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좋은 부모입니까? (사무엘상 2장12~34절)

요즘 TV를 틀면 열흘가까이 빠지지 않고 계속 나오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 재별회장이 아들을 위하여 보복 폭행을 한 사건입니다. 자기 아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서 맞았다는 말을 들은 회장이 깡패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때리고는 그 사람들을 꿇어앉혀놓고는 아들에게 “네가 맞은만큼 패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검찰에서는 완전한 증거를 잡아서 고발고치를 하려고 한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뭔가 자식사랑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부모님들의 이그러진 부모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성이 있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누구에게 돌을 던질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부모들의 모습이 이런 식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자녀들을 굉장히 잘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자녀들이 적습니다. 저출산국입니다. 한 가정당 1.17명을 낳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줄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 안에서는 많은 자녀를 생산하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1960년 대, 저희들이 학교 다닐 때는 8천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버글버글했습니다.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습니다. 저학년들은 한반에 60명씩 해서 일찍 돌아보내고 오후에 또 다른 반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래서 표어가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였습니다. 이게 정부에서 만든 구호입니다.
1970년대 들어오니까 “아들 딸 구분말고 둘만낳아 잘 기르자” 그다음에는 “한 집 건너서 더 낳자”였습니다. 요즘은 광고 안해도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입니다. 자식에게 목숨걸 일이 어디있느냐고 하며 낳지 않습니다.
부인들이 직장에 나가지요. 아기생기면 직장생활 못하니까 자기들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소중한 아이들이 한국에는 얼마나 줄어드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유아세례를 했는데 두명밖에 못받았습니다. 30명, 40명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앞으로 20년,30년 후에는 대학교육 걱정이 없습니다. 낳아놓으면 자기 학교에 보내달라고 싹싹 빌겁니다. 회사에서도 일할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국가의 미래가 걱정이 되고 교회의 미래도 걱정이 됩니다. 또 지구촌의 미래도 걱정이 됩니다.
자식을 적게 낳고 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자식양육에 목숨을 겁니다. 자녀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어릴 때부터,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80만원, 100만원 짜리 영어학원에 보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상태입니다.
전부다 부모들이 다섯 살, 여섯 살 아이를 그런 곳에 보내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불안해서 견디질 못합니다. 여기에 엄청난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자식이 잘 되도록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부모가 좋은 자식을 만든다는 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 자식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귀한 사람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부모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자식을 좋은 학교, 좋은 곳에 보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자녀, 훌륭한 자녀를 만들고 싶다면 부모들이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자신을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데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오늘 이 나라 자녀교육의 문제점이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지 아니하고 모든 양육을 가정밖의 교육기관에 맡긴다는 겁니다. 사교육에 맡깁니다. 비극입니다. 고등학교, 심지어 중학교까지도 공교육은 이제는 완전히 사멸되어 있습니다. 기능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좋은 학원에서 밤새껏 공부하고, 학교에 와서는 쿨쿨 잡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야단치지 않습니다. 우리학교에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됩니다. 간섭하지 않습니다. 간섭했다가는 부모들이 야단입니다. 그 아이 깨우면 큰일 납니다. 공부시간에 자는 아이 깨웠다가는 부모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희안한지 회사까지 부모들이 전화를 합니다. 자녀가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엄마 인사과에 전화해서 “우리 아이는 지방에서 일할 체질이 아닌데요” 지금 이 정도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가정에서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부모님의 좋은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국가적으로 볼 때 엄청나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학원에서 누가 사람을 가르칩니까? 제대로된 인간교육은 결단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앉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좋은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가 최고의 선생님입니다. 부모가 최고의 제사장이요 목사입니다. 누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신앙교육해야지 교회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만 믿고 의존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해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교육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따라합시다. “네 자녀는 부모가 가르쳐라” 이게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네 자식은 네가 책임져라! 어느 누구도 내 자식을 바르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책임지라는 겁니다. 가정은 자녀교육의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이것을 간과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의도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이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는 부모와 자녀, 두 가정이 등장합니다. 한 가정은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 가정인 대제사장 엘리의 가정입니다. 그 두 아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또 한 가정은 보편적인 레위지파의 보편적인 가정입니다. 엘가나와 한나와 그의 아들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전장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습니다. 그냥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죽습니다. 그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아들이 법궤를 빼앗기고 두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자에서 자빠져 문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부인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성경학교는 추측하길 엘리 제사장의 부인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엘리 제사장은 엄마없는 이 불쌍 아들들을 잘못된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지 않았는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 가문이, 대제사장이요 사사인 가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그 가정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한나의 가정을 보세요. 한나는 결혼을 했으나 아들이 없어서 너무나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합니다. 둘째 부인이 아들을 낳아서 유세를 하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한이 맺혀서 어느날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게도 아들을 주십시오.” 그러면서 그냥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상 1:11에 보면 한나는 서원하면서 아들을 달라고 했습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내게 아들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한나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때가되면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없다가 그 귀한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젖을 떼자마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귀한 아들을 실로의 성전에 데려가서 엘리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여러분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결단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많이 실패하는 경우가 인정에 무너져서 실패할 때가 많이 있지요. 정말 위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언제 효도하는지 아세요. 사실은 태어나서 돌 지나서 아장아장 걸으면서 엄마, 아빠할 때가 제일 예쁘답니다. 그 이쁜 것을 떼놓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에 그 이쁜 것을 떼놓는 거예요. 이게 한나의 믿음입니다. 내가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라면 더 잘 클 것이다. 약속한 것을 지켰습니다.
이런 믿음의 어머니로 인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복되게 성장합니다. 18절을 같이 읽고, 26절을 읽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성장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사무엘상 3:19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자라나는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이제는 청년이 되었는데 그 입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선지자입니다. 그는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국시대가 시작되는 그 과도기에, 그 혼란한 시기에, 영적으로 굉장히 타락한 그 시대에 사울왕을 세우고, 다윗왕을 세우고 새역사를 이루는데 가장 존귀하게 쓰임받는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치 않습니까?
사무엘상 25:1에 보면 사무엘이 드디어 죽게됩니다. 죽게되는데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모여서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귀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온 백성이 사무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사무엘의 죽음을 애도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주변의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아 저분이 죽었다”고 온 성도들이 애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그의 비행을 알기 때문에 뭐라고 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치셨다. 잘 죽었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는데 백성들이 돌아서서 하는 말이 “잘 죽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엘리는, 이스라엘의 최고 위치에 있는 엘리제사장이 얼마나 그 두 아들을 잘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대제사장이요, 사사인 그가 두 아들을 교육시키는데 아마 최고의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교육을 받는다고 귀하게 쓰임받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두 아들은 죄를 많이 짖고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사무엘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약속대로 하나님께 바쳤는데 그 결과 사무엘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 하나님의 위대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왜 엘리의 두 아들과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이렇게 큰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줄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백하게 보여주잖아요. 명문가문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엘리의 가정은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보편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무엘은 위대한 지도자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정의 자녀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모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축원합니?.
오늘 한국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볼 때 부모들이 깨어나고 각정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줍니다. 왜 엘리의 두 아들들은 그렇게 되고, 한나의 아들은 그렇게 위대하게 되었느냐?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아버지의 책임이다. 어머니의 책임이다.”는 겁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을 어떻게 키웠습니까? 2:12을 보시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신앙교육을 바로 시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신앙교육 실패하면 인생 실패합니다. 2:12-17에 두 아들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드려지기도 전에 생고기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고기를 가져오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쌓습니다. 17절에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얼마나 잘못 되었습니까? 2:22에 보면 회막안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여인들과 회막안에서 동침을 한 두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백성사이에 퍼졌습니다. 엘리의 귀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성경을 보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 엘 리가 어느 정도로 책망하고 있는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잘못되고 비뚤어진 부모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여기에 문제점이 뭐냐하면 너무나 너무나 잘못하고 있는 그 아들들에게 엘리 제사장은 적당하게 넘어갑니다. 이것에 결정적으로 아들을 망치는 아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생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제사드리는데 들어가지 마라” 금족령을 내리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여서 만방앞에서 그 아들을 책망하고 그 아들을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족쇄를 채워서 훈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도 없이 자란 아이 불쌍해서 “애들아 그러면 안된다. 하나님이 좋아 하지 않아”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더라는 겁니다. 애비가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이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2:29에 결정적인 엘리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핵심적인 엘리의 잘못은 하나님보다 두 아들을 더 중히 여겼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여, 정말 마음속에 깊이 세겨야 합니다. 엘 리가 자식들을 왜 잘못 교육시킬 수 밖에 없었느냐? 중심에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어떤 것도 쏱아서 부어주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얼마나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 사는 겁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해요. 그런 정신 때문에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그 근본적인 잘못된 정신 때문에 엘리는 아들들을 바르게 가르치지를 못했습니다. 엘리의 잘못된 자식 교육이 아들들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앞에 약속하고 서원한대로 자식을 떼어놓습니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깁니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겨서 하나님이 한나를 존중해 주시고, 그 아들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시고 존귀한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믿음으로 아들 사무엘을 가장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한나는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이 복을 받고, 아들 사무엘도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을 받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합시다. “부모님은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거 한가지 원리를 꼭 아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을 복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복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걸 여러분이 놓치지 말자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때 그 복이 자녀들에게 내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다 커도 쾐찮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부모로 변화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죽어서 무덤속에 들어갈 때 자식들이 그 무덤앞에 와서 훌륭한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손주들을 데리고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떤 분이였는가를 말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수록 더 좋은 부모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이걸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30여년 전에 서점에서 책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라는 책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복이 있는 것은 대통령이 많이 나왔는데 그분들의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아보니 전부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대통령마다 그 어머니들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기록해서 만든책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다 읽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습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왔다는 겁니다. 록펠러도 그렇게 고백하잖아요. “나는 내 어머니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계 갑부가 된 것 내 어머니의 신앙때문이니다.” 에브라함 링컨도 낡아빠진 성경책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것은 내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책입니다.” 그것도 둘째 어머니입니다. 생모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분도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계모가 들어오셨는데 그 어머니도 너무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링컨의 전기 작가는 “링컨이 물려받은 것 가난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인간이 잘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링컨에게는 좋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링컨을 세계적인 위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분들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가정으로 손꼽히는 가정은 고광림박사 가정입니다. 부인은 전혜성박사입니다. 교육학자입니다. 이 가문의 여섯명의 자녀들이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을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아들 고홍주씨는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인권차관보라는 동양인으로서는 가장 놓은 자리에 임명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학장으로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너무나 훌륭하게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이 부부는 자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남과 사회에 보탬이 되라” 늘 집에서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녀들이 공부하고자하는 귀한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는 자녀교육하면 떠올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신사임당. 율곡 이이선생을 가르친 신사임당. 좋은 어머니, 훌륭한 어머니 상도 신사임당 상이라고 수여하지 않습니까? 그 좋은 어머니가 좋은 자녀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녀교육은 세상의 어떤 좋은 선생보다 좋은 부모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부모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좋은 자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가슴속에 세겨서 정말 내가 먼저 변화되고 더 좋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끝까지 아름다운 영향을 미치고 자자손손이 좋은 믿음의 유산이 물려져서 훌륭한 가문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과 쓰임받는 복된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귀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출처/최낙보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