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3:1-7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고난에 처한 때의 가정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의 가정 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난받는 사회 속에서, 고난받는 정부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이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이런 정부의 제도나 체제를 떠나서 3장에서는 이제 우리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셨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행복한 가정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안에 행복한 가정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런 노력 없이도 행복한 가정 생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믿는 아내의 어려움은 형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라는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아내를 빌려줄 지언정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형편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핍박과 고난을 받는 사회 속에서 불신자인 남편과 같이 살면서 신앙 생활과 가정 생활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특별히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내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까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순종하라”고 강조합니다. 만일에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분위기 아래 있는 아내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저항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성경은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순종의 미학”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의 미학입니다.


순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오늘 말씀 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억울한 고난, 애매한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원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던 것처럼 “이와 같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순복’이란 본래 어떤 지위나 위치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순복이란 말은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성을 향해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를 사랑하시고 아내의 심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의 순복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말씀하는 남편은 예수 믿는 남편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그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을 모시고 계신 여성도님께서는 이 말씀을 잘 읽으시고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은 절대로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7-28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혹 어떤 이들은 여기에 “그들에게”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창조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수로 표현된 것은 아담과 하와 둘 다에게 복을 주셨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에게 꼭같은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똑같이 부여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질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한 가정의 머리로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것은 남편이 아내의 독재자가 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을 이 가정의 지도자로 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 일에 있어서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보다 결코 우월하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보내시고, 보내신 바 아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한 영광을 다 아버지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경륜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주를 주관하시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우주라고도 말할 수 있는 가정에서도 주님께서는 똑같이 질서를 요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구시대적인 말씀으로 들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명령 따르는 사람에게 손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만을 보면 그 순종의 태도가 복음 증거의 상황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통해서 남편에게도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가령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성미를 계속 건드려 보세요. 전도의 기회가 막히고 말 것입니다. 아마 남편이 화가 나서 “죽어도 예수 믿지 않겠다”고 맹세를 거듭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의 오만한 자존심이지만 하나님이 남자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가 가까울수록 설교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 감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다’를 말합니다. 아내의 떠들썩하는 소리, 잔소리가 남편을 구원시키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여신도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남편에게 설교를 들려주기 위해서 기독교 방송을 크게 틀어놓고 자기는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는 제 남편이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열심은 좋은데 무식한 열심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기억하시지요.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황했던 남편도 죽기 직전에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가 영광스럽게 응답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는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이 아들에게 아주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참회록」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버지를 마치 주님을 모시듯 하였습니다.” 모니카의 이런 삶의 태도가 깊은 감동을 주어서 마침내 그 남편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울수록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중요합니다. 어떤 행위요?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며”라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그 다음 “정결한 행위”는 도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적으로 정결한 아내의 태도야말로 남편에게 무언의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감동스러운 설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1-2절을 같이 읽읍시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셋째로, 인격의 단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 태도가 바로 아내의 인격적 단장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그의 신앙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아픔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의 교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든, 권위자에 대한 순종이든 순복의 태도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훌륭한 인격으로 단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부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두 가지 인격적인 덕목이 이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온유함’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힘이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펄펄 뛰는 야생마들을 데려다가 길을 들였습니다. 그 힘이 잘 다스려집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상태를 ‘온유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잘 통제되고 있는 인격’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펄펄 뛰고 성질 내면 안됩니다.

한편 온유함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성품 가운데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이란 말은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고요한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요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떠들썩하면 안됩니다. “저 여자 예수 믿더니 말만 많아졌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을 오히려 적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부인은 남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남편에 대해 많이 말씀하세요. 사람에게 하는 말은 오히려 번거로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부인은 고요하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써 인격을 단장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단장하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로마의 여자들은 머리 위에 장식품을 엄청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로마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멋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말씀에 보면 “금을 차고 다녔다”고 했는데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은 ‘금으로 둘러싸고’입니다. 머리를 예쁘게 꾸미고 금반지를 끼는 것에 대해 성경이 시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지나치게 사치한 옷을 입는 그러한 단장보다 더 중요한 단장은 내적인 인격의 단장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장’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코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코스모스란 우주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란 말은 질서 있는 우주를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로 화장품이라는 말이 코스모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장은 질서 있게, 아름답게 해야지 질서 없이 마구 하면 안됩니다. 아름다움은 질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세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단장해도 그것은 다 썩어져갈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아내가 얼마나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에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최후의 기쁨을 얻을지 못얻을지의 여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이 아내의 인격적 단장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1장 22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이 말씀은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이 외적으로만 단장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지 아니한다’는 말은 온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태도를 갖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선배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선배들의 모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했습니다.

그러면서 6절 말씀을 예로 들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므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복종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본입니까?


‘사라’라는 이름에는 ‘여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남편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여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남편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야 여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정의 남편을 왕으로 모시세요.

모든 여성들의 마음속에는 여왕이나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여왕 콤플렉스,’ ‘공주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모든 여성들의 밑바닥에는 여왕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남편을 왕으로 대접해 주셔야 합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도 신경질 내지 마세요. “아유, 저 지긋지긋한 인간, 또 술 처먹고 들어오네. 에이, 저 마귀 자식.” 그러지 마시고 “폐하, 이제 오시나이까. 약주 드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말하세요. 한 달만 왕으로 모셔 보세요. 감동 받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보, 하나님이 우리더러 여기를 떠나라고 하셔.” “어디로 가라시는데요?” “글쎄… 그것은 모르겠고 아무튼 여기를 떠나라고 하시네. 갈 곳은 지시하신대.”

그때 만일 사라가 “아니, 여보 당신 정신 나갔어요? 갈곳도 모르면서 어디로 간다고 하세요?” 했다면 어떻게 떠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훌륭하지만 사라도 정말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의 곁에는 믿음의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되신 여러분. 그리고 아내 되실 여러분. 앞서간 믿음의 여성들의 본을 따라 남편을 향한 이 순복의 태도의 중요성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사라의 딸이 될 것을 믿습니다. 사라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여왕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먼저 오늘 주신 말씀 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하는 말이 나옵니다. 지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남편들은 일반적으로 아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남편 된 여러분. 아내의 생일을 아십니까? 결혼 기념일을 아십니까? 아내의 건강 상태가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아내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속적인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체적인 면으로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생활의 책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거한다는 말 속에는 시간을 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동거하려면 시간을 내야 합니다.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내십니까?

뿐만 아니라 동거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한다는 것은 하룻밤 잠이나 자고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숙집은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삶을 얼마나 나누십니까? 남편 되신 여러분. 가정이 무엇입니까? 하룻밤 머물다 가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가정은 정말 삶을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인 면으로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란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들은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한번 놓쳐 보세요. 그 깨지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합니까?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내들은 정서적인 민감성에 있어서 남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내의 정서적인 민감성 앞에 남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아내의 행복은 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을 통해서 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내가 집안 장식 하나를 바꿔 놓아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멍청한 남편들이 집에 들어서면서 달라진 분위기를 아는 척이나 합니까? “밥 줘. 자자”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때 아내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러한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어떻습니까? 7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대로 남편과 아내가 지적인 면에서, 신체적인 면에서, 정서적인 면에서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막히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 관계가 정상이 되어야 남편의 영적인 생활도 제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바탕 싸운 다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남편이 아내에게 성의를 다해야 합니까?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라” 했습니다. ‘생명의 은혜’란 ‘영생의 선물,’ ‘구원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 최고의 선물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권리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갈 때 이 땅에서만 함께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원을 통한 파트너입니다. 영원을 통한 동반자의 위대한 삶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며,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다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함께 주님을 계속 섬기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