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사무엘   (삼상 3:1~7)

5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날은 가정의 꽃이요 나라의 보배인 어린이를 예찬하며 축복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에는 어린이에 대한 많은 관심과 하나님의 큰 기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하였습니다(시 127:3).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가리켜 천국시민의 표본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8:3).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가정에 사랑스러운 자녀를 선물로 주시고 그의 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어린이들을 맡기셨습니다. 교회나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신앙의 인격자로 가꾸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인류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큰 재목으로 양성하여야만 됩니다.

본문 성경에는 사무엘의 어린 시절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이 사무엘에 얽힌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배출되기까지 그 과정과 배경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기도하여 받은 아이입니다.

사무엘은 일명 「기도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한나의 신앙적 기도로 얻은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아이는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 준다는 말이 전해오면서 여인들이 자식을 얻기 위하여 빌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도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서 애를 태웠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는 사무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 나오는데 처음은 엘가나가 브닌나를 통해서 자식을 얻게되자 이에 격분한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식을 달라고 결사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삼상 1:6, 10-11).

(1) 자녀 생산은 하나님의 축복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고도화되면서 사람들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영역을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그 중에도 생명공학의 발달은 자녀의 출산이나 양육과 성장의 제반과정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자칫 인간의 오만에서 빚어지는 더 큰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시편 2:4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자녀 생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사무엘상 1:5-6에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사무엘상 2:21에는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한나에게는 무자하고 그의 대적 브닌나는 자식을 갖게 되자 한나를 격동케하고 심히 번뇌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할 뿐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자식을 허락하시므로 3남 2녀의 많은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2) 기도의 여성 한나

사무엘상 1장과 2장에는 많은 부분 한나의 기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겪는 슬픔의 내용과 자식을 낳게 하여 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아뢰었고, 아들을 낳은 뒤에는 거기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용입니다.

한나를 가리켜 「기도의 여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운 환경이나 마음을 격동케 하는 말못할 사연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뢰었습니다. 사무엘상 1:10에 보면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원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깊이 있게 하나님께 매달렸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엘리 제사장이 술취한 여자로 착각하였습니다(1:14). 한나는 엘리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1:15).

성도가 어떤 일이나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되지만(빌 4:6), 특히 자녀 문제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맡기며 책임 있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자식 농사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마음대로 낳고 원하는 대로 키운다고 생각하는데 큰 착각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책임 있는 기도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딤후 1:5).

(3) 서원 기도와 실천

한나는 그가 처음 아들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11에 보면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하고 서원을 하였습니다(창 28:21-22).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자기가 답답하고 필요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실 때 자기도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께 서원한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만 됩니다(시15:4). 한나는 서원한 대로 아들을 낳게 되자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사무엘상 1:27-28에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고 하였습니다.

Ⅱ. 경건 생활을 훈련받은 아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를 어린아이로 비유하며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갈 4:19). 여인이 아이를 낳는 고통과 다름없는 수고를 하면서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도록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됩니다. 경건 생활은 훈련 없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딤전 4:7).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소양은 어린아이 때부터 바로 가르치고 심어주어야 됩니다. 잠언 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 나실인으로 구별했습니다.

나실인이란 모태에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서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민수기 6:2에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하고 그 규례를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서원한 당사자에게 포도주나 독주를 먹이지 않을 것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신 6:1-5). 이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로써 성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의 모범을 일러주는 내용인 것입니다. 레위기 11:45에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고 하였습니다. 사사시대의 인물인 삼손은 그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 태어났는데 그는 스스로 서원을 파기하고 삭도로 머리를 깎은 결과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삿 16:20-21).

(2) 하나님의 성소에서 자랐습니다.

한나는 그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삼상 1:27).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아이를 경건하게 양육하였고 젖을 떼자마자 데리고 올라가서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평생동안 헌신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삼상 1:28).
본문 말씀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매우 어렸을 때부터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갔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성소의 일을 수종 들었습니다. 막 젖을 뗀 유아기에서부터 소년기와 청년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궤와 더불어 성소를 떠나지 아니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생활원리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세상적 유혹에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자기의 소임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3) 하나님의 등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3절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엘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켰던 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졌고 영적으로 둔한 상태에 있어서 사실상 하나님의 등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대를 이은 젊은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불량자로 낙인 찍혀 있었습니다(삼상 2:12).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이 깨어 있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통한 작용이 멈춰지는 법입니다. 그 때는 제사장이나 선지자와 같은 특정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멸망하게 되는 불행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도 깨어 있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삼상 3:6-9). 그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대로 백성에게 선포하였습니다(삼상 7:3-4).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복이 됩니다(왕상 17:1).

Ⅲ.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은 아이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이가 나면 젖먹일 때부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섬길 것을 아이 때부터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했습니다(신 6:4-9).

어린 아이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되었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은 훗날 큰 인물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가 그런 인물입니다(출 2:1-3). 바벨론 포로지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단 1:8). 신약의 경우는 바울이 후계자로 중용했던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바른 신앙으로 길들여졌고 훗날 신약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딤후 1:5). 아이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없어서 안 될 요긴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켰습니다.

엘리 제사장 이후 이스라엘에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져버리고 배도의 길을 걷고 있던 젊은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한 채 몰락의 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는데 다급해진 이들 형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왔습니다(삼상 4:4).
그러나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전하여 홉니와 비느하스 두 제사장은 동시에 전사하였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군사에게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비둔한 몸으로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마침 그 시간 아이를 낳던 비느하스의 아내가 언약궤를 빼앗긴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가봇」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죽었습니다(삼상 4:17-22). 「이가봇」이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후부터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의 우상인 다곤 신전에 바쳐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배 아래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하고 구국선언을 하였습니다(삼상 7:3).

(2) 메시야 왕국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속사(救贖史)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후 족장시대와 모세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광야교회 시대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시대가 펼쳐지는데 가나안 입국 후 약 300년 간은 사사시대로 이때는 군웅이 활거하는 무정부 하의 암흑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사무엘이 등장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다윗 왕국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웠으나 그가 불순종하여 밀려난 다음(삼상 15:17-29), 다시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삼상 16:13). 이것은 찬란한 메시야 시대의 여명을 밝혀주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이바지한 일이 됩니다. 이 일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한 마태복음 1:1 말씀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의 근원자로서(요 1:2), 모든 영광을 홀로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입니다(빌 2:10). 그렇지만 주님 자신은 종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섬기는 자로서 생애를 살았습니다(막 10:45).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섬김의 도리를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사람이며 남의 종이 되는 사람을 오히려 으뜸이 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20:26-28).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제일 큰 인물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11).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야라고 추켜세울 때 저는 메시야가 아니고 다만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 하다고 하였습니다(막 1:6-7). 요한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두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여 섬기는 자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요 3:30).

여기 사무엘도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소위 킹 메이커(King maker)가 되어서 다윗과 그 뒤를 잇게 될 열왕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열어주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교회는 인물을 길러내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신앙적인 인물을 양성하여 하나님 나라와 인류역사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