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Ⅲ. 영광스런 자존감으로   (히브리서10:19-25)

군목으로 일하던 때에 겪었던 작은 경험입니다.  
제가 소속 된 사단 내에 여러 개의 교회들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예배당건축의 대부분은 서울의 어느 한 교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현지 군목으로서  하루는 그 교회 군선교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 큰 교회사무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중위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간 나에게 담당자가 말했습니다. “지금, 바빠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무실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에, 황당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급히 나가봐야 하니, 무슨 일인지 사무원에게 얘기하시면 후에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물론 사무실을 찾아 가기 전에 미리 만날 시간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그런 일을 당하하고 보니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내가 그 분을 만나려고 한 것은 새로운 교회를 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군선교비를 도와달라는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어떻게 보고 그랬을까 생각하니 내 자존심이 무척 상하였습니다.  교회사무실을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최이우 목사, 너는 누구니? 도대체 너의 신분은 무엇인가?”
이런 일들로 인하여 내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것이 바로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전능하신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스런 자녀이다.”
만약 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구걸이나 하는 존재로 보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처신을 잘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밝고 신나게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문제입니다.  

지난 두 주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제대로 하며 사십니까? 기도가 정말 즐겁습니까?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하시며 누가복음18:1이하에 비유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가난한 과부가 아주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그 도시의 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옳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과부의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밤낮 부르짖는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마침내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교훈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런데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잘못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밤낮 하나님께만 끈질기게 매어달려 귀찮게 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꼭 심각한 문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아주 성가신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도 별로 좋으신 분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천국 문전에서 서성거리며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고 기다리는 거지가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의 상대가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렇게 기뻐하셨던 이유를 기억하십니까? 대화의 파트너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분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뿌듯한 영광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우리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대화에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내 할 말만 쏟아내는 것이 대화가 아님을 우리가 일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예절이 있듯이 기도에도 예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요한의 자기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두 가지 기도의 원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는 기도는 하나님께 시선과 마음을 집중하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는 이방인처럼 길게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주기도의 뜻을 말씀드립니다.  
이 기도의 시작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성도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해 주심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극도로 높여주십니다.  
  
첫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높은데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땅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땅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로마서1:21-23, 25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늘의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막연한 하나님을 상상하다가 결국 땅의 하나님,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은 인간보다 힘이 세거나 월등한 존재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짐승들 가운데 사람보다 힘이 센 황소, 코끼리, 호랑이, 독수리, 코브라, 용과 같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과 강한 짐승의 머리를 붙여서 만들기도 합니다. 가끔은 덩치가 유달리 크고 힘이 센 사람의 모습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땅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거나,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인간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전능자’라 불렀습니다.(로마서4:17)  
역대상29:10-14에 믿음의 사람 다윗은 말합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제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 주권과, 부와 귀와 권세와 능력이 다 주님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무한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무소부재하십니다. 초월적이십니다. 영원하십니다. 전능하십니다. 변하지 않으십니다. 지혜로우십니다.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20세기 신학의 거장 폴 틸리히 목사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배후의 존재이시며, 모든 신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God above gods"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위에 세워진 집처럼 견고하여 항상 그 자리에 든든히 서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위대한 하늘의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광을 누리는,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하늘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둘째,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등지고 사탄의 종이 되어, 죄짓고 징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에베소서2:1, 4-7에 말씀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2:8-10에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서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크시고 위대하신 하늘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로 다가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4:8)

모세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난 다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니라.”(이사야6:5)

그러나 이게 웬 은혜입니까? 누구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당신이 직접 다가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열린 그 새롭고 산길로 나아가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되시는 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로 여신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서1:4-7 말씀을 보십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안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예정과 그의 택하심은 실로 너무나도 심오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저 지난 주간에 우리는 몽골에 신학교 건물을 기공하였습니다. 감리교회의 두 분의 감독님과 학교 당국의 교수님들과 여러분들이 동참한 가운데 진행이 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기공예배는 삽으로 흙을 떠는 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실은 많은 일들이 미리 진행되었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허름한 작은 전세아파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2.우리에게 신학교 건물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3.하나님께서 기획위원회에서 뜻을 모우고, 임원회의에서 결의하도록 하셨습니다.
4.예산을 편성하였습니다.  
5.몽골현지 선교사들과 협의 하고, 한국의 후원자들의 뜻을 같이하게 하셨습니다.
6.몽골신학교 교수들과 건축할 땅을 제공할 후레대학 관계자들과 협의를 거쳤습니다. 7.예산을 위한 협력방법을 찾고, 사순절금식헌금을 드리며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8.한국에서 가 설계를 한 것을 가지고, 몽골건축회사에 재설계와 허가를 맡겼습니다.
9.기공예배를 드리고 기공을 하였습니다.
10.건축회사선정 및 건축 진행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적인 협의까지 마쳤습니다.  
건축은 땅을 파고 기초를 놓는 것으로 시작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미리미리 진행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그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10:19-22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요한복음14:6에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몇 년 전에 ‘멜 깁슨’이 만든 영화 "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한 바 있었습니다. 그가 상함으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아니 그가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였다는 뜻 말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53:4-6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갈라디아4:6, 7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의 영을 우리 안에 넣어주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을 상속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때,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위대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천국의 거지가 천국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도는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자녀의 대화입니다. 교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어디에서든지, 십자가의 주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새롭고 산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마태복음28:19-20, 요한복음14:16-18
모든 일들이 잘되어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삼차 한잔의 효력을 아십니까? 평소에 식사를 잘 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한 일주일 정도하고 난 다음에 인삼차 한잔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신분을 격상시켜 주신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찬미하며 기도하며, 응답의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