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어떠해야 하는가?
마12:46~50

배성산의 가족이 2004년 5월7일 설날(음력정월초하루)특집으로 KBS 1TV '아침 마당’에 ‘한 지붕 대가족이 사는 법’이라는 주제로 가족 모두가 출연 하였다. 증조할아버지로 부터 4대 손자에 이르기 까지 생방송으로 70분간을 방송하였다. 우리 가족의 출연은 5대째 내려오는 전래적(傳來的) 신앙의 가족이었고 현대를 사는 핵가족에 가족부재(家族不在)의 현상에 한 지붕아래 가족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가족을 넘어서는 가족의 한계와 가족의 영역을 넓히는 의도로 KBS1TV의 PD가 이런 뜻을 감안하여 청원 하였기에 여기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었다. 원래 이 방송은 헤어진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다. 원래 이 프로그램에서 ‘그 사람이 보고 싶다’라는 코너로 많은 사람들이 보아왔던 프로그램 이었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를 보는 사람들은 가족의 사랑, 핏줄이 전해주는 찐한 감동에 한번쯤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한국 전쟁(6,25)으로 인한 해외입양, 가난한 시절 어려운 살림을 견디지 못해 자식을 남의 대문 앞에 슬며시 놓고 흘러간 세월동안 살아가다 성(性)도 모르고 자란 자식들이 부모를 찾겠다고 혹은 자식을 찾겠다고 하는 TV 만남의 장면을 보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눈물에 인색한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천년(2000년)을 맞는 광복절(8,15)에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혈육의 뜨거운 사랑을 보고 ‘가족사랑’ '민족사랑‘의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설렁거렸던 것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피붙이나 가족 말고는 사랑과 유대감을 느낄 곳이 없기 때문에 저토록 가족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한편 가족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상적인 생각에서 우리는 냉철하게 한번쯤 가족이란 꼭 그것만인가? 뒤집어 보아야 하지 않을 가 하고 생각해 본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가족은 당연히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가족은 아주 매우 중요함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에 너무 집착하면 ‘가족주의’가 생겨나고 가족주의의 마법에 걸리기도 한다는 말이다. 자기 가족의 그리움만이 갖는 것은 가족이기주의의 함정에 빠지기가 쉽다. 언젠가 신문에 게재된 기사에서 ‘가장 튼튼한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제하의 글을 보았다. 그 기사 밑에 길가에 쓰러져 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는 사진과 함께 가족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기사를 떠올려 본다.

이것은 가족만이 자기의 안식처와 위로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내 이웃이 있는 사회로 부터의 탈출을 말함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말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고 놀랄 줄도 모른다는 점이다. 거부감은커녕 무심코 지나친다는 것이다. 혹시나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이웃을 볼 때 나의 가족, 내 친척이 아니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가족주의는 가족이기주의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옛 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가족 사회에서 탈출하여 시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요즘 시사적인 한 실례를 들어보자. H 그룹 김 회장 둘째아들 김 모 씨 폭행 사건을 본다. 미국 예일대학 재학 중인 아들 김 모 씨가 07년 3월8일 밤 일시 귀국해 친구들과 청담동 룸살롱에 갔다가 때마침 서울 북창동 최고급 유흥주점 종업원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로인해 김 모 씨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눈 주위가 찢어지게 되어 무려 10여 바늘을 꿰매게 되었다. 폭행에 연루된 김 모 씨는 ‘내가 누군 줄 알고 때리느냐’ 며 화를 냈고 분개한 북창동 G룸살롱 종업원은 ‘해볼 테면 해 봐라’며 명함을 김 씨에게 건네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한 H그룹 김 회장은 자신의 아들이 당한 사고를 듣고 분을 참지 못하여 아버지인 회장 자신이 직접 보디가드 및 경호원 수십여 명과 차 10대에 나눠 타고 청담동 사건현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때린 종업원을 태우고 제 3의 장소로 가서 폭행을 했다는 전말(顚末)이 ‘김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 된 것이다.

이번 이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집착을 단면으로 보여 주는 실례가 되고 있다. 그로 인한 경찰 우위에서 하위까지 인사문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가족주의이다. 가족주의라는 말은 ‘튼튼한 울타리’ 운운하며 가족과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에게 책임지우는 관습(가부장제)과 가부장의 권위유지에 혈안이 되기도 함에 우리는 길들어져 있음을 보는 것이다. 부모의 능력아래 가족의 삶을 영위하려고 할 때 항상 그 자리에는 무리(無理)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가족주의가 명백하게 폭력인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아버지(어머니)라는 한 인간의 어깨에 모든 생존의 짐을 떠맡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우리에게 ‘사회’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를 가족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사회적 공공 영역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를 형성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적 영역을 만드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는 ‘가족’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함에 유의한다. 예수는 공동체의 영역을 넓히는 이야기를 본문에서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관은 네 이웃에 대하여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족임을 아는 것이다. 그 가족은 누구인가를 보게 한다. 이것이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가족이 찾아 왔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반문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 이니라’고 말씀하심에 유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말함이다. 예수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예수가 유년 시절을 보낼 때 그는 자기를 찾는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혀 부모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회복으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끼리도 한 형제가 되도록 연결시켜 주심에 대한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가족에 근거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가족이 팽창하여 한 종족이 되고 그 다음에는 한 국가를 이루고 마침내는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의 결연은 처음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부터 신성하게 맺어 졌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인류와 인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히브리인의 가족 이해에 의하면 그들은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각 가족은 지상에 있는 모든 다른 가족들과 서로 명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가족들의 창조주는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한 가족이라는 상호관계에 대한 본래부터의 이해로 그리스도교의 사회와 사회발전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성서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각자를 나타내는 어휘들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외에 자기의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표현할 때 열조의 뜻으로 쓰이는 용어는 ‘백성’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점도 유의하는 것이다. 성서의 역사에 있어서 초기 유목시대에는 족장 중심의 대가족이 번창할 수 있었음을 안다.

이 대가족을 붕괴시키는 요소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기근과 질병뿐이었다. 그러나 가나안(팔레스타인)에서 농경, 도시문명이 점차 발전하면서 히브리 가족에게는 사회체제 전반에 걸쳐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시대적 인식을 수용했다. 이 도시 농경문화의 생활방식은 변화하고 발전했다. 오늘날의 현대 산업화, 도시화를 이루는 사회전반의 변화와 다름이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성서시대가 경험한 가족개념을 확대하여 가족이란 용어가 히브리 지파들을 가리키는 말로 되었고 이 이스라엘과 유다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또 외국 열방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잇는 계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족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용되었음에 유의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시대의 ‘하나님의 가족’이란 뜻으로 가족의 의미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기자들은 이러한 표현법을 계속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언급하여 가족공동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본문에서 언급한 예수의 가족관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그의 가족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 의미는 가족의 의미가 한 남자와 그의 아내 및 자녀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친척 전체, 공동체, 종족, 씨족국가, 지구상의 모든 인류까지 그 의미는 광범위함을 알게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 가족제도는 성서에서 긍정되었고 사회 인류학에 의해서 인간사회의 첫 번째 제도로서 인정하게 되었음을 알고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긍심(自矜心)을 가져야 한다. 대체로 지금의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족생활을 옹호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가족이 구원의 영역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가족은 구원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대체로 비그리스도교 공동체, 혹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게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규범을 부과하려고 애를 써 왔으나 이제 전 세계 교회들은 오늘날의 가족에 대한 상황적인 접근과 그에 상응하는 목회적 관심의 중요성을 점증적(漸增的)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목회적인 측면에서 가족을 다루기 위해서 특별한 상황과 역사뿐 아니라 역사의 주요 흐름과 문화가 격변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방편에 대한 진지한 지식이 요함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가족’은 개인, 부부, 가족, 가족 구성원,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oikoumene) 사이에 한계성을 구분하고 연관성도 촉구하도록 함에 있어 ‘하나님의 가족’에 그 의미를 알게 하기에 ‘가족이 어떠해야 할 것’을 말하게 한다.



집은 가정이어야 한다

2007년 5월 20일

출애굽기1:21 마태복음12:25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가정의 구조는 과거 1세기동안 사회의 개혁과 변화로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 한편 그로 인하여 가정이 훼손되어 왔다. 가정의 훼손은 사회현상의 총체적 관계 훼손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강화해야 한다. 가정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의 현실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아늑한 집은 있으나 그 집에는 공경 받아야 할 어버이도 없으며 화목한 형제우애, 사랑스런 자녀도 없는 집만이 덩달아 있기에 집 아닌 물리적인 건축물만을 보는 것이다. 5월의 가정의 달에 가정교양서로 ‘포옹’(Hugs for Mom)이라는 필리스 볼칭하우스의 지음에 김지현 옮김으로 나온 책은 베스트셀러로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마음을 열어주는 힘으로 우리들의 집에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의 위력을 느끼게 하고 살아가는 집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책속의 “집을 세우는 건축가”라는 글을 여기 올린다. ‘어머니는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그러나 대단한 훈련이나 특별한 학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력을 쌓아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집이란 천장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방이 몇 개인지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 이웃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로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지 아니면 혼자 외톨이로 떨어져 지내는 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집이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이란 따스함이고 희망이고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웃음이고 기쁨이고 평화입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상심한 마음을 위로 받는 곳입니다. 집은 사람이고 또 관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집은 저절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노력과 수고 그리고 굳은 결의가 필요합니다. 목적과 비전이 있어야 세울 수 있습니다. 이는 때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과 반대로 생각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워있고 싶어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집을 세우는 일은 품이 많이 드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영 못할 일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힘이 어머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다정하게 어루만져줄 손이 있고 따스하게 안아줄 두 팔이 있습니다. 격려의 말을 전할 입이 있고 키스를 퍼부어 줄 입술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러 달려갈 다리가 있고 이야기를 들려 줄 귀가 있습니다. 걱정하고 생각해줄 수 있는 가슴과 마음껏 나누어 줄 사랑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입니다. 당신은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이 글은 잔잔하고 세심한 감동의 어머니의 사랑과 가족을 알게 한다. 가족의 지킴이로서의 어머니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 있는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도 알게 하여 집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집의 지킴(house keeper)이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만듦(home maker)으로의 집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제목이 ‘집은 가정이어야 한 다’를 말 하게 한다. 성서에 집(house)은 히브리어로 바이트(bayt)와 헬라어로는 오이코스(oikos)로 농부의 가장 간단한 가옥으로부터 궁전(왕의 집)과 성전(하나님의 집)에 이르는 주거지를 지칭하는 말로서 성서 전체를 통해 약 2000회 정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을 말할 때 ‘들어가다’(go in) ‘밤을 보내다’로 뜻하는 어근으로부터 파생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어근은 집이 주로 야간의 위협들 및 악천후로부터의 피신처였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도 대부분의 집들이 속하는 시대마다 이러한 의미로 다양한 주거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집’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그 어원은 영어에서처럼 ‘가족’을 지칭함에 유의한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가족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함을 아는 것이어서 영어의 home을 우리말로 ‘집’ 혹은 ‘가정’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도덕적 및 사회적 관점에서 가정의 ‘고정된 거처’로서 생각되고 그 구성원들에게 활동적인 생활의 노고와 위험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해주며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유대관계에 의해 묶여져 있는 사람들의 거소(居所)로서 소중히 여겨지는 주거지를 의미함이며 따라서 이 말은 영속, 안전, 친숙의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그 후유증은 ‘집’과 '가정’을 구분하는 구조적인 여건을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가치관의 일탈현상, 생활향상의 능력주의의 사고(思考)와 합리적이고 편의주의(便宜主義) 생활태도가 능력향상만을 평가함으로 ‘가정’이 없는 ‘집’만을 우선하는 성향으로 가고 말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가정의 붕괴를 말함이다. 한 가정의 유기적인 관계는 붕괴되고 나 혼자의 소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문명의 유혹을 고스란히 받아 오늘의 가정이 침체되어 가정공동체의 허술함을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다시 ‘가정’의 개념을 보면 여러 개의 용어가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바이트’라는 집이란 뜻이며 신약에서는 오이키아(oikia)라는 가족이라는 뜻과 오이키아코스(oikiakos)로 친척, 즉 일족의 구성원이란 뜻을 알게 한다. 출1장21절에서 ‘바이트’는 하나님께서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의 산파들에게 부어주신 가문의 번성을 말하는 가운데 ‘가족들’ ‘집안을 흥왕’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집안, 한 가족’이란 뜻에서의 오이키아라는 단어를 안다. (마태12:25, 막3:25).

또 친척이라는 뜻의 오이키아코스는 ‘그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 로 번역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인에게 가족이란 넓은 범위를 넘어 살아 숨 쉬는 사랑과 용서와 포용의 ‘가정 공동체’를 칭한다. 즉 혈연이나 결혼이라는 결속 관계에 의하여 맺어진 직계인들 뿐만 아니라 노예. 첩, 외국인, 고용한 하인까지 모두 가족 속에 포함 하였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할 때에도 가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할례를 배품에서 엿 본다. 성서시대가 경험한 가족개념의 의미심장함은 이 가족개념을 확대하여 가정이란 용어가 히브리 지파들을 가리키는 말로 나아가서는 이 이스라엘과 유대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또 외국 열방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계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시대 사회에서의 가정의 중요성과 신앙적 교훈의 중심체로서 그것의 역할은 가족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를 뜻하여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도 가정됨의 의미를 부여하게 됨을 아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 기자들은 이러한 표현법을 계속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언급한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딤전 3:15, 벧전4:17). 이리하여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도 ‘가족’이라는 용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내 및 자녀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친척 전체, 공동체, 종족, 씨족국가 심지어 인류까지도 포함하여 그 의미를 가정됨의 의미로 갖는다. 가정 제도는 성서에서 긍정되었고 사회 인류학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첫 번째 제도로서 인정 되었다.

성서는 가정에 근거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가족이 팽창하여 한 종족이 되고 그 다음에는 한 국가를 이루고 마침내는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서의 이해는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각 가족은 지상에 있는 모든 다른 가족들과 서로 명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가족들의 창조주는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한 가정이라는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이고 훈훈한 사랑과 용서와 관계 속에 화해와 포용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와 사회발전의 근본이 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공동체는 사회 자체의 발전과 국가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 요람이 되었음도 알게 한다. 가정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가족 상호간의 책임과 가족의 활동 범위가 가정생활로 발전해 왔음을 우리는 안다.

하바드 대학교의 코저(Rose Laub Coser)교수는 ‘한 사회 안에서의 가정활동이 그 사회의 구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했다’ 이 주장대로 집단의 성격들은 여러 가정들의 특징이 조직적으로 규합된 것이라는데 여러 학자들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오늘날 인식하고 있는 무한히 다양한 가정 형태들을 보면서 현대사회의 개혁과 변화에 따른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가정공동체의 삶의 모범을 현대사회는 기대하고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 가기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한다. 그 집은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한 가족은 어버이와 자식, 형제자매, 부부 등 혈연과 혼인 관계 등으로 한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가족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임도 인식한다. 그 인식은 가족주의(家族主義)에만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가정에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관용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힘이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가족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인적 존재가 되게 하는 데 얼마나 기여 하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서 평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 사회 속에서 자신의 최상의 존재의미와 성취감을 갖는 것이다. 한 집은 집의 지킴으로서 만이 아니라 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집으로서의 가정은 ‘집은 가정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집으로서의 가족은 사람이고 관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포옹’의 저자가 ‘어머니는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라고 하는 글이 지금 붕괴된 가정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출처/배성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