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이 나의 힘  (잠 23:13-21)

5월입니다. 5월하면 이제는 가정의 달이라는 것을 누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가정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5월 첫 주일 은 어린이 주일이고 자녀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의 자녀들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세상에 귀한 것은 자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모두 자식이 우상입니다. 자식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도 알고 보면 자식 때문에 살아갑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것도 보면 자식들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식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주 좋은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 본능이 없으면 어떻게 아이를 낳는 아픔을 감수하며 대를 이어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자식을 두는 것도 중요한데 그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도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을 잘 훈련하고 양육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프린스턴대학 설교학 교수인 Blackwood라는 분이 “그리스도인이 남겨야 할 유산 세 가지”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좋은 부모는 자녀들에게 좋은 유산 세 가지를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자라고 있는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이점을 더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는 “기쁜 기억의 유산을 남겨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렸을 때 자라면서 기쁜 기억이나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렸을 때 만들어진 기억은 평생 추억이 됩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의 추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몇 가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2km 쯤 되는 거리에 있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면 하얗게 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오고간 기억이 참 잊혀지질 않습니다. 눈길을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눈길에 빠지기도 많이 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서 발자국을 내며 걸어가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가 보면 내가 제일먼저 와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청소도 하고 정돈을 마쳐 놓으면 사람들이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일들이 참 좋은 추억으로 기억됩니다.

또 어느 날 다락의 벽장 속에 있는 서랍을 여니까 그곳에 돈이 있었습니다. 누가 두었다가 잊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슬쩍 가져다 썼는데 잊어버릴 만 하니까 어머니가 누가 가져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른 척 하고 있는데 네가 가져갔느냐고 그럽니다. 안 가져갔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매를 들으셨습니다. 그때 참 많이 맞았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아니라고 하면서 그 매를 다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지독한 놈이라고 어머니가 먼저 포기했습니다.

오늘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추억입니다. 그때 매를 맞은 것도 내게는 추억이 됩니다. 그것이 제가 맞은 첫 번째 매고 마지막 매입니다. 딱 한번 매를 맞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매조차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됩니다. 그때 맞은 매가 지금까지 추억이 되고 기억되는 것은 나는 그 매를 통해서 내 어머니가 이놈은 이렇게 한번 죽도록 매를 때려야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지 하는 그 뜻이 담겨있는 그 아픈 매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맞은 그 매가 더 추억이 되고 시간이 갈수록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아이들을 키울 때 때로 매를 들라”고 했습니다. 매를 대도 아이가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매로 말미암아 아이를 악에서 구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장해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 맞는 매도 큰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특히 어렸을 때 가정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억들이 장래를 살아갈 때 마다 깊은 감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고 참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강이 놀아주고 대화를 많이 하고 여행도 많이 가고 그럽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참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렇게 좋은 기억보다는 부끄러운 기억을 남겨주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기억의 대표적인 경우는 부모님들이 부부싸움 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부부 싸움하는 모습은 자녀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어린 시대에는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은 여간 자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특히 싸울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시하는 언사를 쓰고 행동을 하고 돈 못 벌어온다고 핀잔하는 말 등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참 부끄러운 추억입니다. 그런 좋지 않은 기억들이 어린 시절의 마음에 새겨지면 그 딸도 시집가서 그렇게 어머니처럼 살게 됩니다. 참 무서운 기억입니다.

또 부부싸움 할 때 아버지들이 폭력을 써가며 어머니를 무시하는 태도도 자녀들에게는 아주 좋지 못한 기억이 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 아들도 결혼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혐오스런 삶을 자신도 성장한 후에 또 그렇게 아내에게 폭력을 쓰고 무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과거의 부정적인 삶이 주는 영향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동성애가 어떻게 해서 발생되는지 아십니까. 오늘 동성애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동성애를 합법적으로 지위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동성 배우자에게 재산상속도 허락했습니다. 이 동성애는 그냥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유전적인 요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동성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전적인 원인입니다. 두 번째 요인은 “사회문화적인 요인”입니다. 각종 성병과 임신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해서 동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요인은 “환경적인 요인”입니다. 어떤 부모는 서로 적대적으로 싸우며 살아가는 부모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마치 가정에서 폭군과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폭언하고 폭행하고 마치 폭군처럼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이 아버지나 남성을 기피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오래 가거나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면 남성을 싫어하고 기피하고 같은 여성을 좋아하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막무가내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달래고 설득해도 막무가내인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삼켜버릴 듯이 덤벼듭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아들은 장차 아내도 자신을 저렇게 삼켜버릴 듯이 덤벼들 것이다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에 혐오감을 갖고 여성을 기피하고 동성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적 요인입니다. 여러분, 원인 없이 동성연애자가 발생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부모는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아주 좋은 기억이나 추억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준 참 좋은 기억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오래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부모님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모습, 주일이면 시간도 엄격하게 지키고 어김없이 예배드리려 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엄숙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진지하고 어른을 존중하는 모습, 남을 돕는 모습 등은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남겨주면 자라나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좋은 기억과 추억을 남겨주는 부모, 얼마나 소중한 교훈이고 삶입니까. 이것이 가장 좋은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습관을 유산으로 남겨주라”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세속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풍조도 있지만 나쁜 풍조도 많습니다. 물질을 지나치게 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먹고 마시는 일에 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날마다 이유를 만들어 먹고 마시는 이 풍조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대학교에서도 젊은이들이 그것이 무슨 좋은 전통이라고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흉내 내며 폭음해서 죽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또 그것을 좋은 풍조라고 신앙인들조차도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을 기죽지 않게 해 준다고 메이커만 고집하는 부모도 세상 풍조를 따르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생일날이 되면 돈을 많이 들여서 호텔에서 잔치를 해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습관만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조촐하게 식사하고 친교하고 아버지가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생일잔치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자라서 직장엘 갔습니다. 첫 월급을 타 왔습니다. 얼마나 귀한 월급입니까. 내 자식이 커서 직장에 나가서 첫 월급을 타 왔습니다. 내가심은 과일 나무에서 첫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열매가 얼마나 신기하고 얼마나 귀합니까.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것은 너무나 귀한 것이니 그것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자” 하면 얼마나 더 향가가 나겠습니까. 아이가 생각하지 못하면 부모가 알게 해서 그렇게 모두를 드리게 하면 얼마나 그것이 좋은 신앙의 교육이 되겠습니까.

물론 11조 훈련은 필수입니다. “너는 앞으로 굶더라도 11조는 해라” 이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신앙의 교육입니다. 이 삶을 철학으로, 신조로, 생의 분명한 목적으로 자리 잡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들에게 이런 신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신앙의 모습이 자꾸만 변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상황에 따라서 신앙이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주일날 날씨만 좋아도 겁이 납니다. 비가 오면 200명씩 줍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면 먼저 날씨부터 봅니다. 날씨가 맑아도 걱정이고 비가와도 걱정입니다. 보니까 날씨가 비가 올 것도 같고 어쩌면 안 올 것도 같습니다. 그러면 안심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다가 절박한 순간을 만나 보십시오. 그때 누굴 믿고 찾아가겠습니까. 하나님 밖에 또 누가 있습니까. 그것을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알려주고 그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신앙의 교육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높은 생의 목표를 유산으로 물려주라” 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너는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때로 이 세상에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 형통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업도 성장하고 인생도 그럴 듯하게 성공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참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최고의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한때 성공하고 복을 받은 것으로 알고 부러워하지만 그 성공은 곧 시들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때 화려하게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약 성공의 자리에 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데 그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청문회에 불려 나갑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성공입니까.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것을 최고의 복인 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높은 생의 목표를 유산으로 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부모님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높은 생의 유산을 가르치기는커녕 아이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돈밖에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높은 이상과 꿈을 심어주기는커녕 자녀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경우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키우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장하면 아이들이 부모를 평가합니다. 아이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부모를 비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직업에도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모가 정당한 직업일 경우면 스트레스가 적은데 부모가 부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는 상당한 스트레스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직업도 정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가 아이들에게 정당한 사명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높은 뜻을 부여하는 교육은 사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 사명의 교훈을 줄 때가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장 강하게 말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사명의 삶을 살라는 교훈 할 때입니다. “너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너는 누구를 위해서 돕는 삶을 살라, 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공헌하는 삶을 살라, 너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의 삶을 살라”, 얼마나 강한 교훈이고 자신 있는 가르침입니까.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강한 교육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좀 무능해서 못살면 어떻습니까. 자식에게 용돈 좀 적게 주면 어떻습니까. 자녀들에게 이렇게 너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라고 교훈할 수 있으면 가장 훌륭한 부모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부모들이 맹목적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경쟁에 휘말려서 능력이 안 되는데도 아이들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면서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사주고 풍족하게 용돈을 주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자녀교육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드는 일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삶입니다. 그래야 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은혜를 입고 인도함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습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