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종, 하나님의 종   (민수기 16:41-50 로마서 8:1-7)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역사의 의미는 우리 인생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우리의 인생에 견주어 보면, 이집트는 죄악된 우리의 삶입니다. 출애굽은 죄악에서 탈출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은 바로 우리의 현실의 삶이고, 목적지 가나안 땅은 우리가 가야할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축복을 주어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이 모든 준비과정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집트의 노예로서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족하기만 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현실의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원은 받고 하나님의 백성은 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못한 성품의 소유자로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면서도 여러가지 유혹을 받으며 많은 갈등 가운데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민수기 16장에는 한 반란 사건이 나옵니다. 반란 사건의 주인공은 ‘고라’라고 하는 사람인데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친사촌으로서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은 성막 봉사와 백성의 종교 교육에 대한 책임을 맡은 지파입니다.

고라가 생각하기에 자신도 사촌인 모세와 아론처럼 정치, 종교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250명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조직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반란의 이유: 모세에 대한 불신

반란의 이유 가 무엇일까요?

반란의 이유는 모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몇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라는 모세가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능력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백성을 지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역자 고라 일당이 노리는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라는 레위인이었는데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성전 봉사자들로만 머무르지 않고 직접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건을 대단히 불순한 사건으로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 아주 끔찍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켜서 고라와 그의 집과 모든 것을 땅 속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닫혔습니다. 그리고 고라의 반역에 동조하였던 250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내리신 불에 모두 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듯이 정치라는 것은 어차피 세력 싸움이요, 이합집산을 통해서 정권을 잡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이런 정치적 행위를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치적 행위가 죄악인 이유: 하나님을 향한 도전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에는 정치인이 단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모세를 향한 반역을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인간 모세를 대적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아니라, 모세에게 지도자 자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모세와 아론은 직접 하나님께 부름받고, 그 권한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자에게 대한 도전은 결국 인간적인 정치력의 쟁탈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력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민주주의냐 카리스마냐?

요즘 말로 하면 고라는 민주주의를 주장합니다. 고라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당을 형성합니다. 고라를 중심으로 모세와 아론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서 드디어 반역하는 일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과 한계가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고라와 그 함께 한 사람들의 죄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것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갔습니다. 분량 밖의 자랑은 교만이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이기심을 따라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 대신 오직 파멸이 기다릴 뿐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들은 정치력으로 신적인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거룩한 공동체 내에서 사악한 분파 의식을 조장하며 불의한 정치적 활동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계 질서를 정면 부정하고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입니다.



백성들의 반응

그러면 고라의 멸망 사건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반응은 어떻합니까?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반란자들이 죽자, 회개하기는커녕 모세와 아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원망합니다. 원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백성들은 이 문제를 단순한 정치적 분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들의 생명에 대하여 모세와 아론이 책임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둘째로 백성들에게는 지도자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었습니다. 사실 지도자에 대한 불신은 노예 근성 중 하나입니다. 노예는 주인과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주인이 노예에게 엄격합니다. 노예는 자녀나 친구와는 전혀 다릅니다. 노예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노예 역시 주인과 이해관계를 같이 할 수 없고, 감정적인 교류가 없습니다.

셋째로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건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다수결로 정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은 백성들을 향하여 또 다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을 순식간에 퍼뜨려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행동

이제 모세와 아론은 갑자기 닥친 전염병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 동분서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죄를 속죄하려면 제물을 잡아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지금은 워낙 긴급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으니까 모세는 제단에 있는 향불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 사이에 서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전염병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이렇게 급히 속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은 사람이 만 사천칠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과연 모세와 아론의 행동 방식은 백성들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한 행동은 위기가 오면 언제나 묵묵히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저들의 구원을 위해서 탄식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모세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사람들은 두 가지 타입의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오늘날의 역사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과 하나님의 종

사람은 어떤 영을 받았는가에 따라서 ‘세상의 종’ 아니면 ‘하나님의 종’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배워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인생의 해석법을 배워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세상의 종된 흔적과 세상적인 사고 방식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어딘가에 몰입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기 보다는 어떤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영의 종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로마서는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세상의 종과 하나님의 종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1.      정치력이냐 계시냐?

세상의 종은 사람들의 정치적인 힘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질문합니다. 세상의 종은 세력 균형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2.      원망과 소명

세상의 종은 현실의 불만에서 시작합니다. 현실의 불만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온실입니다. 원망이 모든 행동의 엔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소명이 하나님의 종을 움직이는 엔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세의 거짓말로 단정짓습니다. 모세가 왕이 되려는 의도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가난안 땅에 늦게 들어가는 것도 결국 그들의 범죄 때문이었는데도 이것을 모세의 거짓말로 단정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므로 영적인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3.      책임 전가와 책임 의식

세상의 종은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킵니다. 자기가 지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세상의 종들은 책임을 테니스 공과 같이 탁구공과 같이 서로에게 떠넘기기 바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책임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메시야의 책임을 감당하셨습니다.

책임을 전가해서는 문제가 해결이 되질 않습니다. 희생양만 만들 뿐입니다. 책임을 서로 지는데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부부 사이에 책임 소재를 가리고 서로 책임 전가를 해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모든 것이 당신 책임이니까 ‘아내 직을 사표내라 남편 직을 사표내라’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아이들을 향해서 모든 책임을 물어서 ‘아들을 사표내라’고 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책임 전가가 아니라, 함께 짐을 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4.      멸망과 속죄

세상의 종은 스스로의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명예나 이익보다는 타인의 속죄를 위해 일합니다.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게하고 그 사람의 명예와 권력을 빼앗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종은 세상의 사람들의 죄를 끌어 안습니다.

모세는 절대로 백성들의 일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꾸짓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만 구합니다.



5.      내세움과 순종

세상의 종은 자기를 내세웁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세상의 종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그 존재가 있는 듯 마는 듯합니다. 모세는 민족의 재앙 앞에서 개인의 자존심이나,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그 어떤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백성들은 모세의 마음을 조금도 편하게 해준 적이 없는 백성들입니다. 그 마음 속을 제대로 이해해 준 적이 없는 어린 백성들입니다. 모세는 그저 백성들을 어떻게 지켜나갈지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는 신앙,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에서 모세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님

모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악을 갚지 않으시고, 털깎는 자 앞에 선 양과 같이 아무런 반항도 없으시고 그냥 순종하시는 분입니다. 양은 죽기까지 단 한번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끝까지 순종하신 분입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 깨지고 찢어진 모습, 도저히 인간이라면 그렇게 될 수 없는 모습, 인간이라면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없는 모습이 되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명을 따라, 구세주의 책임의식, 속죄의 제물로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