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행복  (시30:5,11,12, 전7:3, 마5:4, 고후12:10)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 때문에 우리 강변교회의 유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어린이들과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너무너무 예쁘고 너무너무 좋습니다. 모두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제 새벽에는 새벽기도회에 나온 27명 어린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안고 축복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 손 가락이 열 개 대신 네 개만 있었다면 너무 슬펐겠지요. 이희아란 어린이는 아기로 태어났을 때 손 가락이 네 개 밖에 없었어요. 무릎 아래에는 다리도 없었습니다. 너무 슬펐겠지요. 그런데 이희아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 두 팔이 없이 몸만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너무 슬펐겠지요. 레나 마리아란 어린이는 스웨덴에서 아기로 태어났을 때 두 팔이 없었어요. 다리도 한 다리는 짧았어요. 너무 슬펐겠지요. 그런데 레나 마리아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태어났었다면 너무 슬펐겠지요. 패니 크로스비란 어린이는 미국에서 아기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여섯 주 만에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되었어요. 너무 슬펐겠지요.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살다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다면 너무너무 슬펐겠지요. 강영우란 학생은 15살 때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축구 공에 눈이 맞아서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되었어요. 너무 슬펐겠지요. 그런데 강영우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 우리가 우리의 슬픔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그 슬픔이 변해서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만져주시면 우리의 슬픔이 변해서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변하여 행복이 되게 하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변하여 행복이 되게 하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이희아의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손 가락 네 개를 가지고 태어난 이희아 어린이는 너무 슬프고 속상했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과 가르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23살의 어른이 되었지만 키는 아직도 5살 어린 아이입니다. 그런데 희아가 피아노를 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희아는 전국학생음악연주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장애 극복 대통령상을 받았고, 자랑스런 서울시민상을 받았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 카나다, 유럽,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다니며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이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스물 세 살이다. 엄마가 나를 강하게 키워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는 없었을 거다. 나는 지금 엄마와 즐겁게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칠 수 있고 또 내 연주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얻고 용기를 가질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외국에서는 내 연주를 들으면 사람들이 찾아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고 내 손을 잡는다. 그들이 고맙다고 말할 때면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몸이 자주 아프고, 휠체어에서 잘 굴러 떨어지고, 발에서 물을 뽑을 때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행복한 일들이 더 많다. 내가 열심히 연습해서 사람들 앞에서 정성껏 연주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 같다. 나도 행복하고 엄마도 행복하고 사람들도 행복하고. 그래서 나는 내가 좋고, 지금이 좋다. 내가 행복하니까 나를 보는 사람들도 행복해진다.” 희아는 행복이란 말을 9번이나 했습니다. 이희아의 슬픔이 행복이 되었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이희아의 피아노 연주를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이희아는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하늘 만큼 땅 만큼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가 왜 저에게 사랑의 매를 때리셨는지 저는 다 알아요. 제가 세상에서 더 강하게 더 노력하라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죠. 결국 많은 장애인들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헬렌 켈라나 마더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요. 겉으로 표현을 안했지만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깐요, 어머니 사랑해요”.

둘째, 레나 마리아의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슬프고도 불행한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레나는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행복한 사람으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밝은 미소가 나타납니다.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스웨덴이라는 조국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품 안에서 아름답게 자란 레나 마리아가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행복한 사람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 앞에도 나타났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자신의 불행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로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아왔습니다. 레나는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레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레나는 무엇이든지 하기를 좋아합니다. 수영도 하고 운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음식도 만듭니다. 그림도 그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레나는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고 밝고 행복합니다. 레나의 슬픔이 행복이 되었지요. 맞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레나 마리아의 노래와 간증을 들어보겠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는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 피아노 연주자도 여기 와 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988년에 장애자 올림픽 때 왔었습니다. 그때 장애인 경기 중 어느 한 주일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스웨덴에서 조차 굉장히 유명한 교회이기 때문에 여기로 오겠다고 작정했었습니다. 저 쪽 끝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에게는 그때 경험이 아름다운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날 당시 장애인으로 태어났는데 두 팔이 없었고 한쪽 다리는 나머지 다리의 절반 정도 되는 길이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부모님과 친척들은 제가 태어났을 때 그 장애로 인해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 날 오후에 저의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친척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전화를 하기 전에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침대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로서는 도저히 이 아이를 감당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저를 너무나 잘 보살펴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많은 경험들을 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에 다시 앤더스와 함께 내한 공연 차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한 곡을 더 부를 텐데요. 이 노래가 나타내는 것은 제 모든 삶을 주님께 바칩니다 라고 하는 곡입니다. 예수님께서 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My Life”

셋째, 패니 크로스비의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가장 슬프고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패니 크로스비는 부모님과 할머니의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패니는 자기가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92회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그 사람과 악수하고 싶어요.” 패니 크로스비는 주님과 천국을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사모하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패니는 9천여 개의 찬송시를 썼는데 그가 쓴 찬송시들이 지금 세계의 많은 성도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시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슬픔이 가장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맞지요.

넷째, 강영우 박사의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강영우란 학생은 15살 났을 때 사고로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도와 주던 마음씨 고운 여자가 강영우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강영우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강영우씨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후 미국에 건너가 장학금을 받으면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 가서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도 훌륭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모두 박사가 되었고 두 며느리도 모두 박사가 되었습니다. 한 집안에 박사가 5명이나 나왔습니다. 지금은 온 가족이 다 워싱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아들 부시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지금 미국 백악관에서 장애인 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강연과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맹인 강영우 박사는 슬픈 사람이었지만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강영우 박사와의 인터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 드리겠습니다.
대담자: 박사님, 쾌히 응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박사: 이렇게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담자: 박사님 간증을 제가 들었고 또 테이프로도 들었는데 매번 들을 때마다 그 간증은 저에게 큰 도전이 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다시 한번 나를 돌아 보게 되는, 정직하지 않으면 안되고, 순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정말 귀한 간증인데요, 박사님 어렸을 때 아버님은 생존해 계셨나요? 강박사: 아주 어렸을 때는 계셨지만 제가 13살 때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때가 제 소년 시절의 불행의 시작이었지요. 대담자: 그러면 실명 되시기 전에 아버님이 떠나셨군요. 강박사: 예. 그리고 일년 후 제가 중학교 2학년 마치고 축구공에 맞아서 그게 망막박리를 일으켜서 결국은 실명을 하게 됐지요. 대담자: 동네에서 아니면 학교에서 축구를 하셨나요? 강박사: 학교에서요. 대담자: 아. 축구공에 맞아서도 그렇게 될 수 있네요.
대담자: 하루 아침에 실명을 하게 되시면서 어린 소년으로서 느꼈던 박사님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강박사: 하루 아침에 실명을 하게 된 것은 아니고 망막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차츰차츰 시력을 잃어 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한꺼번에 잃었으면 체념을 해서 오히려 더 나았을 지도 모르는데 4,5년 두고 계속해서 나빠지니 까 내일은, 혹은 한 달 후에는 저것도 못 보겠구나, 저 별조차도 못 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게 더 어려웠어요. 무엇보다 저에게 어려웠던 것은 신앙적인 갈등이었어요. 대담자: 어렸을 때부터 교회는 다니셨군요. 주님을 영접하셨구요. 강박사: 네, 영접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게 저는 모태 교인으로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연스럽게 믿어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믿으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내 생애를 인도해서 나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불행이 겹쳐서 시력도 잃고 어머니도 그 충격에 돌아가시고 또 누나도 생계를 유지하다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어요. 대담자: 박사님을 섬기다가 그렇게 되셨나요? 강박사: 네. 그 때 제 신앙적인 갈등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왜 모태 교인으로 예수를 잘 믿었는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를 잘 믿고 그랬었는데 이 가정에 이런 불행이 올 수 있느냐 그리고 왜 나에게 하필 이런 것을 허락하시느냐,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 이러한 비극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저의 신앙적 인 문제였지요. 그게 제일 어려웠지요.
대담자: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마음대로 뛰어 다니고 가고 싶은데 가다가 실명이 돼서 어머님 먼저 천국 가시고 누님도 그렇게 가시고, 고아원으로 철물점으로 가게 되었을 때 박사님께서는 엄청난, 말로 표현 하 실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어떤 마음들, 내 마음에 일어난 나에 대한 마음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마음들, 그 당시가 박사님에게 가장 고통스럽고 원망도 하 실 수 있는 그런 시기가 아니었을까요? 강박사: 그렇지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이고 더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의 바닥까지 갔던 것이지요. 그래서 보던 사람이 보지 못한다라는 실명의 절망이나 좌절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당장 먹고 자는 문제였어요. 보지 못해서 갑갑하다는 것 그것은 덜 어려웠어요. 대담자: 먹는 문제가 더 힘드셨군요. 강박사: 그렇지요. 먹는 문제, 자는 문제였어요. 어디 가서 잠은 자야 되잖아요. 대담자;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지요? 강박사: 맹아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서 사니까 주말까지는 괜찮은데 제일 문제는 여름 방학, 겨울방학 한 달 동안은 어디로 가야 되는데 하루 이틀은 몰라도 한 달은 얼마나 지루합니까. 그 한 달 동안은 잠자리와 거처가 있어야 되고 배고플 때 먹어야 하는 문제가 해결이 안되니까요.
대담자: 지금은 미국 정부에 차관보로 계시는데 과거의 그런 아픔을 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까? 감추고 싶고 덮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박사님은 과거의 그 아픔과 부모님의 일들을 그렇게 가감 없이 말씀 하실 수 있 는 그런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강박사: 첫째는 저는 그것을 그 당시에는 아픔이었지만 지금은 아픔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기회와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지 않고 그것이 긍정적인 자산으로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이다 실명은 나에게 주신 축복이다 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그것보다도 그 약한 것들, 내가 부끄러워했던 것들, 숨기고 싶었던 것들, 아팠던 것들, 그것들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이 이런 약함을 통해서, 약함을 토대로 해서, 오늘 날 내가 영광의 이 자리까지, 공식적으로 미국에서 honorable이라는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지요. 대담자: 그래서 그것을 말씀 할 수 있고 자랑 할 수 있는 것이군요. 강박사; 그렇죠.
대담자: 사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것은 힘든 일이거든요. 더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과거를 포장하잖아요. 과장해서 하는 것을 원하기도 하고 일반적이기도 해서 그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고 고발도 있고 고소도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박사님의 그 힘, 저는 그것을 힘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능력인데 그 능력을 그리스도인이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박사님에게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박사님의 그런 고민과 좌절과 절망과 원망 속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뀐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어떤 계기로 박사님이 바뀌어져서 지금의 영광의 자리까지 오셨는지요? 강박사: 저는 사도 바울을 만남으로서 저의 신앙의 갈등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저는 불행이 겹치면서 이것이 부모나 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육신의 가시로 찌르는 듯한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서 제가 ‘그게 아니로구나 내가 꼭 죄를 지어서 이러한 장애를 갖게 되고 불행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처럼 주님의 사도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2년 동안 기도해서 응답 받지 못했을 때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을 받지 못한다 라는 고민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도 그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도 안 고쳐 주셨거든요. 사도 바울이 믿음이 부족해서 안 고쳐 주신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리고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온전해지고 또 자고하지 말라고 그런 가시를 주셨다고 했을 때 저도 아, 나의 실명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럴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을 저의 역할모델로 해서 저의 장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저는 사도 바울만 저의 역할모델로 계속 쫓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육신의 가시에도, 옥중의 고통 속에서도, 비전을 가지고 옥중서신을 써서 그것이 성서가 되었다는 것에서 저도 고난의 역경 속에서 내가 큰 꿈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본받으려고 노력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는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 감사의 조건을 찾는 것을 찾은 것을 모델로 해서 저도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이고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의 도구다 라고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대담자: 사도 바울이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다 라고 했는데 바로 이 말씀이 박사님의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서 뼛속까지 와 닿는 진실한 말씀이 된 것 같습니다. 강박사: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슬픔이 행복이 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이 변해서 행복이 되는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슬픔을 지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아름다운 천국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윗과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쁨의 고백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30:5,11,12).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