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사랑 (룻1:6-17)

늙은 죄수는 나중에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했습니다. 충분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을 한 것입니다. 그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거나, 나중의 반성하는 모습을 볼 때,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문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일반적 문제를 짚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곧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두어진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무게 중심이 자신에게 두어지는 것과, 이른바 자기중심성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미묘한 차이를 지닙니다. 사람의 자기중심성을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보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든 남녀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무게중심이 타인에게 두어질 수 있는 겁니다.

   사과나무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이 과수원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알도 굵고 맛있는 사과가 재배되었습니다. 이웃 과수원의 농부가 그 비결을 묻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처음 나무를 심을 때, 활짝 피어날 것을 기도한다네. 그리고는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모두 이름을 붙여, 틈틈이 이름을 불러  주지. 진심으로 애정을 실어 정겹게 이름을 불러 준다네.”

   이 과수원 주인에게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곧 좋은 사과를 산출하여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사과나무에게 이름을 불러 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늙은 죄수가 새의 꼬리와 날개깃을 잘라 놓은 것과, 이 농부가 진심으로 애정을 실어 사과나무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 주는 모습은, 그 느낌이 아주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는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두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게중심이 상대에게 두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는 새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사과의 풍성한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런 겁니다. 첫째 자기중심성이 필요하되,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둘째 그 연장선상에서 상대방에게 무게중심이 두어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상대방에게 무게중심이 두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그것이 가능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옛날 유대에 어떤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땅에 기근이 들게 되어, 부득이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타향땅에서 죽게 됩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홀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모두 혼인시켰습니다. 물론 며느리들은 모압 사람입니다. 며느리의 이름은 각각 룻과 오르바였습니다. 그렇게 십 년쯤 살았는데, 두 아들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게 된 것입니다. 그래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 이렇게 세 식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자 며느리들도 따라 가겠다고 나섭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말합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라.” 그러나 며느리들은 큰소리로 울면서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립니다. 그리고는 며느리들을 다시 설득합니다. 마침내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시어머니는 거듭 설득합니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와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하지만 룻은 절대 그럴 수 없고, 죽음이 자신! 과 어머니를  떼어놓기 전까지는, 결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를 비교해 봅니다. 시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오르바도 시어머니를 따라갔을 겁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를 떠나갑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동행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시어머니를 사랑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내용이 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표현을 빌리면, 오르바의 사랑은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두어진 것이고, 룻의 사랑은 무게중심이 시어머니에게 두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르바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무게중심을 말하는 겁니다.

   나중에 룻은 시어머니의 인도를 따라, 보아스라는 남자와 재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는데, 그가 유명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곧 이방인이었던 룻이, 유대의 위대한 가문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훗날 나오미는 며느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 라고 말입니다. 바로 무게중심이 시어머니에게 두어진 사랑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요즘 우리가 보아도 참 아름다운 고부관계였습니다. 나오미도 며느리에게 무게중심이 두어진 사랑을 며느리에게 하였고, 룻도 시어머니에게 무게중심이 두어진 사랑을 시어머니에게 한 것입니다. 무게중심이 상대방에게 두어진 사랑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 결과 하늘은 룻에게 큰 복을 내리신 것이 아닐까요?


사랑은 복된 일이고, 또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게중심이 상대방에게 두어지는 사랑, 그것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사랑입니다. 향기로운 사랑입니다. 하늘은 바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축복하십니다. 그런 사랑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우주를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과수원 농부의 사과나무에 대한 사랑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우주를 운행하시고,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복된 열매를 맺도록 우주를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늙은 죄수의 경우, 만약 그가 새를 그냥 두고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너무 아쉽고 아픈 일이라 하더라도, 새의 자유를 생각하며 그렇게 하였다면 말입니다. 하늘은 그에게 뜻밖의 행운을 안겨주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우주를 운행하는 분이 아닐까요?



상대방에게 무게중심이 두어지는 사랑,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중심성을 가지면서도, 무게중심이 상대에게 두어져야 하니까 말입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자기사랑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사랑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사랑을 하면서도, 동시에 무게중심이 상대에게 두어지는 사랑을 하는 길입니다.


마치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것과 같은 그 길,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그 윤곽을 또렷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방향을 정확히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꾸준히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잘 안 되더라도, 그 때마다 자기성찰을 하며 방향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애써 걸으려는 사람을, 그리고 하늘의 도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지원하지 않으실까요?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귀한 향기로운 사랑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을, 흐뭇한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으실까요?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 용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 살에 그는 열네시간을 기 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 시간을 기 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 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 顫홱謀求? 얘기입니다. 쉰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 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 만은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 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은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인인 맥아더 장군,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십시 오."라고 말이 시작되고 긴 기도문 이 있고 맨 마지막 말이 인상적입니 다. "그리하여 나, 그의 아버지는,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 다' 라고 속삭이게 하여 주십시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유 명한 이야기입니다. 난 늘 이게 기억이 됩니다. "그리하여 나로 '한 생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게 해 주십시오."<>보람과 의미가 바로 그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어쩌면 남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세계를 위하여 위대한 일을 많이 했지만은 그건 그렇고 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한국 사람은 역시 한국사람이기에 한국적 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것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다분히 유교적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가 젖었으니깐 그 속에서 가지는 생 각입니다만은 소위 한국적 효가 무엇인가 한번 정리해 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우리 문화 속에서 생각하는 효도, 첫째가 부모님을 장수 하도록 모시는 겁니다. 이유야 어 쨌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식에게 있겠습니까만은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건 자식 탓이요, 그래서 자식은 죄인이 됩니다. 내가 잘못 모셨고, 내가 속을 썩여 드렸고 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 례식에 가 보면 제일 많이 우는 자식이 불효자예요. 나 때문에 돌아 가셨다고 가슴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상복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 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오래 살도록 모셔야 효자지 어쨌든 일찍 돌아가셨다면 자녀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것이 바 로 한국사람의 효의 기본개념입니다.<>두번째는 편안하게 모시는 겁니다. 그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또 거처하는 곳, 평안하게 특별히 마음을,  평안하게 모셔?! ?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들이 이제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그? 【?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식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하 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세 마디가 있는데, 첫 째가 뭐냐 하면 어떤 일이든지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발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 거든요. 아프다고 하면 자녀들이 귀찮을 까봐, 자녀들이 걱정할 까봐 아프다는 말하는 거 그렇게 싫다는 거예요. 어떻게든지 안 하고 싶은 데 그러세요.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이에요. 자식을 괴롭힐까봐…….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사실은 외로워요. 자 식이 아무리 많아도 외로운 건 외로 운 거죠. 그러나 내가 외롭다고 하면 저들이 뭔가 어머니를 잘못 모셔서 외롭다고 하지나 않나, 할까봐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외 롭지만은 외롭다고 못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배고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또 어 느 때 좀 궁진해서 뭘 잡숫고 싶어도 혹시라도 귀찮게 여기지나 않을 까 해서 배고프다는 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이요 조심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입니다. 이제 이분의! 마음속에 슬픔을 드리고, 고통을 드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또 한국적 효도의 세 번째 개념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에요. 요새 세계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비혼이요, 둘째가 불임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로마 카톨릭 교황까지도 나서서 제발 자식들 낳으라고 아주 사정을 하드만요. 자꾸 인구가 주니까요. 바로 이것이 망조입니다. 효도요? 누구든 좌우간 시집, 장가 안 갔으면 불효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 또 갔으면 또 이제 뭐 어찌 못 낳는 거는 할 수가 없을지 몰라도 자식을 안 낳는 거 그거 불효입니다. 그런 줄이나 알 고 사세요. 그런데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의 마음은 그저 이유 불문이야. 자기가 한평생 고생했어도 그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아들, 딸 낳고서 그 손자, 손녀를 품에 안 겨드리는 거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그리고 무슨 공부 많이 해 가지고 큰일하겠다고 밖으로 나도는 거 부모님의 마음 반갑지 않아요. 효도는 시집가야되요. 그리고 가서 자식을 낳아 이게 효도라는 거, 이게 한국적 효입니다. 또 하나 는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거지요. 그래 옛날에는 ?! 解타? 보는 일이 있었지요. 가서 과거에 급제 하면 효자요, 허구헌날 낙방? 玖? 불효자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도 안 돼.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지요. 그래서 오늘도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하면은 그 아버지 어머니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우 리 아들이 공부……. 어디 가서 뭘……",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효도라는 거예요. 그런데<>"제 아들 이요 삼수했는데 두고 봐야 알겠어 요."<>이거는 불효라고요 이렇게 되 면 그러니까 가문은 명예는 높여 드리는 것이 그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개념으로 집약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즐겁게 해 드려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 드리라고 말 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이 효도일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 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 을 떠나서 개성을 좀 방문하게 됐습니다. 개성에 거우동을 하게 됐는 데 온 방에 방을 부치고 소문이 나 니깐 어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라 임금의 이 나라의 백성?! 막關? 한 번 도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뵙지를 못 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 이다."<>그랬어요.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그날을 기다렸다가 오 십리길을 어머니를 업고 거기 길가 에 나가 섰습니다. 그래서 임금님 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이렇게 해 드렸어요. 임금님은 멀리서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그 때에 그 어 머니를 업고있던 그 사람 좀 불러들여라."<>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나서<>"너는 효자다."<>그래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다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 나가서 왕을 뵈었다는 겁니다.

왕은 역시 또 불러서 상을 <>"금 백냥을 주라"<>그랬는데 신하들이 말하기를 <>"임금님이여, 그놈은 불효자랍니다. 효도가 아니고 남이 그렇게 해서 돈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이거 상 받으려고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줘야 될 것 같습니다."<>임금님 하시는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러므로 상주라."<>그랬어요.

<>"흉내 내었더라도 좋은 거니 줘라"<>결국은 이 사람이 그 뒤에 뉘우치고 진 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괜찮은 이 야기이지요. 여러분, 효도는 흉내만 내도 괜찮은 거예요. <>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요.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그 많은 잔소리 속에 중요 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겁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귀찮게 여겨도 안됩니다. 일본 동경에서 모였던 국제 심포지움에서 이런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동이 어렵게 된 부모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 た?니다. <>"양로원에 보내야 됩니다." 일본이 24%, 영국이 25%, 미국이 19%, 중 국이 9%, 한국은 0.4%. 한국, 소망 이 있습니다. 거동하기 어려운 부모는 양로원으로 보내라. 이게 일반 적으로 25%입니다만 한국만은 아직도 0.4%. 그래도 한국은 아직도 효에 관한 한 모범국가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그럽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 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다고 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은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 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뭐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말하지 말고요. 훌륭하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브라함 링컨 자신도 초등학교 좀 다니다 말 정도예요. 학문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그 고고하! 고 지식 많고 귀족들이 아브라함 링컨을 헐뜯기 위해서 그 반대파에서 끝까지 괴롭히는 거예요. 대통령이 되고 처음으로 상원에 나가서 연설을 할 때, 어느 국회 의원이 그랬답니다. "당신 같이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불행이라고……">이런 모욕을 주고 또, >"당신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의 아들, 그런 천한 사람의 아들을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시게 됐다"고 해놓고 구를 벗어서 들고, 이 구두도 당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랬어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직업에 충실했고 구두를 잘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어깨 넘어로 배운바가 있으니 당신 구두가 고장나거든 가져오시오 내가 수리해 드리겠습니 다."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여러분 "내 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사람입니다."떳떳하게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효도라는 거예요. "내 아버지는 머슴이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머슴이요, 나는 그 아들입니다."자랑할 수 있어야 되요.

아버지의 직업, 아버지의 선택, 아버지의 삶, 어머니의 살아온 생에 대하여>"잘 하셨습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하시던 일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이것이 효도예요.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돼는 거예요.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어요. 여러분 효가 복 그 자체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세요. 그리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므로 부모님을 즐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건 성경적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어머니를기억하며 쓴 글입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저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저의 용기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저의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주님은 저의 주님입니다."


자녀들은 당신의 말 보다 당신의 행동에 더 주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는 우리의 복사품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사고까지고 모방합니다. 부모의 행동이 자녀들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에게 배우고 부모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오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오 해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며 자녀로서 부모님께 기쁨의 대상이 됩시다. 태어날 때 기뻐하셨던 그 기쁨을 회복합시다. 미운 일곱 살이 다 지나도 아직도 미운 존재가 아니라 늘 기쁨을 드리고 부모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인줄 아는 자녀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께 많은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박은수라는 분이 쓴 어머니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어머니는 좋은 옷이 필요치 않으신 줄 알았습니다./

예쁜 그릇도 갖고 싶지 않으시고/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빛깔 고운 립스틱이나/꽃무늬 화려한 양산품/눈 여겨 보시지도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집와서 마흔 고개에 다다르며/이제사 깨달아 집니다./어머니도 여자이셨음을/

어머니의 가슴에도 무지개가 있고 파랑새가 있고/

사파이어 같은 꿈이 있음을/이제사 알아 봅니다.

어머니/언제나 귀한 이름입니다./

언제나 우리맘속에 별처럼 살아있는/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이날에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