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하나님을  (사도행전 5장 12-42절)


'12.12 사태'를 가리켜 훗날 어느 미군 장교는 "대령들의 날"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영관급 장교들이 군 지휘계통을 완전 장악함으로써 장관급 장교들의 명령이 전혀 먹혀들지 않게 되었으며, 극단적으로는 일개 하사관이 자기의 최고 사령관인 참모총장을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체포하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까지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상관에 대한 절대복종을 군기의 생명으로 삼는 군대에서 이런 하극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판단할 때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사유만 있다면 자기 상관이라 해도 제멋대로 거역하고 체포까지 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긴 셈이니, 도대체 사관학교 생도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군인이 되라는 말이겠습니까?
  상관과 사령관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과 무조건 복종의 자세가 결여된 군대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바로 그와 같이 지휘계통을 흔들고자 하는 시험이 닥쳐왔었습니다.
  엄연히 하나님을 최고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혀 엉뚱한 명령이 엉뚱한 사령부에서 내려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과 사도들은 조금도 착각하거나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누구의 명령만을 들어야 하는지를 한시라도 잊지 않았던 제대로 된 군인들이었으며, 그들 자신과 같은 사람의 말보다 그들의 최고 통수권자 되신 하나님의 명령만을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줄을 알았던 충성된 장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아는 성도는 과연 그 최고 상관을 어떻게 따르는 자들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성도는 끝까지 복음증거의 사명에 충성합니다.

  17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에 "17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 오라 하니 22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의하여 1차로 체포되어 경고를 받고 풀려 난 이후에도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로 인한 "표적과 기사"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그 명성은 이미 예루살렘뿐 아니라 "근읍"에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을 보게 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재차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장 천사를 원군으로 보내어 밤에 옥문을 열어서 사도들로 하여금 제 발로 가볍게 걸어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서 탈출을 시켰으니 당연히 그 사도들로 하여금 어디 가서 숨어 있게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고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의외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옥에서 탈출시켜 준 궁극적인 이유는 곧 복음전파 사명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없게 하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는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어제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어두었던 사도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보고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없어졌던 사도들이 지금 막 도망친 사람답지 않게 천연덕스럽게 성전에서 대중 앞에 서서 전도하고 있다는 보고를 연이어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또 한번 관리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지지하는 군중들이 보고 있는 앞이라 "강제로 못하고" 즉 거칠게 다루지는 못하고 사뭇 정중하게 무슨 '임의 동행'과 같은 형식으로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끌어옴으로써, 이제 사도들과 공회 사이에 제2라운드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27절로부터 32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27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던 자기네의 일차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고 있다고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협을 받고도 베드로와 사도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당당히 일축해버렸던 것입니다.
  아니 한술 더 떠서 바로 그 산헤드린 공회 석상까지도 바로 지금 금지명령을 받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강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고 그들의 죄를 정확하게 꼬집었습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임금이요 구주"시라고, 그 예수님을 정죄했던 공회원들까지도 역시 회개만하면 죄사함 얻을 수 있다는 이 복된 소식까지 선포해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처럼 무조건 복음 증거하는 것만이 자기네들을 "이 일에 증인으로 삼으신" 저 높으신 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만 하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성령"께서 든든히 지원해주실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관을 잘 모시는 병사는 일단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 그리고 무조건 순종할 뿐입니다.
  기독신자가 받은 최고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 16:15) -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는 이것만이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지령 제1호입니다.
  바로 이 명령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오늘도 살려주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혼자 방안에서 조용하게, 귀찮은 일 피하고 제 몸만 평안하게 지키고 살라고 예수 십자가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제일 급선무의 명령이며, 이것을 취소시키거나 변경시킬만한 다른 추가명령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절대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에게서든지, 그 어떤 조직에서든지 이 제1명령에 모순되는 다른 명령이 내려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단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하며 만들어낸 거짓 명령인 줄로 당장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라든지 '다른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결국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따위의 말들을 복음이라고 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최고 사령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하극상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답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복음만을 어디에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담대하게 전파하는, 이 제1의 사명에 끝까지 충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할 줄 아는 성도는 항상 교회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33절 이하 39절에 "33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35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자기네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바로 그 자리에서조차 당당하게 예수를 증거하는 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당장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했습니다.
  그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당시 바리새인 중에서도 온건파로 알려진 힐렐 학파에 속한 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 교법사 가말리엘이 여기서 기독교인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의 요지는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말리엘은 두 가지 사실을 예증으로 들었습니다.
  "드다"라는 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한 종파를 먼저 예로 들었는데, 이 사람은 스스로 선지자라 자처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재산을 팔아 정돈하여 자기를 따라 요단강가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명령 한 마디로 강물을 갈라서 길을 내어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게 하겠다고 선동했지만 그런 기적을 보여 주기 전에 로마 기병에 의하여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가말리엘이 이어서 예로 든 "갈릴리 유다"라는 자도 비슷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이 유대에 부과한 새로운 세금징수 제도에 반발하여 반역을 일으켰다가 역시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무리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양자가 모두 그 우두머리가 죽임을 당할 때 그 "좇던 사람들"이 금세 다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로 말하자면 그 우두머리격인 예수라는 사람은 이미 죽임을 당했으니, 만일 이 새 종교가 별 것 아니라면 이것 역시 곧 절로 와해될 것이므로 지금 골치 아프게 손댈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가말리엘 자신은 아직까지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내용 자체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참된 종교라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감히 도전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든 가짜 종교라면 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한갓 인간에 불과했다면, 생전에 그를 따랐던 무리들이라 해도 그 사후에는 곧 흩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슨 망상가나 사기꾼 교주를 좇는 자들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즉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똘똘 뭉쳐져서 예루살렘교회를 더욱 확장시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사는 자기 부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집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시에 혼자 돌아다니는 군인은 탈영병일 뿐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의 대장 예수님 역시, 베드로가 당신을 '그리스도와 성자'로 고백하자말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확실한 개인신앙을 고백한 성도는 반드시 교회라는 이 영적 전투부대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뭐 덕망 있다는 사람이나 무슨 깊은 도를 통했다는 교주 하나를 중심으로 세워진 종교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기독교라는 간판을 붙였다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교인을 더 떠받들거나 목사 자신을 더 높이는 교회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높이는 교회'와 '하나님을 높이는 교회'의 차이는 그저 수준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전자는 가짜이고 후자만 진짜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의 사교장, 친목회, 봉사단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순종하는 성도, 하나님만을 절대 주권자로 모실 줄 아는 성도들이 세운 교회만이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원리입니다.
  사령관이 다르면 같은 편의 군대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받들고 순종할 줄 모르는 교회는, 같은 군대 내의 다른 대대나 사단이 아니라,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적군, 그것도 우리 편의 군복을 입혀서 밀파한 스파이 군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유일신 하나님만을 최고 통수권자로 모시고 그 절대자의 주권을 최고로 높일 줄 아는 참된 교회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거기에 모이기를 힘씀으로써, 진정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성도'다운 교회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성도는 핍박 중에도 끝내 승리하게 됩니다.

  40절부터 42절에 기록하기를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의 교권주의자들과 벌인 제2 라운드에서도 역시 교회와 성도는 통쾌한 승리의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또 한 번 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이제는 "채찍질"까지 덤으로 받고 나왔지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습니다.
  매 맞고 나오면서도 오히려 희희낙락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 즉 '예수님 이름 위하여 핍박당할만한 자격 있는 자'로 인정해주신 것이 오히려 너무 기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말씀해주셨던 사실이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는 바로 그 말씀이 이제 사도들에게 실제상황으로 체험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식이 아니라, 아예 매 맞고 박해당하는 것까지도 기뻐하면서 "전도를 쉬지 아니하는," 그야말로 신명이 나서 승승장구하는 영적전투를 더욱 힘써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기쁨은 아닙니다.
  이것은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는 대장을 모신 부하들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요 재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봉고파직을 당하고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아서 부임하게 될 때에도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피난길에 있던 장정들은 "나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싸우다가 죽겠다."라고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면서 자진 종군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수병들과 장수들도 "이제 이 장군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싸우다 죽어도 원이 없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다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원균 같은 사람을 장군이라고 받들고서는 싸울 마음조차 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함께 전투에 나갔다가 죽게 되면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같은 분을 자기 대장으로 모시게 되면, '17전 17승'에 빛나는 그 연전연승을 함께 나누는 기분도 신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혹시 전장에서 죽게 된다 해도 그것까지도 기쁘고도 영광스러울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훌륭한 장군을 받들고 모시는 것도 그처럼 죽음까지 기꺼이 감수할 정로로 기쁜 일이라면, 하물며 우리 예수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령관께서 내리시는 너무나도 믿음직하고 든든한 독려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모시게 된 성도는 자신이 이 대장을 따르기 위하여 '환난을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된 것을 오히려 감지득지하면서 충성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교인이 진짜 신자이며 어떤 교회가 진짜 주님의 공동체인가 하는 것은 성도가 '능욕'을 당하고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게 될 때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평소에 '사랑, 화목, 평안' 따위의 미사여구만을 표어로 외치던 교회들은 간단히 쓰러지고 뿔뿔이 흩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평상시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군기확립과 '전투하는 지상교회'라는 임전태세와 '죽도록 충성'이라는 극기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그저 교회는 자기만족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하나님은 자기행복을 성취시켜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줄만 알고 있었으니, 그런 약골들이 어떻게 '그 이름을 위하여 받는 핍박'을 견디어낼 재주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평소부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철저히 주님만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위해 죽는 것까지도 기뻐할 줄 알도록 훈련이 된 교회는 끄떡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상관을 모시고 있는 쪽은 결코 꿀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연전연승, 아니 무조건 필승하고야마는 대장을 모시고 있는 쪽은 조금도 겁낼 이유도, 약해질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다가 조금 시험만 닥치면 당장 낙심하고 넘어지는 약골 교인이 되지 말고, 진정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최고의 군주로 모시는 성도답게 자기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게 된 것까지도 기뻐함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기쁨 역시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참된 신자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 사령관이 누구인지를 항상 바로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최고의 명령을 자기에게 내리는 권위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똑바로 알고 무조건 그 명령에 복종할 줄 아는 자세를 지킬 줄 알아야만, 그 중간에서 쿠데타하는 무리들의 농간에 놀아나거나 하극상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마디로 하자면 곧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바로 그런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혼란스러운 상황을 당해도 자기네 위의 최고 명령권자가 누구인지를 결코 착각하지 않았던, 실로 침착하고도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군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명령 제1호인 줄 알고 그 명령에 거슬리는 사람의 말은 결코 따르지 않았던 '똑똑한 사명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줄 알고 바로 그 주님만을 신앙고백하는 교회를 세우고 밤낮 모이기를 열심히 했던 '부지런한 교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존귀하고 높은 사람을 받드는 것보다도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며 기뻐할 줄 아는 실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승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령관의 '명령'만을 따르고 사령관 밑에 똘똘 뭉쳐서 '집결'해 있고 그 사령관의 뒤를 따라 싸움으로서 그 영광의 '승리'도 함께 나누었던, 정말 훌륭한 병사들이요 훌륭한 장교들의 모습이 아니었겠습니까?

  높은 사람이 자기를 친구처럼 대해준다고 해서 자기도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처럼 맞먹고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마디로, 건방지고 무례한 인간이 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처럼 여겨주신다면, 그저 황송스럽게 여겨야 마땅하며 자기도 주님을 친구처럼 사귀기 전에 먼저 '나의 주님'으로 더욱 높이며 받들 줄 알아야 그 관계가 제대로 지속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 절대주권'은 모르고 그저 '사랑의 하나님'만 아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성직을 가지고서도 실제로는 순전히 '사람의 종'이 되어 있는 목사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소위 '교인을 존중'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한다고 하는 교회는, 결국 사람을 높이는 인본주의적 교회일 뿐이며 총사령관보다 병사를 더 높이는 하극상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 줄 모르고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하는 교회는, 결국 바리새인들이 판을 치는 교권주의 교회가 될 뿐이며 예하부대장이 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사단을 마음대로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총사령관보다 사병을 더 높이 받들거나 부대장이 참모총장처럼 행세한다면 그 군대란 것이 어떤 군대인지는 설명이 두 번 필요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조건 '하나님 절대주권'만을 최고로 높이는 것은 진짜 교회와 성도라면 지극히 당연한 기본상식과 기본자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높여야 자신이 높아지고 목사가 예수님을 높여야 교회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성도는 무조건 주님 명령인 말씀중심으로 순종해야 하고 목사는 교인들을 무조건 주님의 몸 되신 교회중심으로 충성하도록 만들어야만, 각 성도들이 진정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고 교회는 비로소 '사람을 섬기는' 서비스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문위원이 아니라 대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우리의 리더이십니다.
  신앙생활 중에 그 어떤 혼란이나 고난을 당해도 항상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세,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이 영적 군기를 지킴으로써, 그 주님의 명령 1호를 순종하여 끝까지 복음증거 사명에 충성하며 그 주님께서 세우신 지상의 전투교회 안에 항상 집결해 있고 바로 이 대장을 따라 죽도록 충성하여 끝내 함께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