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어머니 한나(삼상1:26-28)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제가 어떤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글 속에 나오는 "당신"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 밤에 고열로 아파할 때, 그 높은 산동네에서 나를 들쳐 엎고 택시가 다니는 곳까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던 당신…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 되었을 때, 다음날 빵과 우유를 각각 50개씩 싸와서 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던 당신, 난 당신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창피하게 학교까지 왜 왔냐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나의 그러한 태도에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의 미소를….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보이스카웃 여행을 갔을 때, 당신도 따라 왔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는 당신. 유난히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그런 당신에게 또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민망해 하는 어색한 웃음을….

우리 집이 그리 잘 살지 않았던 시절, 내가 그렇게 갈비를 먹고 싶다고 졸라도 사줄 돈이 없으셨던 당신, 하루는 그동안 모으고 모은 돈으로 나에게 갈비를 2인분이나 사주셨던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찬밥을 드시던 당신을….

내가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실망이 대단히 크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기죽을까봐 나보고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다독거려 준 당신, 그때 난 보았습니다. 당신의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서글픈 미소를….

내가 군대 훈련소에서 병원을 갔을 때, 조교 눈을 피해 몰래 당신에게 전화를 했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교의 눈에 들킬까봐 채 1분도 통화하지 못하고 끊어야 했습니다. 그때 난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얼른 들리는 당신의 흐느낌을….

내가 군대에서 고참에게 매일 워커발로 정강이를 채이고 나서 휴가를 나왔을 때, 당신은 내가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와 내 모습을 바라보시다가 우연히 나의 피고름이 흐르고 퉁퉁 부어 있는 정강이를 보았습니다. 난 자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 난 들었습니다. 당신의 소리 죽여 우시던 그 소리를….

내가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당신이 70 먹은 노인네가 되었을 때, 그때도 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걱정에 항상 마음 조릴 당신의 모습을… 그런 당신을 난 ○○○라 부릅니다."

그런 당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성경 속에 나오는 한 위대하고 경건했던 어머니 한나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옛말에 "범이 범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언제나 위대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쓰러져 가던 이스라엘을 바로잡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배후에는 한나라는 경건하고도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가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삼상1:1을 봅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때는 사사시대 말기였습니다. 사사 삼손이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는 이렇다할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틈을 타서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블레셋은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에 나오는 엘가나는 사무엘의 아버지입니다. 역대기서에 나오는 족보를 추적해 보면 엘가나는 레위의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레위지파는 바로 제사장 지파였습니다. 특별하게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사람이 바로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가나의 가정이 어떠했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나가 본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첩으로 브닌나를 두게 되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한 남자 아담과 한 여자 하와를 만드시고 짝지어서 가정을 이룩하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레위 사람으로서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당시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만 여호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실제는 그들이 어떠했습니까? 넘어가서 2: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중간에서 제물을 가로챘던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2:22을 보십시다.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한 특별한 인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한 특별한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 여성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한나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2:1∼2을 보십시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계속해서 한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진실로 아는 여성이었습니다. 경건한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의 경건했던 모습을 세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입니다. 둘째,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셋째, 그와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입니다. 한나는 이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경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나처럼 옆으로는 우리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밑으로는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아름답고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한나와 남편 엘가나와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삼상1:3을 봅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그 당시 실로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지만 그래도 엘가나는 매년 자기들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나는 믿는 남편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다는 사실은 한나에게 있어서 대단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남편이 믿지 않아서, 또는 아내가 믿지 않아서 이 시간 혼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경건하게 양육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믿는 남편을 가장으로 두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고 7절 말씀을 보십시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 자리에 언제나 한나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엘가나가 어떤 남편이었습니까? 시앗을 둔 남편이었습니다. "시앗을 보면 길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이러한 옛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에게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위선자,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당신이 실로로 간다면 나는 벧엘로 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앙탈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남편이 부족하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나는 자기 남편 엘가나와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에 보면 대통령의 아들들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들이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듣건대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영부인은 개신교 신자라고 합니다. 신앙이 서로 틀립니다. 그들은 주일이 되어도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아들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양육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남편에게도 우리의 아내에게도 부족이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만큼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이 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손에 손잡고 다함께 올라와서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고 엘가나와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도 역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엘가나는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들의 필요에 의해서 제물의 분깃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비록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한나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엘가나가 자기 아내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에게는 남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서 괴로웠지만 또 그 이상으로 더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브닌나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한나에게 심한 멸시와 천대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한나는 브닌나와 다투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의 첫 하갈을 어떻게 했습니까?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의 고통을 혼자서 속으로 삭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8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에게는 남편 엘가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 가정에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가 되고, 가족들 안에 서로 사랑함과 위로함이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언제나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가족들 상호간에 위로함이 있고 사랑이 있는 복된 모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한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한나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습니까? 그는 스스로를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 엘가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브닌나의 자녀들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누구에게로 가지고 나갔습니까? 그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제사장 엘리는 성전 기둥 곁에 의자를 놓고서 늘 그 위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그의 몸이 너무 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의자에 앉아서만 지냈습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자신의 코앞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지만 그 사실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늘 의자에서만 앉아 지내야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성전기둥 곁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성전 안의 모습은 환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잘 지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서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했습니까? 12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게 기도했습니다. 소리내지 않고 기도했다고 해서 대충대충 기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15절 끝부분을 봅니다.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그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주여,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옵소서. 주여, 나를 생각하시옵소서. 주여, 주의 여종을 잊지 마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하나님, 저에게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 아들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구했습니까? 시127:3의 말씀처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상급이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한나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까 나았지요. 다른 사람도 다 낳는데요 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녀로 인해서 감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다. 너야말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브닌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아들을 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그 아들을 바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아들을 구했습니다. 1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그 자녀를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자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언제나 기꺼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그는 속이 상한다고, 마음이 슬프다고 해서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술 취한 줄 알고 책망했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항변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을 하나님의 종으로 공경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아뢸 뿐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숙하고 덕망있는 여성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나는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그의 얼굴에 다시는 슬픈 기색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이 기도한 그대로 응답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한나는 그에게 아들을 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셋째, 한나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아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아들을 구했습니다. 넷째, 한나는 정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20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가 사무엘을 안고서 그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또 아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아들을 내게 주셨구나!"라는 마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급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구나!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한나와 그 아들 사무엘과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엘가나는 사무엘을 낳고 난 뒤에도 관례대로 매년 그의 가족을 데리고 실로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한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22절입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는 사무엘을 돌보기 위해서 실로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로 귀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무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역이요, 봉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 보다도 아들 사무엘을 잘 양육하는 것이 훨씬 더 귀한 봉사요, 소중한 사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남편 엘가나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23절 말씀입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남편 엘가나는 아내 한나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엘가나는 이해심이 많은 남편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무엘이 젖을 떼었습니다. 아마 사무엘의 나이 약 3세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24절 이후에 보면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한 그대로 아들 사무엘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혈육의 정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일이 위대한 신앙이었다면, 한나가 갓 젓뗀 그 아들 세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것도 역시 위대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나와 엘가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자기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서 아들에 대한 관심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2:18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한나와 엘가나는 그의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잘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될 일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하나님은 한나에게서 사무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받기만 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무엘 이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괴로워했던 한나였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돌보아주셔서 잘 자라게 하셨습니다. 2:26의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넘어가서 3:19의 말씀을 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임지시고 잘 돌보셔서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법궤를 들고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들 자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서 엘리 제사장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온 가족이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하고 자기의 아들들을 바르게 키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수원의 과일이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과원지기의 속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녀가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열 자녀를 키웠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면 부모는 헛수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학·박사 갖추게 만들어 주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뜻깊은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경건한 어버이의 본이 되는 한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든 부모들도 한나처럼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랑하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늘 아름다운 본을 보일 수 있는 귀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바로 잡았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은 경건하게 믿음으로 잘 자라서 부정과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져 가는 이 사회를 바로 잡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