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앞에서 울고, 사람옆에서 웃으라  (사 38;1-8)

큰 교회 건축을 끝내고 나서 목사님이 내게 말했습니다.
<강 목사! 나는 밤이면 울었고, 낮이면 웃으며 교회를 지었다.>

큰 시련을 이기고난 장로님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강 목사님! 나는 하나님앞에서는 울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웃으며 살았지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앞에서도 웃고 사람들앞에서도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신병자들이 아니면 정말로 근심 걱정이 없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자들에게는 암병이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스테레스가 주는 병은 없습니다.
(2) 하나님앞에서도 울고 사람들앞에서도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관주의자들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입니다. 항상 비극적이고 비관적인 사람들입니다.
(3) 하나님앞에서는 웃고 사람들앞에서는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우는 소리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앞에서도 울고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가요?
하나님 앞에서는 울고 사람앞에서는 웃는 것이 이중적인 지 모르지만 가장 바람직한 삶입니다.

이런 유모어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울다가 웃다가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울다가 웃다가 계속 반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제 2억짜리 벤츠 자동차를 샀습니다. 보험도 아직 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사이가 안 좋아서 이혼하려는 아내가 타고 나갔다가 고속도로에서 굴러서 아내는 죽고 자동차는 못 쓰게 되었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좋아서 웃다가 보니 자동차가 아까워서 울기도 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유모어입니다. 실제로 있은 일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히스기야 왕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25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53세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나라를 통치한 왕입니다. 아버지 아하스 왕은 성전에서 거룩한 기구들을 취하여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드렸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비야는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 받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아주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 이후에 최고로 성군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쪽에 강대국 앗수르가 자주 이스라엘을 쳐내려 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사람의 힘이나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18만 5천명을 다 전멸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성경은 무슨 병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죽게 된 병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분명하였습니다.
첫째 목표는 병고침이었습니다.
둘재 목표는 앗수르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기도응답이 되지 않아도 히스기야 왕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생명과 연결된 기도제목이라 히스기야 왕은 결사적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당시 최고의 예언자 이사야가 와서 말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1)

보통 사람같으면 죽음을 받아 드릴 것입니다. 의사가 사형선고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형선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절대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통곡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스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드디어 두 가지 기도제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생명은 15년 연장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앗수르 손에서 견저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받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앞에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셨습니다. 두 가지 다 응답을 받고 히스기야는 사람들앞에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에서 웃을 수 있을 가요?

1. 기도하는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울고 사람앞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하나님도 눈물앞에는 약한 분이십니다.
<눈물앞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 누군가가 외쳤습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눈물 앞에 약한 자여!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이십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제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여도 감동입니다. 서울에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뽑아도 감동스러운 간증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믿음의 챔피언을 선택하면 굉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한 나라가 아니라 동방에서 제일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욥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재산을 몽땅 빼앗아 갔습니다.
10남매가 생일 파티하려고 모였는 데 강풍이 불어 와서 집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에게 악창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고름이 많이 흐르는 지 잿더미에 앉아서 고름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흡수하게 하였습니다. 너무나 가려워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욥을 이해하고 위로하여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와서 7일 동안 너무나 기가 막히니까 할 말을 잊어 버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욥은 오직 한 곳 하나님앞에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오직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람들은 한 명도 자기를 인정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여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부자일 때 그렇게 동네 사람들을 사랑하였지만 단 한 명도 죽을 쑤어다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같이 울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욥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울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그 후 욥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욥은 42장입니다. 맨 마지막 절이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6-17)

하나님 앞에서 울면 사람들앞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셔 울며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앞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대전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전도사님의 간증입니다.
교인들이 없어서 월세를 몇 달치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직 하나님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집 주인이 오더니 집세를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을 올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이 사정하였습니다.
<지금 월세도 제대로 내지 못 하는 데 어떻게 보증금을 더 내고 월세를 더 올리나요? 웬만하면 참아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매몰차게 말했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나가요.>
주인은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계단을 밟다가 삐끗하더니 딩굴었습니다. 주인은 일어나 먼지를 털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죽을 뻔 하였네.>
그리고 지금까지 8년 동안 집세 올려 달라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우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큰 일을 한 사람은 그랬습니다.

큰 일을 해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앞에서 울었고 사람들 앞에서 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너무나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타락한 시대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에는 의인 10명을 구하다가 없어서 불에 탔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는 의인 한 명만 찾아도 없었습니다. 의인 한 명만 있었어도 예루살렘은 멸망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전체가 부패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가 어느 정도 울었는 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 2;11)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는 눈이 상할 정도로 울고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전하는 이가 큰 선지가 예레미야였습니다.

아프리카 근대사에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27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어 대통령이 된 후 혁혁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큰 일을 하게 된 동기를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27년 동안 침묵으로 울었던 한을 폭팔이시켜 마음 껏 일한 것이 성공의 동기였다고 말했습니다. 큰 일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앞에서 울었고 사람들 앞에서 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포레옹이 전쟁을 하러 나갈 때 부하가 달려와서 말했습니다.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하고 전쟁터로 나가시지요.>
나포레옹이 말했습니다.
<필요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상관없어.>
나포레옹이 졌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습니다. 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자기는 센트 헤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넬슨 제독은 전쟁하러 나갈 때 성경을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넬슨 장군은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이 성경을 읽고 갑판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군목과 함께 기도드렸습니다. 부하도 살리고 나라도 살리고 자기도 살렸습니다.
모두가 웃을 수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원하실 가요?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들 앞에서 웃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는 눈물로 기도하고 사람들앞에서는 웃었던 사람입니다. 바울도 동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늘 울었고 나가서 전도하면서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였던 믿음의 거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중세기 온 세계를 변화시킨 경건운동은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수도원 운동의 행동 방침을 <베네딕트 규칙>이라고 말합니다.
<베네딕트 규칙>은 세 가지입니다.
1. 순·종(順從-obedientia)
2. 정주(定住-stabilitas)
3. 정진(精進-conversatio)

순종은 하나님 말씀과 윗 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라고 하면 모든 것을 주고 거지적인 삶을 사는 것이 수도사들입니다.
인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는 쌀이 많아야 가는 금이 많다.>

이 속담이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거지가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평민복을 입고 민정시찰을 하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왕이 거지를 보니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넘쳐 흘렀습니다. 거지는 왕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내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좀 주시오.>
거지는 옆에 차고 있는 자루에서 살 한 톨을 꺼내어 왕에게 내밀었습니다. 왕은 쌀 한 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어 거지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에게 준 것만큼 나도 자네에게 주겠네.>
거지는 받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가 왕에게 준 쌀 한 톨만한 금덩어리였습니다. 거지가 말했습니다.
<내 쌀을 다 줄 걸....>
수도사들은 이 이야기를 귀감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사람들에게 헌신하면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신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입니다.

정주(定住-stabilitas)는 한번 수도원에 들어가면 죽기까지 나오지 않고 생을 마치는 초지일관입니다. 나무 씨앗이 산에 떨어지면 늙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움직이는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 떨어진 자리에서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살다가 죽는 것이 나무입니다. 이것이 정주입니다.

그리고 정진(精進-conversatio)은 오직 주만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들 앞에서 웃는 깊은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1.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울고 사람앞에셔 웃을 수 있습니다.
2. 큰 일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앞에서 울고 사람앞에셔 웃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울고 사람앞에셔 웃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고 싶습니다.
깊은 감동을 주는 장원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장원 선생님은 기독교 가정, 부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교수로서 일생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바쳤습니다.
특별히 그늘진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가르치기 위하여 교수가 되었는 지 어려운 아이들을 위하여 교수가 되었는 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이 생기면 찾아가서 등록금을 내어 주고 끝까지 졸업을 시켰습니다.
결핵병으로 고생하는 학생이 있으면 자기 집 문지방에 방을 만들어 놓고 그 곳에서 살게 하면서 고쳐주었습니다.
가난한 할머니를 보자 자기가 쓰는 것 중에 제일 귀한 물건을 주어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좋은 물건을 다시 쓸 수 있지만 할머니는 언제 이런 물건을 써보겠어?>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학생들은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회초리로 치면서 엄격한 교육을 시키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알려졌습니다.
좋은 대학에는 나무가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여자 선생님인 데 송충이를 잡아 땅에 묻었습니다.
학교를 떠난 목수가 일감이 없어서 굶을 때에는 찾아가서 일부러 책장을 짜게 일감을 주고 돈을 주곤 하였습니다.
땔감이 없어서 차게 겨울을 지내는 학생들에게는 학교 공사장에서 굴러 다니는 나무 토막을 주워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자기가 리어커에 나무를 직접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성경을 들고 같이 성경을 읽어주기도 하고 읽기도 하면서 종교 교육을 시켰습니다.
은퇴후 TV를 보다가 누구를 도울 일이 생기면 일어나 나가 돕기도 하였습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좀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좀 더 나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일본 유학을 하고나서도 일본말은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열심히 배우라고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문상오는 이들이 춥지 않게 따뜻한 날 죽게 하시고 목요일에 죽어 토요일에 장례치루게 하옵소서!>
그는 2001년 2월 10일 따뜻한 목요일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습니다. 그는 전 재산 350만원만 남기고 다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기 장례비용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가 바로 장원 선생님이십니다. 지난 주간 추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늘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두 가지만 하였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늘 사람들 앞에서 웃었습니다.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