 믿음의 결과, 그 열매가 보이지 않더란 말입니다. 교회가 또 한번 욕먹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인지 모르지만 남들이 알면 그 교회의 소문은 또 어떻게 됩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교회 집사님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그런 일이 있어서 정말 싸워야 될 일이라고 생각되거들랑은 얼른 차 빼고 구석에 가서 싸우든지 하십시오. 농담입니다. 싸우지 않고 해결 할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인들 하나하나가 그 믿음의 아름다운 결과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하면 그 소문이 생각나는 교회였으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예중교회의 성도 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결과가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둘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정한 사랑은 말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수고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입으로 보다는 손으로, 그리고 몸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듀발]박사에 의하면 사랑은 다음 여섯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로 사랑은 언제나 밖을 향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주어야 사랑이 사랑 됩니다. 고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둘째로 참된 사랑은 창조적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참 사랑을 하면 부지런해집니다. 헌신적이 됩니다. 그를 위한 땀 흘림이 너무 너무 즐겁습니다. 이게 사랑이고요, 세 째로 사랑은 공유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나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죠.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마음입니다. 그래서 괴롬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네 째로 사랑은 [나]만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기적인 생각에서 이타적인 사고로 바뀌는 것이 사랑입니다. 다섯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좋아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좋은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렇게 좋아하는 감정이 꼭 동반 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사랑에는 시간이 가장 확실한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꼭 <영원히>라는 시간적 개념이 따라옵니다.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합니다. 이 말에는 어떤 어려움에도 꾸준히 끈기 있게 참고 계속하자는 결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참고 가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사실은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요13:1절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우리들에게는 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사랑의 수고”라는 말에서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코포스(κ?πο?)>의 의미는 “엄청난 노력이 기울여진 고생”이라는 의미와 “계속해서 경주하는 노력”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고생을 다하는 계속 적인 노력”이라는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때에는 이런 수고를 전제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스스로의 유익보다 타인과 교회를 위한 희생을 기쁘게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그리고 그 소문이 널리 퍼져서 누구든지 와 보고 싶은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묵묵히 봉사하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의 수고가 마음에 주렁주렁 열리는 교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찾아서 일하면서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교회, 도우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가슴 뜨거운 사랑의 수고가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소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 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으로부터 황제숭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당했고, 유대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했고, 또 직장이나 그 밖에 어떤 단체에서든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잘 견디어 낸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을 때에는 작은 어려움도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소망> 보다는 작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망은 그 어떤 환난보다도 큰 것입니다.
[빅톨 프랭클]박사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이란 책이 있습니다. 나치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대한 관찰기록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주검으로 실려 나오는 수용소에서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견디다 견디다가 생을 포기하고 실려 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다 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 중에서도 오히려 남을 격려하며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통계를 내 놓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으면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사업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의 어려움으로 인해 고생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인간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힘겨워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모든 총체적인 어려움을 안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이 모든 어려움은 소망의 인내만 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마 말도 못할 어떤 곤란 가운데 처해 있을 지라도 소망 가운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환난은 반드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소망의 인내로 담대하면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요16:33을 보십시오.“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신앙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찮은 인간관계로 인하여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우리 교회는 소망의 인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소문거리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소문이 많이 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진정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바로 그 교회를 이루어 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