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름  (렘1:4~7)


초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자석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나옵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못 같은 철이나,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석에 못을 하나 붙이면 그것이 또 자석이 되어 다른 못을 붙일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모래가 가득 있는 곳에 자석을 갖다 대면 그 안에 섞여있던 쇳가루만 붙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탄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흙이나 모래 속에도 쇳가루만 분리해서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예수께서는 부정한 세상 속에 섞여 살고 있는 우리들을 끌어내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섞여 있을 때는 모래와 쇳가루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석을 가져다 대면 특별히 쇳가루만 자석에 붙어 나오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주님께 속하게 된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하면서 자신을 특별히 불러주시고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이 불러주신 특별한 존재들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 그 소명을 다시 한 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미리 선택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 왕 때 활동한 대예언자입니다. 젊어서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율법을 무시해 온 이스라엘인들을 향하여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자로 선택받은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구별하였다”는 말은 “거룩하게 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따로 떼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예레미야를 특별한 존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출생에서부터 세상과의 관계에만 얽혀있는 자연인이 아니라, 일평생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삶의 의미를 갖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붙잡혀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인간, 장소, 시간 등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되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일 구별된 사람, 구별된 시간, 구별된 장소, 구별된 물질 등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농사꾼 기스의 아들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임금으로 선택받았습니다. 지파 동맹 시대를 마감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왕정시대로 접어들게 된 중요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받게 되었으니, 사울에게는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자신을 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날마다 백성들을 다스릴 지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고, 자기의 권력과 명성과 인기에만 영합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그런 그가 하나님께 실망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혹시 나의 신앙이 사울과 같은 신앙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춘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신앙의 힘을 빌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데 급급하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교회 안에서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로 부르셨습니다. 또 구역장, 양육위원, 교사, 찬양대원 등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우연히, 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뱃속에 있기도 전에 그를 아시고,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셔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이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사울의 마음’이 틈타지 않도록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부르심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그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뜻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주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예레미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 즉 “열방의 선지자”로 나서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나친 겸손도, 책임 회피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못합니다.”라는 교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자기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은 전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인데, 예레미야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언변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저히 자신은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로나, 집사로 부르실 때도, 또 구역장이나, 양육위원이나, 교사나, 찬양대원 등으로 부르실 때도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손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무슨 돈 버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희생과 고난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꺼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절과 사양이 하나님에 부르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과 맞지 않고, 귀찮다는 이유 때문이라면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의 부름에 거절이나 사양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는 못한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완강하게 버티는 것은 더 이상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그는 아직 감당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강권적으로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의 무능과 무적격성은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할 때, “부름 받은 자의 능력”이 아니라, “부르신 자의 능력”으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부름 받은 자에게 능력을 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도, 능력이 없는 사람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 스스로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쓰기에 적합한 시기입니다. 사사시대의 기드온도 미디안과의 전쟁 때, 타작마당에 숨어서 타작을 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불러 위대한 사사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시고 크게 쓰십니다.

오히려 스스로 지혜와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보시고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에서 한 사람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예”하고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무장시켜 줍니다. 인간적인 능력과 환경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렘 1:8) 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들”(렘 1:18)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라고 해서 이 땅에서 고난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은 건설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을 위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10절) 여기서 “세우다”는 말은 “대리인으로 감독자로써 일을 맡기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는 국가 원수의 대리인으로 외교업무를 수행하는 대사와 같습니다. 비록 그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이제 그의 말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한 바위라도 “쳐서 부숴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다 해결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사람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나라가 변화됩니다. 그 어떤 것도 다 변화됩니다. 이것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말씀을 받은 자의 능력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사역은 ‘파멸’과 ‘회복’입니다. 여기에서 모두 여섯 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중에 네 개는 파괴적인 의미이며, 두 개는 건설적인 의미입니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과 불의와 거짓과 우상숭배를 타파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종차별, 남녀차별, 빈부차별 등 세상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교회 내에 타락하고 비뚤어진 관습과 전통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생명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잘못된 것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타파해야 하는 구습이 많습니다.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예속, 가진 자들의 횡포, 타락해가는 세속 문화, 권위주의, 남녀차별, 빈부차별,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지도층의 횡포 등 사회 곳곳에 잔재하고 있는 잘못된 행태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언제나 건설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부정과 부패와 불의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위에 구현하는 일, 즉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눅 4:18-19).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억눌리지 않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새로운 삶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불신앙과 게으름, 탐욕, 이기심, 퇴폐 등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한 것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위에 신실하고 경건한 생활 습관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남아있는 죄악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심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출처/개혁교단 설교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