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의 삶의 기쁨   (요 14:1-3)

몽테뉴라는 분이 결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했습니다. “결혼은 마치 새장과 같다, 새장 밖에 있는 새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고 새장 안에 있는 새는 날고 싶어한다“고 했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이 새장 속에 갇혀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장을 만드느라고 열심입니다. 그런데 이미 결혼해서 새장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날고 싶어 야단입니다. 들어와 보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남자는 새장에 갇혀 살아야 장수하고 여자는 새장을 나와 날아야 장수한다는 조사가 나왔습니다. 일본 대학 연구소에서 3천명을 대상으로 40년 동안 연구한 결과 남자는 아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보다 사망률이 80% 높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편 없이 살면 55%가 더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쌓인 여자만 골라서 조사했는지는 몰라도 그 통계가 사실이라면 묶이고 짝짓고 갇힘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예수밖에 있는 사람들이 참 자유하겠다고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놀고 마시고 살아가니 얼마나 자유할까 하고 부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편 자유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책감도 없이 방종하며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 밖에서 사는 것도 어느 정도 자유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날아가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살펴보면 그것은 불행한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지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사형수는 옥중생활이 훨씬 편하고 쉽습니다. 사형수는 어지간하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형수기 때문입니다. 얼마 있으면 한꺼번에 책임을 묻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결수는 참 고되게 수형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하고 질서를 지켜야 하고 절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형수가 부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구속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정말 구속입니까. 미래를 위해서 저축하려면 오늘 인내해야 합니다.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절제도 해야 하고 아끼는 삶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그 삶이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 심고 가꾸고 뿌리는 수고하는 삶입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그 수고조차도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몇 가지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알고 살아간다”는데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벤자민 블름 (Benjamin Bloom)이라는 분은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교만하기도 하고 자만하기도 하고 과신하기도 하고 다된 것 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언제 조금 눈이 뜨이는가 하면 병원에 내던져졌을 때 조금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뜨이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교만할 일이 전혀 없는 자기 자신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과신하기에는 그 능력이 모자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꾸만 실패하는 것입니다.  

빅톨 위고라는 사람은 “사람이 세상에서 살 때 가장 힘든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실패하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불을 보면 장발장이 19년 동안 옥살이를 합니다. 그동안 그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제 나가면 선하게 살아야지”. 단단히 결심하고 19년 만에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장발장은 그 밤에 예배당에 들어가 은촛대를 훔칩니다. 19년 동안 다짐하고 다짐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람은 나를 알고 살아간다는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무능을 알고 주의 힘을 입어 나를 세우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의 기도를 보십시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나를 사로잡는도다“(롬7:22-24). 여러분, 이런 기도 해 보았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하는 기도는 참 지극히 형식적일 따가 있습니다. 이 형식적인 기도가 우리의 신앙을 자꾸만 좀먹고 생명력을 갉아먹습니다. H. G. 웰르라는 분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대주교가 성전에 들어가서 늘 하던 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시여“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가 참 싫습니다. 형식과 격식이 너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까.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용돈 타러가서 말하기를 “오 자비로우시고 권능이 한이 없으시며 지금까지 우리를 먹이시고 앞으로도 먹여주실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시여 용돈 좀 주세요”하며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기도를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주교가 그렇게 기도하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무엇을 말하려고 그렇게 장황하게 기도하느냐”. 그때 이 주교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전 처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주교가 너무 놀라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하고 한마디하고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나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섭리 중에 보내신 나입니다. 나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노래도 있습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은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 나를 모르면 불행합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인간은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민이 많고 불안을 느끼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언제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습니까.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아주 엄숙한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적어도 인간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중에 세상에 보내어진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존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자신을 함부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값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방황되게 됩니다.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허비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면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바쁩니다, 방황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히딩크감독이 “마이웨이”라는 자서전을 섰습니다. 내용을 보면 한때 히딩크 감독이 장이 꼬여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개복해 보니까 장이 꼬인 것을 오래 놔두어서 이미 상해있었습니다. 그래서 피가 통하지 않아 장이 퍼렇게 변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장을 거의 다 잘라내고 이어야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술하다 말고 의료진들이 다 잘라내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수간호사가 좀 기다려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10분만 기다려보자 피가 통해서 회복될지 아느냐”. 그래서 10분을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간호사는 10분 동안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처럼 상했던 장에 피가 돌아서 회복되어 갔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장을 자르지 않고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고유한 할 일을 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할 일을 발견하고는 일생동안 그렇게 바쁘게 살았습니다. 바울이 살아간 모습을 보십시요. 얼마나 진지하고 분주하게 살았습니까. 어느 선교사는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선교지로 갔습니다. 그 나라는 물이 석회석이 많아 오래 마시면 치아가 모두 삭아버립니다. 몇 년 있는 동안 아이들의 치아가 모두 상해서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안식년 차 돌아와 아이들 치아교정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안식년을 마치자마자 또 선교지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또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에 가서 산중부족에게 선교를 했습니다. 부부가 전도 나간 사이에 아이들만 집에 있다가 날씨가 추워 불을 피워놓고 나갔는데 그만 질식해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를 그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일년 안식년을 마치고 마음을 추스른 후에 다시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참 무모한 짓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할 일임을 알기 때문에 또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렇게 신비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안정을 추구하고 평안을 원하고 장래 보장을 우선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 포기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기원전 170년경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 학살정책을 세웠습니다. 유대인을 헬라화 시키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침략해서 8만 명을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헬라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신앙부터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신앙지조를 지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신상을 세워놓고 그 우상에게 강제로 절하게 했습니다. 또 성전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갖다놓고 이방신전처럼 창녀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신앙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때 7형제 처형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7형제가 끝까지 신앙지조를 지켜 결국에는 모두 무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큰아들은 병거 바퀴에 매달아 바퀴를 둘려서 죽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죽을 벗겨서 죽였습니다. 셋째아들은 토막내서 죽였습니다. 넷째 아들은 혀를 잘라 피를 흘리게 해서 죽였습니다. 다섯째 아들은 방아에 찧어 가루내서 죽였습니다.  여섯째아들은 불단 쇠꼬챙이로 몸을 지져서 죽였습니다. 일곱째 아들은 불가마에 넣어 콩볶듯해서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일곱 형제 누구하나 흔들리지 않고 초연하게 죽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값이 있는 것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인은 값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발견해서 그 일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방종하고 방황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값입니다.


세 번째는 “갈 길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다는 것은 힘이고 용기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외쳤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할 때는 마음이 참 불안하고 두려움이 앞섭니다. 왜냐하면 아직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가 본 곳을 다시 갈 때는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라도 길을 잘 아는 안내원이 따라가면 불안한 마음이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가려면 이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씩 마지막으로 이 긴 미지의 세계를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둘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고 모두 혼자씩 가야하는 여행입니다. 그 여행은 우리들이 세상을 다 살고 죽어서 가는 천국행 여행입니다. 그 여행이 즐겁겠습니까 불안하겠습니까. 그 여행이 천국행 여행이라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얼마나 자세하게 우리의 영혼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임종모습을 보면 편안하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 모습이 아주 조용합니다. 마치 잠자는 것 같이 조용하게 숨을 거둡니다. 그 여행이 즐거운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행이 천국에 가는 여행이 아니고 아주 어두운 세계로 여행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행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여행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 때문에 앞으로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감사한 일입니까. 사람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일찍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길을 우리는 자세하게 알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은혜이고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과거 나의 뿌리도 분명하고 현재 나의 삶도 분명하고 미래 나의 갈 길도 분명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은혜이고 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 삶이 이 땅에서 주어질 수 있는 최상의 복된 삶인 걸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