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21 마12:25

가정의 구조는 과거 1세기동안 사회의 개혁과 변화로 많은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 한편 그로 인하여 가정이 훼손되어 왔다. 가정의 훼손은 사회현상의 총체적 관계 훼손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강화해야 한다. 가정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가정의 현실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아늑한 집은 있으나 그 집에는 공경 받아야 할 어버이도 없으며 화목한 형제우애, 사랑스런 자녀도 없는 집만이 덩달아 있기에 집 아닌 물리적인 건축물만을 보는 것이다. 5월의 가정의 달에 가정교양서로 ‘포옹’(Hugs for Mom)이라는 필리스 볼칭하우스의 지음에 김지현 옮김으로 나온 책은 베스트셀러로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마음을 열어주는 힘으로 우리들의 집에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의 위력을 느끼게 하고 살아가는 집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책속의 “집을 세우는 건축가”라는 글을 여기 올린다. ‘어머니는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그러나 대단한 훈련이나 특별한 학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력을 쌓아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집이란 천장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방이 몇 개인지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 이웃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지로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지 아니면 혼자 외톨이로 떨어져 지내는 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집이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이란 따스함이고 희망이고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웃음이고 기쁨이고 평화입니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상심한 마음을 위로 받는 곳입니다. 집은 사람이고 또 관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집은 저절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노력과 수고 그리고 굳은 결의가 필요합니다. 목적과 비전이 있어야 세울 수 있습니다. 이는 때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과 반대로 생각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워있고 싶어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집을 세우는 일은 품이 많이 드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영 못할 일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힘이 어머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다정하게 어루만져줄 손이 있고 따스하게 안아줄 두 팔이 있습니다. 격려의 말을 전할 입이 있고 키스를 퍼부어 줄 입술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러 달려갈 다리가 있고 이야기를 들려 줄 귀가 있습니다. 걱정하고 생각해줄 수 있는 가슴과 마음껏 나누어 줄 사랑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입니다. 당신은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이 글은 잔잔하고 세심한 감동의 어머니의 사랑과 가족을 알게 한다. 가족의 지킴이로서의 어머니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 있는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도 알게 하여 집이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집의 지킴(house keeper)이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만듦(home maker)으로의 집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제목이 ‘집은 가정이어야 한 다’를 말 하게 한다. 성서에 집(house)은 히브리어로 바이트(bayt)와 헬라어로는 오이코스(oikos)로 농부의 가장 간단한 가옥으로부터 궁전(왕의 집)과 성전(하나님의 집)에 이르는 주거지를 지칭하는 말로서 성서 전체를 통해 약 2000회 정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을 말할 때 ‘들어가다’(go in) ‘밤을 보내다’로 뜻하는 어근으로부터 파생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어근은 집이 주로 야간의 위협들 및 악천후로부터의 피신처였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도 대부분의 집들이 속하는 시대마다 이러한 의미로 다양한 주거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집’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그 어원은 영어에서처럼 ‘가족’을 지칭함에 유의한다.

그러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가족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함을 아는 것이어서 영어의 home을 우리말로 ‘집’ 혹은 ‘가정’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도덕적 및 사회적 관점에서 가정의 ‘고정된 거처’로서 생각되고 그 구성원들에게 활동적인 생활의 노고와 위험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해주며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유대관계에 의해 묶여져 있는 사람들의 거소(居所)로서 소중히 여겨지는 주거지를 의미함이며 따라서 이 말은 영속, 안전, 친숙의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그 후유증은 ‘집’과 '가정’을 구분하는 구조적인 여건을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가치관의 일탈현상, 생활향상의 능력주의의 사고(思考)와 합리적이고 편의주의(便宜主義) 생활태도가 능력향상만을 평가함으로 ‘가정’이 없는 ‘집’만을 우선하는 성향으로 가고 말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가정의 붕괴를 말함이다. 한 가정의 유기적인 관계는 붕괴되고 나 혼자의 소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대문명의 유혹을 고스란히 받아 오늘의 가정이 침체되어 가정공동체의 허술함을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다시 ‘가정’의 개념을 보면 여러 개의 용어가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바이트’라는 집이란 뜻이며 신약에서는 오이키아(oikia)라는 가족이라는 뜻과 오이키아코스(oikiakos)로 친척, 즉 일족의 구성원이란 뜻을 알게 한다. 출1장21절에서 ‘바이트’는 하나님께서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의 산파들에게 부어주신 가문의 번성을 말하는 가운데 ‘가족들’ ‘집안을 흥왕’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집안, 한 가족’이란 뜻에서의 오이키아라는 단어를 안다. (마태12:25, 막3:25).

또 친척이라는 뜻의 오이키아코스는 ‘그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 로 번역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인에게 가족이란 넓은 범위를 넘어 살아 숨 쉬는 사랑과 용서와 포용의 ‘가정 공동체’를 칭한다. 즉 혈연이나 결혼이라는 결속 관계에 의하여 맺어진 직계인들 뿐만 아니라 노예. 첩, 외국인, 고용한 하인까지 모두 가족 속에 포함 하였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할 때에도 가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할례를 배품에서 엿 본다. 성서시대가 경험한 가족개념의 의미심장함은 이 가족개념을 확대하여 가정이란 용어가 히브리 지파들을 가리키는 말로 나아가서는 이 이스라엘과 유대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또 외국 열방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계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시대 사회에서의 가정의 중요성과 신앙적 교훈의 중심체로서 그것의 역할은 가족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를 뜻하여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도 가정됨의 의미를 부여하게 됨을 아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 기자들은 이러한 표현법을 계속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언급한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딤전 3:15, 벧전4:17). 이리하여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도 ‘가족’이라는 용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내 및 자녀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친척 전체, 공동체, 종족, 씨족국가 심지어 인류까지도 포함하여 그 의미를 가정됨의 의미로 갖는다. 가정 제도는 성서에서 긍정되었고 사회 인류학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첫 번째 제도로서 인정 되었다.

성서는 가정에 근거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가족이 팽창하여 한 종족이 되고 그 다음에는 한 국가를 이루고 마침내는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서의 이해는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각 가족은 지상에 있는 모든 다른 가족들과 서로 명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가족들의 창조주는 하늘에 계신 한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한 가정이라는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이고 훈훈한 사랑과 용서와 관계 속에 화해와 포용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와 사회발전의 근본이 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공동체는 사회 자체의 발전과 국가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 요람이 되었음도 알게 한다. 가정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가족 상호간의 책임과 가족의 활동 범위가 가정생활로 발전해 왔음을 우리는 안다.

하바드 대학교의 코저(Rose Laub Coser)교수는 ‘한 사회 안에서의 가정활동이 그 사회의 구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했다’ 이 주장대로 집단의 성격들은 여러 가정들의 특징이 조직적으로 규합된 것이라는데 여러 학자들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오늘날 인식하고 있는 무한히 다양한 가정 형태들을 보면서 현대사회의 개혁과 변화에 따른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가정공동체의 삶의 모범을 현대사회는 기대하고 요청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 가기위해서는 집이 있어야 한다. 그 집은 가족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한 가족은 어버이와 자식, 형제자매, 부부 등 혈연과 혼인 관계 등으로 한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집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가족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임도 인식한다. 그 인식은 가족주의(家族主義)에만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가정에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관용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힘이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가족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인적 존재가 되게 하는 데 얼마나 기여 하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서 평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 사회 속에서 자신의 최상의 존재의미와 성취감을 갖는 것이다. 한 집은 집의 지킴으로서 만이 아니라 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집으로서의 가정은 ‘집은 가정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집으로서의 가족은 사람이고 관계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포옹’의 저자가 ‘어머니는 집을 세우는 건축가입니다’. 라고 하는 글이 지금 붕괴된 가정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가정과 교회와 신앙

2007년 5월 13일

여호수아24:15 사도행전16:15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버이의 은혜를 기리며 가르치는 선생에 감사로 스승을 알게 하는 달로서 잃어진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5월5일 어린이 날 하루만 어린이에 대한 관심, 인격, 사랑의 표현으로 하루를 지내며 5월8일은 어버이날에 부모 공경의 태도 표현으로 카네이션 꽃 달아 드리며 용돈 드림으로 반짝 지키는 날로 습관 되어 내려오고 5월15일은 스승의 날로 선생의 고마움을 더 하는 날로 지키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한편 어린이가 없고 어버이가 없으며 스승이 없음을 반영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생각하면 5월의 가정의 달은 붕괴된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기에 가정의 달을 선포하여 지키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인류사회의 뿌리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단위이며 이 가정을 토대로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도 이루어짐을 안다. 가정은 인간이 그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살아가다가 삶을 마무리하는 터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정은 기도를 배우는 최초의 교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이며 말씀대로 행동하도록 훈련하고 실습하는 신앙교육의 현장이다. 신구약성서 시대에도 자녀의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먼저 실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교육의 책임 또한 가정의 부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마다 그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가정이 담당했던 신앙교육은 그 기능과 역할이 성전이나 회당 그리고 교회로 점점 옮기어 왔음을 알게 된다.

중세기를 지나 종교교육시대에도 가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부모가 자녀들에게 성서, 교리문답, 교회생활 규칙 등을 가정예배로 인도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발전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로 오늘의 현대 사회에서 더구나 산업사회와 도시화 현상으로 신앙교육이나 기능과 역할이 상실해 가고 있다. 물론 여기에 가정은 붕괴되고 이로 인한 가치관의 일탈현상과 가정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신앙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가정의 질서를 회복해야 할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정의 붕괴와 사회의 질서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가정의 비극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부재(關係不在)에서 오는 삶인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생활구조를 살펴보면 집은 화려하고 비싼 장식물로 꾸며지고 있는 반면에 커다란 집에 홀로 꾸민 각자의 방에서 소외를 느끼며 서로 다른 꿈과 생활을 다른 시간차로 따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대에 집(house)은 있지만 가정(home)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집과 가정 사이에는 무엇이 다른가를 알게 한다. 예컨대 빅토르 휴고(Victor Hugo)는 ‘집은 나무와 돌과 타일로 세워져 있지만 가정은 사랑의 행위위에 세워진다.

집은 몇 십 년 동안 지탱되지만 사랑의 행위에 세워진 가정은 수천 년 살아간다.’고 한 말은 지금 우리로 하여금 실감하며 생각하게 한다. 그 일례로서 옛 로마가 망한 이유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의 역사 교수인 크리스토퍼 도우슨 교수는 ‘로마의 귀족들은 가정을 가지면 가정에 얽매인다 하여 가정을 도피하고 식민지국에서 끌어 온 미모의 노예여인을 택하여 성적 만족을 취했기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가정이 붕괴되어 무너졌다.’고 하였다. 로마는 그들의 권력과 돈과 섹스로 가정이 병들어 무너지고 그로 인하여 로마사회는 붕괴되었음을 보았던 것이다. 고작 5월이 되어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가정의 달이 되어야 하겠는 가 생각하게 한다. 모든 가르침이 가정에서부터 이뤄져 왔음을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탈무드 교육이 전부이라면 가정교육의 불모지대가 되어버린 우리시대를 보고 성찰해야 하지 않을 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가정이 없다. 오히려 부모와 같이 살고 부모와 같이 나들이 하고 가정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쯤은 시시하게 보인다. 교회에서도 교회학교를 통하여 경험되어지는 신앙교육조차 어른들의 욕심으로 편협한 사고와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이 갖는 근본적인 교회관 신앙관이 잘못 받아진 관습으로 또 다른 교회공간이 문화나 놀이 공간 그 이상을 넘어 서기가 어려운 교회당(예배당 인식) 구조공간에서만 고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말만하지만 새 세기의 주인공을 위한 지금의 자녀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갖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유년, 청소년)을 보고 테크노댄스, 힙 핫바지, 염색한 머리, 귀걸이, 코걸이, 등이 신경 쓰여 지기도 하지만 그것만 을 탓 할 것인가? 그래도 내 자식인데 어떻게 할 가? 여기서 어른들이나 기성세대는 모두가 침착해야 한다. 모두가 내 가정으로 눈을 돌려 곧 기성세대들의 문제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문제는 내 가정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시스템이 문제가 되고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심각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학교도, 가정도, 교회도, N세대 또는 디지털세대들에게는 어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인식도 기성세대는 알아야 한다.

가정을 가정되게 잘 꾸리지 못한 원인에 기인하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 인식은 관심이다. 그 관심은 포용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 공동체이다. 병들어진 가정 공동체를 치유해야 한다. 가정의 주인으로 살아온 어른들은 가정 붕괴의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의 신앙열심에만 주력해 왔던 교회의 생활이 곧 가정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교육이나 교회참여도도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한 교회의 전도나 선교의 자리로 자리 매김을 하고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적인 가정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의 원동력이 되는 인간을 가정에서 올바른 신앙으로 교육하고 성장해 가는 것이 기독교가정 임을 인식하고 부모의 책임과 임무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사회의 문제를 여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가정의 변화는 대부분이 급격하게 일어난 가정질서의 변천에 기인함을 본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모들이 현대 사회가 살아온 기존의 경건한 모양에 습관 된 신앙형태에 비교해서 반대하는 경향이 여러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받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행하는 심령부흥운동도 그 본래의 열정이 변질되어 깊이가 없고 기복적인 면으로 흘러 문질 만능의 기세로 몰아감도 문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정과 사회에서 신앙을 생활화 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임을 보아야 한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보다 생활로 은연중에 주는 신앙적 감화를 더 신뢰하고 말보다 인격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함을 아는 것이고 자녀들이 이를 본받도록 할 임무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생활에 있어 가족이 서로 연대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함에 유의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결단을 내리면 그것은 그 한사람만의 결단이 아니라 온 가족의 결단으로 인정함을 아는 것이다. 본문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이다. 또한 신약에서도 사도행전에 한 가족이 다 함께 세례 받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의 곁에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구가 있었고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도 감동되어 회개한 후에 곧 가족을 데리고 와서 믿음의 행동을 같이 하였음을 알게 되어 본 서울교회가 갖는 교회주제(가정과 함께한 교회)의 슬로건의 주제 본문(신명기12:7,사도행전 16:31)도 알게 되는 것이다.

유아세례의 제도가 교회 안에 있게 된 것은 가족들에게 신앙의 연대 책임이 있음을 알게 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유아세례는 부모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음과 또 자신들이 하나님과 일하는 자로서 아이들에게 대하여 어떤 임무가 있음을 알게 하는 의의(意義)를 갖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진리와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신앙의 진리와 임무를 가르쳐 주었다.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의 사역자로서 임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에 배신하는 결과가 된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결단은 자기 개인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가 거느리는 그의 가정 안의 모든 사람을 포함한 입장임을 아는 것이다.

부부가 결혼해서 아이들이 출생하면 그들도 기독교신앙에 근거하여 가정생활에 참예함으로 부부의 결합을 더 강하게 하고 또 모든 관계가 그의 출생 때부터 변하게 되는 그 이유로 그 책임소재를 파악하게 한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에서 기독교신앙을 교육하지 않으면 그 가정과 부모의 신앙적 자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하나님은 인류사회의 기본 단위로 가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 귀중한 깨달음으로 5월에 푸르게 물들여진 자연과 함께 ‘가정의 달’이 되기를 기원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은 질서 안에서 남녀 관계의 건전여하(健全如何)와 부모와 성장하는 자녀들의 신앙적 건전여하 그리고 사회전체의 건전여하가 모두 포함함을 유의하는 필수적인 조건여하임을 알아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정과 교회와 신앙’에서 깨닫게 한다. 어린이가 없고 어버이가 없고 스승이 없는 공동체에 ‘가정공동체’의 귀중함을 새삼 알게 한다.





서울교회 희년을 생각한다. 2007-05-05 23:53:44
교회 (seoul)  

http://seoulch.kr/zb5/?article_srl=938


서울교회 희년을 생각한다.

2007년 5월 6일

레위기25:8~12 누가복음4:18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seoulch@gmail.com)

애국운동의 요람지인 하와이 한인교회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예배드리며 이승만 박사와 함께 애국하였던 한인 교포들은 조국 8,15 광복을 맞으며 하와이한인독립기념교회를 조국의 수도 서울에 세우기를 열망하고 당시 이승만 초대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육군공병단의 지원과 각계 후원으로 현 위치에 “하와이 한인기독교 독립교회”로 교회를 세운지 금년은 49주년의 창립을 맞았다. 내년이면 서울교회 창립50주년에 교회의 희년과 신앙적 축제를 맞는 것이다. 교회 창립 1958년 5월1일로 부터 금년은 49주년을 맞아 내년 2008년 서울교회 희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레위기 25;8-12의 기사는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49) 년이라 너희는 오십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류민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그리고 선포의 방법으로 “너희는 뿔 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고 하였다. 희년의 선포는 축제로 이루어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렛회당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찾아 읽으셨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라”고 하셨다.

예수 자신도 성육신 사건은 바로 이 희년의 성취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예배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희년의 축제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고 그리고 그 약속된 구원과 해방의 완성을 위한 기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희년축제는 철저히 공동체적임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교회는 희년의 축제를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9주년의 희년 대비는 중요함을 알게 한다. 희년 축제의 의미는 신앙적인 관용뿐만 아니라 관용의 실행이며 전제해야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희년지킴의 의미는 오늘의 교회가 어떤 자리에 머물고 있는 지를 살펴서 그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생각하고 희년의 원형대로 교회를 보고 한국교회 과거를 살펴 ‘서울교회 희년을 생각 한다’에 그 의미를 두고자 한다.

‘희년’은 관용의 실행임을 살펴 교파주의, 개 교회주의를 배제하고 경직된 신앙과 교리적인 체질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을 말함이며 교회와 교인들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막힌 담이 무너져 빈부격차, 신앙의 편견과 독선이 지향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용은 공동체 형성을 위한 신앙적으로 다원화되는 중심에서 다양성의 원리라는 것에 유의함도 알아야 한다. 무엇으로도 인간의 양심과 믿음의 자유를 훼손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울교회 새 역사창립 후 2008년 희년에 서울교회는 희년에 대한 준비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 희년은 미래를 향한 이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로 회귀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희년은 화해와 관용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를 돌이켜 보고 본래의 자리에 서서 늘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희년을 맞는 교회는 열린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어느 교회이든지 개신교의 지난 역사와는 무관하지 않음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역사로 지내오면서 교조적인 신앙은 물론 지배내지 승리주의에 입각한 교회의 선교운동으로 사람들을 ‘세례’라는 과정을 통하여 해방시키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라는 틀 속에 맞추어 넣음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들기보다는 교회만을 위한 교회 인을 만들어 왔음을 보는 것이다.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면서 부동산 투자에까지 연관되어 온 교회는 신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자본주의를 토대로 하여 성장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과거 군사 통치 아래서 새롭게 역사의 눈을 뜨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교회는 역사 한 가운데서 민중과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60-70년대에 경제발전의 구호아래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노동자들의 모습 속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 속에서 예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 사회경제는 가진 자와 갖지 못 가진 자의 간격은 양극의 현상으로 상대적 박탈감으로 점철되어 전 사회에 모든 계층이나 간격을 뛰어 넘어서서 하나의 연대로 갈 수 있는 예수의 화해 외침은 하나로 연대 할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자신을 얽어매어 놓았던 한계와 규범과 전통을 뛰어 넘는 해방의 사건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곧 열린 교회의 모습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예언자적인 신앙과 그 실천이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희년의 신앙을 실천하는 자리에 관용의 입장도 놓이면 교회를 구조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희년이라는 시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보아야 한다. 희년은 서울교회에서 시작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이 안목으로 오늘의 교회로 퍼져 나가야 한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이름아래 자기 합리화, 기득권의 보장, 양적인 성장을 추구해 왔다면 이제는 열린 지평의 무한 세계에서 교회의 존재인식을 위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한다.

이제 지난 50년 동안 짊어지고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지나온 역사와 성서와의 관계에서 신앙하며 고민하여 왔던 것을 성서의 견해와 한국교회의 주변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돌이켜 보며 그것이 어떤 내용의 것이며 사실들의 상황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면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려면 그 동안 한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교회의 비중을 생각 아니 할 수 없다. 예컨대 한국교회가 끼친 문화사적인 공헌이 있다. 교회가 한국의 개화기를 형성했다. 교회는 광범위한 문화적 영역에서 상호적인 연쇄성을 지속해 왔다. 이렇게 성서의 내용은 인간의 삶 가운데 구현된 하나님의 구속적 사건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각 형태의 문화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형태인 문화에 변혁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구속의 의지가 구현되는 장으로서의 기능을 다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교회가 대외적으로 사회에 어떤 위치에 어떻게 부각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과거 한국교회는 국가적 민족적 유대 공동체를 통해 일해 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가 애국 애족의 정신을 배양하는 데 애국 애족의 얼과 용기의 거점으로서 민족사에 커다란 빛을 남겼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공산세계의 위협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적인 수난과 죽음을 이겨낸 역사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구현된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민족 해방이라는 구체적인 사건 가운데 이룩된 사건이다. 예수의 생애 가운데도 신학적으로 그가 하나님나라의 선포자라는 의식을 지니고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동족의식 또는 동족애가 기초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한국의 근세 역사는 교회사와 함께 애국사상을 입증할 만한 많은 자료가 있음은 이를 증명을 한다. 이것은 선교적인 차원에서 보더러도 하나의 살아있는 복음의 증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으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교회가 앞으로의 방향 모색에 이 나라 이 민족의 삶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해 왔는지를 알게 한다. 우리는 지난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안식처, 도피처로 생각하고 그곳에서 피곤하고 한(恨) 많은 삶을 달래곤 하였다.

그동안 교회의 신앙의식은 ‘은혜’ ‘축복’ 으로 슬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고통과 비애로 얼룩진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와 자비의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으로 다하였다. 그러나 남을 섬긴다는 것을 위해 몸으로 의를 위해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먼저 쉽게 그리고 빨리로 신앙내용이 바로 이 위로와 안식으로 하나님께 절실하게 의식하는 것으로 익히어 왔음을 경험하며 보아온 것이다. 사실로 성서에서는 위로와 안식, 용기와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 많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의로운 하나님을 말하는 것과 함께 그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함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서 희년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성장률은 세계교회가 놀라고 있다. 오늘의 세계적인 추세로 보아 교회가 팽창하도록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기적 일지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부피가 크고 물량이 많고 부하게 사는 것만으로 성장과 발전과 성공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삶이란 생(生)이다. 커도 알차게 크고 많아도 그 하나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씨의 ‘많음’이라야 하고 성공도 많은 일의 수(數)의 업적이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성사(成事)했느냐에 비중을 두어야 함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 삶은 많은 수치의 자랑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라야 함도알고 이제 한국교회는 서구의 이른바 ‘모교회’와의 종속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세계교회와의 동역자의 관계에서 유대를 유지하면서 선교 공동과제를 위해 협력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교회는 한 주님, 한 성령의 날개에서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에큐메니칼운동의 교회관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일방적인 발육 내지 비대현상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성(聖)과 속(俗), 신앙과 삶 등에 이원론적 생각의 문제 또는 복음화와 인간화의 양극화의 문제, 축복에 대한 획일적인 개념들의 문제들을 보고 교회의 설 자리를 알아야 한다. ‘서울교회 희년을 생각한다’는 희년의 자리매김을 위해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의식을 보며 알고 그 처방이 무엇 인지를 준비함으로 희년교회의 방향을 갖고자함인 것을 여기 밝혀둔다.
출처/배성산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