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불평 사이    (민수기 11:1-9)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그림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이 그림은 만화가인 힐(W.E.Hill)이 1915년에 발표했던 그림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갸름하고 귀티 나는 젊은 부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매부리코에 주걱턱을 가진 마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나 상황이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씨로 인하여 한 사람은 즐겁고 한 사람은 속상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감사와 불평 사이 아주 가깝습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상황의 차이가 아닙니다.

제 아내의 아버지 기억을 우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읽어보았습니다. 거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만 학교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문방구에 걸려 있는 노랑 빨강 분홍의 색색의 귀걸이를 보았는데 귀에 달면 달랑 달랑 흔들리는 플라스틱 그 귀걸이가 얼마나 예쁜지 꼭 갖고 싶어서. 엄마께 사 달라고 졸랐더니 한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 몰래 퇴근 전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더니 아빠는 퇴근 길에 종로 금은방 경보당까지 나가셔서 분홍 귀걸이가 아닌 순금으로 된 작고 동그란 귀걸이를 사 가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플라스틱 귀고리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금 귀걸이 사주셨으나 정말 행복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제 아내는 너무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아니라 불평입니다.

지금 제 아내에게 제가 프라스틱 어린이 장난감 귀걸이를 사다 주면 어떨까요?

아직 철 없을 때 이야기입니다.

철 없어서 감사를 감사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의 힐리스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오늘 집안 이야기 다 나옵니다. 힐리스라는 바퀴 달린 운동화가 유행을 할 때 그것 신고 싶어 하는 아들을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청계천에 시장에 가서 힐리스처럼 만든 유사품을 샀습니다. 힐리스 값의 4분의 1정도의 값을 주고 샀습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이는 좋아라 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메일이 왔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은 힐리스가 아니라고 했으며 힐리스는 ‘H’자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며 불평을 하고 섭섭함을 표현했습니다.

‘참 아빠 자랄 때는 운동화도 제대로 못신고 살았는데’라는 생각하니 ‘그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텐데’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불평은 종종 듣습니다. 그 이후 그것 사준 것 때문에 아이와 함께 예술의 전당 마당에서 누군가가 진짜 힐리스 타면 “아빠, 저게 진짜 힐리스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데모하는 것이죠.

제 어린 시절 생각하면 속상합니다. 그런 운동화 하나 있으면 절말 껑충껑충 뛰며 감사할텐데.

모든 것이 풍족한 중에 사는 요즘 세상에 감사할 것들이 오히려 많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자세가 문제인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상황보다 내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겪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고통 받던 이집트 땅에서 나온 후 이들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합니다.

광야 생활도 기적의 연속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하늘에서 아침마다 만나가 내립니다. 농사짓지 않고도 먹습니다. 모자람도 없이 또 남아서 음식 쓰레기 처리해야 할 걱정도 없이 먹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의 중병에 걸린 이스라엘


1절 “악한 말로 원망”

4-6절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원망과 불평의 중병에 걸렸습니다. 감사는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찾아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 원망과 불평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병들었고 사고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감사할 것 생각하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 동안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며 그 동안 매일 먹여주신 놀라운 손길 생각하면 자다가도 깨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불평거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매일 좋은 것, 심비한 것 대하다 보니 기쁨도 감격도 없어지고 오히려 불평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만나는 아내가 남편이 내게 감사요, 기쁨입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좋고 사랑스럽던 배우자가 점차 귀찮아지기도 합니다.

매일 밥상 차리는 것이 번거럽기도 합니다. 나중에 함께 앉아 밥 먹을 그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섭섭하고 외로울텐데.


계속되는 원망의 행진


이런 원망과 불평은 계속됩니다.

민수기를 읽으면서 그런 행진을 봅니다.

13,14장이 그렇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백성의 대표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실 땅을 악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악평하다가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복을 받지 못합니다.


20장에도 나옵니다.

20:2 이하에서 물이 없으므로 시작된 원망은 모든 것에 불만을 증폭시켰습니다.

5절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21장에도 계속됩니다. 이 원망으로 인하여 불뱀에 물려 죽는 결과가 옵니다.

21장 4절 이하에 나오는 원망과 결과적으로 등장한 불뱀을 보면 결국 원망은 스스로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가는 동안 이들은 늘 불평과 원망 속에 광야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40일 정도로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갔을 텐데 원말과 불평이 광야를 헤매며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듯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들도 매일 감사를 잃고 원말 속에 산다면 우리의 삶은 하루도 광야가 아닌 날이 없을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광야세서도 감사하며 살 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불평의 원인


왜 이런 원망이 시작되었는지 보십시오.

4절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우선 탐욕입니다.

탐욕은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탐욕이 있으면 감사는 사라집니다.

밥 굶지 않고 먹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배불리 먹게 되면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쳐듭니다. 그래서 욕심대로 다 가져도 그 욕망은 끝이 없고 그래서 감사보다는 늘 불평 속에 상대적 빈곤과 부족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욕심은 없는 것에 대하여 계속 미련을 두게 하므로 감사하는 마음에 병들게 합니다.


이 탐욕은 이스라엘 중의 섞여 사는 무리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많은 잡족이 섞여 있었습니다.

출12:38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도”(4절) 그렇게 탐욕에 빠져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흉내 내고 세상의 가치관에 빠지면 우리도 추한 욕망에 감사를 잃게 됩니다. 어느새 나의 말이 세상사람 닮아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전제 공동체 가운데 몇몇 소수의 불평과 탐욕은 전체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좋은 말 보다는 좋지 않은 말들은 더욱 빨리 전파되고 감사하는 말 보다는 불평의 말이 더욱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함을 훈련합시다


기도를 해도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을 누립니다.


간디 이야기를 하나 생각합시다.

인도의 간디가 시골에 갔다가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과 인사를 하다보니 어느새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합니다. 급하게 기차에 오르다가 그만 신발 한 짝이 밖으로 벗겨지면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른 자신의 남은 신발을 벗어 밖으로 던졌습니다. 놀란 수행원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간디의 말이 재미있고 의미 있습니다.

“저 신발은 누군가 주어서 진을 수 있을텐데 한 짝만이라면 신을 수 없지 않은가?”

저 급하고 짧은 시간에 이렇게 남을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떨어진 신 발 한 짝을 안타깝게 생각할텐데.

불평거리입니다, 재수 없는 날이라고 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누군가에게 신발을 한 켤레 선물하는 날로 생각한다면 감사할 일 아닙니까?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감사하게 생각되면 정말 감사할 일을 그 사람이 하고 마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밉게 보면 결국은 미운 짓을 하고 맙니다.

교회, 목사, 장로, 옆에 앉은 교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합니까?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감사할 일이 생기고 맙니다.


광야를 에덴처럼,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처럼 만들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잠시 사막에 던져져도 분명한 것은 그 사막에 강물이 흐르게 하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불평 사이는 멀지 않습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감사하는 사람과 원망과 불평에 사는 사람의 상황은 전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사의 정로에서 조금만 치우쳐도 불평과 원망으로 기울게 됩니다. 영적 균형을 잡으면 감사가 넘칩니다.


출처/김관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