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통하는 신앙인   (디모데후서 3:12-17)


어떤 청년이 결혼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말이 통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같은 말이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부관계,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관계, 말이 통하지 않는 교우관계 등 여러 경우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큰 전제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니" 천지 만물은 물질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4절에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전제를 합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전제는 말씀의 귀중함, 말씀의 권위, 말씀이 갖고 있는 가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 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고 전제를 합니다. 예배를 함께 드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이 통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떡만 먹지 말고 말씀을 먹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먹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는 개념은 첫째로 말씀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계1:3)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은 한 때 다독을 해야 됩니다. 많이 읽어야 합니다. 평생 다독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때 다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성경을 한번 독파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유익합니다. 십 년, 이십 년을 다녀도 성경을 한번 독파하지 못한 상태라면 아주 불균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재미가 있든 없든, 뜻을 알든 모르든 성경 전부를 한번 독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일 읽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깊이 읽어야 합니다. 한 때는 독파를 하고 한 때는 말씀을 깊이 먹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암송을 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말씀의 깊이를 먹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먹되 깊은 맛을 알고 먹는 그 자리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 말씀과 더불어 성숙해 가기를 바랍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8)고 했습니다. 말씀의 깊이를 알고 확신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설교를 경청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 안에 주일이 있고 주일 가운데 예배가 한 시간 있고 예배의 한 시간 안에 30분 정도가 설교를 듣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 두 번, 수요예배 한 번, 공적으로 설교를 세 번 듣게 됩니다. 설교를 경청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경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위해서는 설교를 경청해야 합니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에는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9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말씀을 내가 바로 듣고 말씀대로 바로 순종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분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설교자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주는 자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와 불편한 관계에 있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말씀을 전하는 자와의 관계를 바로 해야만 설교는 경청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으로 듣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

   "들으라 이스라엘아, 나는 여호와니 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설교를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준비된 자세로 들으셔야 합니다. 설교가 바로 들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준비된 자세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은혜를 받습니다. 설교를 바로 듣기 위해서 기도하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설교를 바로 듣기 위해서 기도하고 설교하는 설교자를 위해서 준비기도를 하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 인도하기 5분 전에 앉아서 언제나 빠뜨리지 않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의 입을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귀와 마음을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그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고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한 것은 준비된 자세로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번째는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면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를 향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들어야만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단어가 강조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받는다는 말과 뒤에 받는다는 말은 시제가 다릅니다. 앞의 받는다는 말은 계속 받는다는 말입니다. 설교는 계속 들어야 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들려드리는 것인데 그 설교 가운데 섞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앞의 '받을 때에' 라는 말은 설교를 계속 듣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라는 말은 결정적으로 받은 완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으로 아멘 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꾸 말씀에 대해서 아멘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만 아멘 해도 유효합니다. 한번 딴 면허증은 그 유효기간까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를 통하여 계속 들으시다가 그 말씀 가운데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자주 하시면 안됩니다. 반복해서 용서를 구하시면 안됩니다. 제일 좋은 용서는 한번만 하여도 문제가 없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결정적으로 한번만 하시기 바랍니다. 흐지부지 용서를 하고 반복해서 용서를 구하면 안됩니다. 내가 용서받을 일도 분명하게 용서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해는 계속해야 됩니다.
   수술은 결정적으로 한번만 하고 안 받아야 잘 된 수술입니다. 수술을 또 받아야 된다면 잘못된 수술입니다. 그러나 한번 수술한 것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계속 치료받고 몸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또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아멘 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번 받아들인 말씀은 그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팔조원의 음식쓰레기가 남아도는 이 풍족한 대한민국에서 결코 말씀에 주리는 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새겨야 될 말씀은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은 교회에 와서 설교로 가장 많이 듣는 표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라

   "무릇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 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이것은 성경을 펼칠 때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잘못 받아들이면 막연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상세히 우리 앞에 제안합니다.
   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전도를 해야 하는 사명이 곧 말씀을 순종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말씀을 순종해야만 전도의 열매가 일어나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발견하기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을 순종하는데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자체가 곧 복음전도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나타나고 그것이 우리의 말씀의 경험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말씀을 순종한 경험의 증거입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두번째로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내 자신이 바로 교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훈을 받아야 할 것, 책망 받아야 할 것, 바르게 해야 할 것, 의로워져야 할 것이 말씀을 순종함으로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 바르지 못한 것이 우리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를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잘못된 자신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자기를 자꾸 따라갑니다. 우리 안에 잘못된 것을 집착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을 자꾸 동의해주고 따라가는 자신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회개는 잘못된 자기로부터 돌이키고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교훈을 알지 못하며 우리 가운데 바르게 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이 말씀에 바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이르는 이 효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친일파 명단이 공개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사회의 비극이고 또 멍에입니다. 아무리 명단을 공개해도 친일파 논쟁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난날 우리 역사에 반민특위가 있었는데 친일파들을 처벌했어야 하는 반민특위의 활동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친일파 청산은 우리에게 큰 올무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리 발표를 해도 친일파 청산은 바로 되지 않는 시점에 와 있고 그것은 우리에게 큰 멍에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반민특위를 통해서 친일파를 분명하게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민족사회에 친일파는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청산할 것을 분명하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의 효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효력이 우리 인생을 교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약속하신 말씀이 효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약속

   그리고 말씀의 순종은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맛보게 합니다. 그 은혜가 두 가지로 강조됩니다. 특히 신명기 8장에서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전후로 두 가지를 계속 강조했습니다.
   "내게 명한 이 말씀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장수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내 계명을 지킴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될 것이라" 말씀을 순종해야만 말씀 안에 있는 두 가지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사랑의 맛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내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 속에서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자원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교훈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원함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그 깊은 사랑의 맛은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맛보아진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습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말씀 순종은 말씀의  오묘한 맛이 되는 아가페 사랑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 사랑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 사랑의 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아리랑'이라는 민요가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이 난다'는 가사의 내용은 생각해 보면 무서운 노래입니다. 날 버리고 가는 님은 가다가 발병이 나라는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뜻하는 것은 가라는 뜻이 아니라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국인의 사랑 표현은 이렇듯 한참을 보아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하듯이 온갖 풍상을 겪어봐야 속에 있는 것이 나옵니다.
   또 유명한 '진달래'시가 있습니다. 제가 극화하여 표현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여자가 역겨워서 가겠다고 합니다. 여자도 오기가 나서 갈 테면 가라, 진달래를 뿌리면서 이것을 밟고 가라고 합니다. 남자는 이까짓 것 못 밟아 하면서 밟았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발걸음마다 뿌리면서 밟고 가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진달래는 님을 보내기 싫어하는 여인 자신을 말합니다. 나를 밟고라도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국마다 뿌려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한번은 밟고 지나가도 계속은 못 밟고 지나갑니다. 진달래는 사랑의 깊이를 말합니다. 그게 우리의 사랑표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더 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의 모든 것도, 내 목숨까지고 기꺼이 드리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그렇게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그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4장 40절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구하라"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1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제가 본 성경 중 이 구절만큼 시적인 표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장되지 않고 달음질하는 말씀으로 살기 바랍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언약을 풍성히 누리는 말씀이 통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을 온전케 한다

   마지막으로 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선한 일에는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힘을 들여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후배가 목회를 하는데 얼마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주차장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차장 때문에 골머기를 앓다가 최근 5분 거리에 공짜 주차장을 교섭했답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 희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당 마당에 주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말을 하도 안 듣기 때문에 시험에 들기 쉽다는 것입니다. 5분 걸어오는 그 수고를 잘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TV의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가 인기가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의 집을 지어주는 프로인데 제가 언젠가 보니 아버지는 죽고 엄마는 아이를 버려서 남겨진 조카 서너 명과 치매와 중풍끼가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한 여인이 소개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느냐? 라고 위로하는 뜻으로 물으니까 이 여자가 하는 그 한마디가 내 귀에 울려왔습니다. "나라도 있으니까 다행이지요." 여러분, 그 집은 그 여자가 없으면 벌써 풍비박산이 된 집입니다. 누가 조카들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명을 거느리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 노모를 모시고 막일을 해가면서 가정을 지탱하고 있는 그 여자의 희생이야 말로 그 여자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안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말씀이 순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맺는 말

   골로새서 3장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 상태에서 가르치고 권면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없는 찬양, 말씀이 없는 기도, 말씀이 없는 교제는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 속에 말씀을 담고 찬양하고 권면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말씀이 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 하나님의 복을 맛보면 기쁨으로 자원하여 그 분 앞에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통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