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감사기도   (막 14:22-26)

신앙생활 중 대부분은 기도생활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기도하는 법입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 그렇게 서툴게 기도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내용도 다르고 형식도 다르고 법도 다 다릅니다. 기도하는 것도 들어보면 거기에 버릇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서 가장 성숙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감사는 가장 성숙된 정신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말에도, 마음에도, 생각에도, 도무지 감사의 정신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기도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전체에 응답해 달라는 애원만 있습니다. 미성숙한 기도라서 그렇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몇 번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몇 번 아주 특별한 경우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모두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후에는 반드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상가에서의 감사기도

요한복음 11장 38절을 보면 예수님이 초상집에 가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초상집은 나사로의 집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3남매가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다복하게 생활하는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가며 자주 그 집에 들러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3남매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비통해 했습니다. 이미 무덤에 뭍인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뒤늦게 소식들 듣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십니다. 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기도입니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돌을 옮겨놓으면서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고 말합니다. 그 말은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돌을 굴려 보았자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감사의 기도부터 하십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 죽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죽음의 현장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초상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과 침침함입니다. 모두 침울하고 말이 없고 침묵합니다. 웃음이 없고 어두움이 짙게 갈려 있습니다. 그래서 초상집에는 모두 한결같이 꽃을 꽂아놓습니다. 꽃을 꽂아 놓는 것은 그 분위기가 음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를 중화시켜 보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꽃도 밝고 화려한 장미꽃이 아니고 한결같이 흰 국화꽃입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촛불을 켜 놓습니다. 옛날 전기가 없던 시절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겨우 호롱불을 켜 놓은 침침한 분위기의 초상집, 그 분위기가 얼마나 으스스합니까. 그래서 옛날 동네에 초상이라도 발생하게 되면 문밖출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 동네가 어둡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상집에는 집안이나 집밖을 모두 더 밝게 하려고 촛불을 켜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촛불이 상관없는데도 초상집에 가 보면 으레 그렇게 하는 줄 알고 누구나 촛불을 켜 놓습니다. 옛날 결혼식을 밤에 했습니다. 그래서 한자로 결혼의 혼(婚)자가 어두울 혼자입니다. 옛날에는 결혼식을 밤에 했기 때문에 촛불을 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대낮에 결혼식을 하면서도 촛불을 켜 놓습니다. 그 모습이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웃지를 않습니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로 무지할 때 용기가 있고 형식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상당한 의식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뒤로 침묵과 음침함만 있어야 할 초상집에서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옛날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리고 “이 영혼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부모가 죽은 자리에서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며 감사의 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이 터부시되던 의식이 엄청나게 뒤바뀌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요 6:을 보면 아주 보잘 것 없는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광야에 5천명이 모였습니다. 모두 굶주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이 5병 2어입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그곳에 모인 5천명이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음식을 놓고 감사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조그만 음식을 앞에 놓고 자연스럽게 감사의 기도를 하십니까. 차 한 잔을 놓고도 감사할 수 있음이 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기초적인 모습인데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음식이 나왔을 때 진지하게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감사의 기도를 하지만 음식점에서 집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할일 전폐하고 나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전파하고 증거하는 삶이 일상화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거하는 삶은 반드시 나가서 전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음식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식사할 때 식사가 나오면 모두 숟가락 들기 바쁜데 조용히 머리 숙여 잠시라도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자세라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기도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증거되고 간증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간증의 삶이고 증거의 삶이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는 삶입니다.

만일 그곳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음식이 나왔을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떠먹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 마음속에 상당히 자책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 그곳에 전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금 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그곳에 “저 사람은 뭔지 삶의 태도가 달라, 그리고 뭔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같아” 하고 남다른 느낌을 가지고 보아오던 사람이 있다면 그때 진지하게 감사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의문을 거기서 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조그만 일입니까. 그것이 증거의 삶이고 간증의 삶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진지한 신앙인의 태도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평소의 태도, 정신, 생각, 삶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3초도 안되는 시간에 누가 볼까봐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그런 기도하는 태도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겠습니까. 그런 소신 없는 태도에서는 사람들이 아마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순수하고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빨리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급했던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만족하고 흡족하게 먹고도 남게 되는 기적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의 감사기도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모습입니다. 그 만찬에서 예수님은 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 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 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하고 나누어 주십니다. 이 감사의 기도는 죽음 직전 전날 밤에 하신 감사의 기도입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시던 중 “이 떡을 받아먹으라, 이 떡은 나의 살이니라, 또 이 포도주를 마시라,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니라”하고 나누어 주십니다. 얼마나 비장한 모습입니까.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신앙생활의 깊음은 감사의 삶에 있습니다. 감사도 그냥 일상적인 감사가 아니고 정말 극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감사의 기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놓고 감사하는 기도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다가 며칠 만에 음식을 먹을 때의 감사의 차원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극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것입니다.

어느 불구자가 팔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몸통만 남았습니다. 이 불구자가 붓글씨를 쓰는데 입으로 붓을 물고 글씨를 썼습니다. 한참 글씨를 쓰다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입을 남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묘미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깊이가 있습니까. 얼마나 뜻이 큽니까. 사람들은 생이 어쩌고 하면서 못살겠다고 자살하고 그러지만 그런 불구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도 누구도 할 수 없는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삶이고 믿음이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상황이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은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입니다. 이 만찬을 마치고 곧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가서 밤새워 철야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새벽이면 체포됩니다. 그리고 아침 9시면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순서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룟 유다가 와 있습니다. 천연스럽게 와서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발을 씻겨주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내 발도 씻겨 달라고 발을 내 맡깁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떡을 들고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먹고 마시라 이것은 나의 살이고 피라 하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이 어려움 중에서 드릴 수 있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운명하시며 감사하심

또 요 19: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다 가고 십자가에서 6시간동안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죽을 때 모습이 가지각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기는 말 한마디도 가지각색입니다. 호스피스에 종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지막 죽어갈 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돼, 죽으면 안돼” 그러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보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것도 축복입니다. 얼마나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안돼, 이대로 죽으면 안돼”하고 중얼거리다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죽을 준비가 안돼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심판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없이 살다 갑자기 죽게 되니까 그렇게 부르짖다가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임종 때 무슨 말로 인생을 마치려 합니까.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 받으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서 마다 예수께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모습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마지막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더라(마27:50, 마가 16:37)고 표현했습니다. 그 크게 소리 지르던 소리는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하고 운명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19장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말을 무슨 말로 남기려고 하십니까. 이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평소 유서를 써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길 유언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엄숙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다 이루었다”하는 말은 아주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또 이 말은 “아버지께서 잘 감당하고 마치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입니다.  모두 극한 한계상황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교 훈

여기서 우리들의 기도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의 기도내용과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 내내 나를 강조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알아주시고, 나를 평안하게 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때로 원망의 기도도 합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시험은 자기가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힘이 없고 응답이 없고 기도하면서도 내 자신이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를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서에 몇 번 안 되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기도는 모두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모두 극한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가 있은 후에는 반드시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