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이삭 (창 22:1~13)
-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여러분, 영상 『아버지란 누구인가?』잘 보셨습니까? 지난 주간 3040 수련회 때 본건데 너무 좋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보신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뭉클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혹시 어머니 사랑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하나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어머니 이야기는 아주 많은데 비해 아버지 이야기가 적어 한번 소개해 본 겁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그 큰 사랑에 관해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까 결단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버이주일이 되면 늘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매년 설교 하다 보니까 밑천(?)이 딸려서 힘듭니다. 새로운 내용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그건 사소한 이유이고, 정말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하나님이 꼭 이러실 것 같아요. “야, 너나 잘해라!” 그래도 피할 수 없기에 오늘도 회개하는 심정으로 효도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으로 저도 여러분도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효도 계명에 충성하리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이삭의 효(孝)

본문은 여러분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흔히 ‘이삭 희생 제사 사건’이라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외아들 이삭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아브라함이 120세 가까이 됐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10대 청소년이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이 듬직하게 자란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대견하고 흐뭇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황당한 명령을 내립니다. 2절 보니까,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그것도 복장(腹臟)을 내지르듯 뭐라고 말합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그 황당한 명령에 순종합니다. 3절 보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납니다. 3일 만에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는 정말 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놓고 칼로 내리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급히 제지시킵니다. 이미 바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신앙 테스트에 당당히 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에 초점을 맞춰 해석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신앙도 대단하지만 이삭의 신앙도 대단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100세가 훨씬 넘은 노구입니다. 이삭은 10대입니다. 어떻게 혼자서 그를 들어올렸겠습니까? 아마 결정적인 순간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겁니다. “얘야, 하나님이 이러 이러하게 명령했단다. 그러니 우리가 순종해야 되지 않겠니? 하나님이 너는 아주 죽이지는 않을 거야 ... 무슨 뜻이 있겠지 ... ” 히11:17~19 보면 짐작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

만일 이삭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아버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치매 걸리셨나?
망령 들었나? 그렇게 생각했겠죠. 저항하거나 밀치고 도망치거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제단 위에 묶였다는 기록을 통해 그가 묵묵히 순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절~10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제단 위에 올라가 드러누운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묶인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인 동시에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효도의 표현인 것입니다. 아무리 효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엄청난 일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한 겁니다. 노인이지만 그를 치매 걸렸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공경한 겁니다.

그의 효심은 다른 구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창25:20 보면 그가 결혼한 나이가 40세입니다. 요즘도 그 나이면 노총각인데, 당시로는 늦어도 한참 늦은 겁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독신주의라서? 아닙니다. 단 한 가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믿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그런 겁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큼 이삭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실로 효자 중의 효자입니다.

[2] 효자 이삭에게 내린 축복

이처럼 효자인 이삭을 보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그 후 이삭의 생애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를 무척 기뻐하셨고 크게 축복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창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 ”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 ”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의 도리 중 가장 큰 것이 부모 공경입니다. 인간의 기본 도리인 십계명(출애굽기 20장) 중 다섯 번째가 부모 공경입니다. 순서 상 다섯 번째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으뜸입니다. 1~4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10 계명은 사람에 대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모 공경의 계명을 이렇게 해설합니다. 엡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첫 계명’이라는 말은 바로 사람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요 가장 중요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약속 있는 계명’이란 모든 계명 중에 축복의 약속이 붙어있는 계명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모 공경의 계명이 너무 중요하니까 인센티브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포상 제도인 셈입니다.

반면에 부모 공경의 계명을 어기면 큰일 난다고 경고하십니다. 축복 대신 저주와 징벌이 임합니다. 성경은 너무 많은 구절들을 통해 경고합니다. 그 중 두 구절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종교개혁자 J. 칼빈은 이 말씀을 현실 속에서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제네바에서 목회할 당시 시의회에서 제정한 법률 중 부모에게 구타한 사람은 사형시킨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아버지의 뺨을 때린 10대를 실제로 사형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보고 J. 칼빈을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성경의 원리대로 한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제일 좋은 길이 있습니다. 로또 복권 사는 것보다 더 좋고, 세상에서 빽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효도하는 겁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자신의 복된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효도하다 복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도 정말 귀한 효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앞에 서면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형편없는 불효자 같아서 말입니다. 그분들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 자손들도 잘 됩니다.

효도하다 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리죠. 여러분도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중병으로 위급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급히 의사를 모시러 가는데 탈 것이 없어 말을 타고 갑니다. 최대한 빨리 갔다 왔지만 이미 어머니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린 가슴에 결심을 했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탈 것을 만들어서 자기 어머니 같은 불행한 일이 없게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 집념이 그를 자동차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쇼핑백을 발명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효성이 지극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배달 다니는 어머니를 보고 그 소년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릴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종이로 가방을 접었습니다. 편리하고 가벼운 종이 백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어머니의 수고가 덜어졌을 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 큰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가 1887년이었고, 그 소년의 이름은 찰스 스틸웰입니다.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증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복된 인생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3] 구체적인 효도의 방법

효도의 기본은 무엇보다 부모 봉양일 겁니다. 어릴 적에 나를 낳으시고 키워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의식주 문제를 도와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것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만 하는 것으로 효도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공경과 순종입니다. 그리고 공경과 순종이 잘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인 용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자식들로부터 효도 받고 싶은 이상으로 효도해야 됩니다.

 ① 공경 :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작아 보입니다. 오히려 자식이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모들과 비교해서 미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부모를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공경해야 됩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늙은 아버지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모리아 산에서 순순히 따른 게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전 대통령 링컨의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그가 당선된 후 상원에 가서 취임 연설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평범한 가문 출신이므로 귀족들인 상원의원들이 배알이 뒤틀렸습니다. 다리를 꼬고 박수도 치지 않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링컨에게 비꼬는 말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어쩌다가 대통령 됐지만 늘 기억하시오. 당신 아버지가 우리 집에 드나들며 구두 만들어주던 사실을 말이요. 아마 여기 여러 사람이 당신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을 거요.”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소. 우리 아버지는 제화공이었소. 나의 아버지는 멋진 예술가였소. 세상에 그분보다 구두를 더 잘 만드는 사람은 없을 거요. 내가 그분이 구두 잘 만드는 만큼 대통령 직을 잘 감당할지 모르겠소. 혹시 여러분 중에 구도가 잘 안 맞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가져오시오. 나도 아버지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이 있으니 기꺼이 수선해 드리겠소.” 그랬더니 좌중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어떤 모습이든 부모라는 사실 그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 받을 만한 것입니다.

 ② 순종 : 부모님이 연로해지면 말씀하시는 게 젊은이들 생각과 다른 게 많습니다. 그래도 중심은 자식을 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종해야 됩니다. 그래도 실천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예~ 알겠습니다.” 이러게 대답이라도 해드려야 됩니다. 이삭은 죽기까지 순종했는데 그 정도도 못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어느 부자(父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연로하신데 신식이라 인터넷을 뒤져 수시로 자료를 프린트해서 아들 목사님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설교 준비에 도움을 주신다고 그러셨겠죠. 그런데 하나도 쓸 게 없다는 겁니다. 감각이 서로 다르니까 당연하죠.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용하든 안 하든 일단 “예, 감사합니다.”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게 부모님께 순종하는 겁니다.

 ③ 용서 : 많은 분들이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과 공경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편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 받은 상처를 가슴에 담고 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건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의외로 부모로부터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가정사역 연구소에서 20대 기독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는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으로 아버지를 지목한 청년들이 40.7%, 어머니로 지목한 청년들이 32.1%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대부분 오해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비정한 부모들도 가끔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형편이 안 되는 경우,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한 경우, 혹은 사랑하지만 잘못 표현한 경우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 충분히 용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를 낳아주신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육신적으로 태어났으니까 예수님을 믿고 천국 영생을 얻은 게 아닙니까?

어느 상담가의 상담 사례를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여자 분이 너무 괴로워서 상담을 받는데, 내면에 있는 응어리가 하나하나 나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게 남아서 수십 년 후까지 계속 괴로움을 주었던 겁니다. 아버지가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며 중학교 진학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퇴했고, 집에서 일만 부려먹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런 대로 살 만큼 됐는데도 계속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삼당가가 권면했답니다. 아버지의 무지를 용서하라고.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무지해서 그런 거니까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결국 치유를 받은 거죠. 또 한 가지 사례는, 17년 동안 남편과 시어머니 미워한 주부입니다. 그는 늘 삭신이 쑤시고 옴 몸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치료도 안 되고, 하루에 진통제 몇 알씩 먹으면서 버티는 겁니다. 1년이면 1천 알 이상 약을 먹고 근근이 사는 셈입니다. 자신은 그 원인이 남편과 시어머니 때문에 산후조리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시어머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상담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이야기해 주면서 용서할 수 없냐고 하면서 설득했고 결국 눈물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그 아프던 모든 게 싹 나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악한 원수들도 용서해야 되는데, 어찌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도 해 준 게 없을지라도 낳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④ 받고 싶은 대로 효도하기 : 사람은 다 이기적입니다. 받는 것은 좋아하고 주는 것은 잘 못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받고 싶은 대로 당신의 부모에게 하시오.” 이 말은 예수님의 황금율과 같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는 자식에게는 효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부모에게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순입니다.

창피하지만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어제 5월 8일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매년 그래도 손수건 한 장이라도 선물했는데, 아침에 아무 소식이 없어요. 이상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큰 아이는 고3이니까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오니까 그렇다 쳐도 둘째 놈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교회에 있는데, 휴대폰으로 문제 메시지가 왔습니다. 미처 선물을 준비 못해서 미안하다며 몇 마디 적었더라고요. 순간 섭섭한 마음이 풀리더라고요.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하냐?” 이게 부모 마음이죠. 별 것 아니지만 자식이니까 사랑 받고 싶은 겁니다. 남 같으면 아무 기대도 안하죠.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온 효자이면 자식은 반 효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식에게 효도 받고 싶으면 두 배는 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고 싶은 만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배은망덕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딤후3:1~2, 롬1:21 참조) 어떤 노인이 자식들이 하도 구박하니까 대들 힘은 없고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저는 안 늙나?” 오늘 우리가 어른들에게 대하는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임을 잊지 맙시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이삭처럼 죽기까지 효도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흉내라도 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상히 여겨 주실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임금님이 민정 시찰을 나갔답니다. 한 마을을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모여듭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임금님 얼굴 한번만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업고 나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다가 임금님 눈에 띄었습니다. 임금님이 사연을 듣고 효자라며 칭찬해 주고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소문이 주변 마을까지 쫙 퍼졌습니다. 다음 행선지인 옆 마을에 불효자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 소문을 듣고 상 받을 욕심이 생겼습니다. 멀쩡한 노모를 업고 길목을 지켰습니다. 임금님이 보고는 이 근방에는 효자가 많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 가리키면서 저거 순 쇼라며 비난합니다. 그 말은 들은 임금님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껄껄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효도는 너무 좋은 것이니까 흉내 내는 것도 좋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효도는 흉내 내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고 부모님과 주위 어르신들을 잘 모심으로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복되고, 자자손손 복을 누리는 승리의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