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종이 맞는 연말   (잠 25:13, 마 24:45-51)

매년 그렇습니다만 정말 올해는 더욱 다사다난이란 말이 틀리지 않는 해입니다. 2003년은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들었던 한해입니다. 끔직하고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뉴스거리가 많은 해였습니다. ‘대선 자금’, ‘굿모닝시티 파문’, ‘자살과 빈부 차이 급증,’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태풍 매미의 피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사스(SARS) 괴질 공포,’ ‘현대 아산 정몽헌 회장 자살’ 등 뉴스거리가 멈추지 않는 해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며칠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분열이 두드러진 해였습니다. 진보 보수의 삼일절 집회, 사건과 사고에 대한 다른 목소리, 목회자의 탈선과 헌금사용 비리, 대형교회 목회자의 구속사건 등 교회도 편찮은 한 해였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가 새로운 하나의 연합기구를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고 있는 것은 참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런 난제들은 올해로 끝날 과제가 아니라 내년으로 인계될 사건들입니다. 연초부터 시끌시끌 할 것같은 조짐이 있습니다.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1위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점입가경(漸入佳境), 이전투구(泥田鬪狗), 지리멸렬(支離滅裂), 아수라장(阿修羅場)의 순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한결같이 절망적입니다. 교훈적인 것이 없고, 암담하고 답답한 말들만 나열됩니다. 이것이 2003년의 우리네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올해의 한자로 호(虎)자 한자를 선정하였습니다. 호랑이를 마스코트로 하는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가 18년만에 우승하여 종이호랑이가 맹호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여유가 있고, 해학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부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종말적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장은 예수님의 종말적 비유입니다. 크게는 시대적 종말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재앙과 세계의 재앙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나아가서 개인의 종말과 인류의 종말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충성된 종의 비유로, 마지막 때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윌 듀란트(Will Durant)라는 역사학자는 교회사 속에서의 아픈 상처들을 지적하면서, “교회는 오직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박해해 왔다. 한 부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을 크게 구분합니다. 크게 말하면 누구나 충성된 종이 아니면 악한 종입니다. 두 부류의 종으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아니지만 한 해의 마지막 때를 맞으면서 충성된 종의 모습을 되새기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종의 두 가지 요건은 충성과 지혜입니다.
첫째, 충성된 종은 주인이 모든 것을 맡기는 종입니다.
47절에는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합니다. 모든 소유를 맡긴다는 것은 아예 소유를 다 떼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의 청지기는 충직하여 주인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배달사고’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주인의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나쁜 것을 말합니다. 충성된 종은 가로채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로채기는 농구, 축구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신임하고, 맡기고 잊어버릴 수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고사에 좌청룡, 우백호가 있지 않습니까?
요즘도 이 말은 권력자의 주위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좌우에 자리할 수 있는 종이란 권력자의 충성스런 종입니다. 힘이 있는만큼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좌청룡, 우백호가 떼먹기나 하고 가로채기나 하면 주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충직했던지 보디발은 자신의 집의 모든 것을 다 맡겨 주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외에 모든 것을 다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의 간수가 감옥의 모든 일을 다 맡겼습니다. 간수가 죄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길만큼 그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는 위임(delegating)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위임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임받는 편의 충성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게 위임할 수 있는 일들은 결코 나서지 않는 듯하다. 그분은 당신의 눈을 한 번 깜빡여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느리더라도, 실수하며 그르치더라도 우리더러 하라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1864년 링컨대통령은 그랜트 장군을 북부 동맹군 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계획을 알 필요도 없고 또 묻지도 않을 것이다. 책임을 갖고 행동하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면 나에게 연락하라”. 그랜트에게 모든 것을 믿고 완전히 맡긴 것입니다. 그랜트 장군은 모든 것을 맡길만한 충성된 인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번역한 단어는 글자 그대로 ‘맡긴다’는 뜻의 고어에서 왔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으면 맡깁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믿음직하면 다 맡기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보세요. 포도원의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다른 나라에 갔습니다. 포도가 결실하여 딸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어 소출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소출을 위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내어 쫓았습니다. 주인이 생각하기를 농부들이 종들은 때리고 내어쫓지만 내 아들을 보내면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오자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이 모든 소유를 취하자고 하면서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1:41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라”. 충성되지 못한 농부는 악한 농부입니다. 악한 농부란 포도원을 맡기지 못할 농부란 말입니다.
우리 나라 옛말에 “고양이에게 반찬가게 지켜달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긴 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말은 다 맡기지 못할 자에게 맡기는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충성된 종은 맡겨놓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종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불충성과 연약함 때문에, 또 큰 아들처럼 분한 마음과 분노 때문에 똑같이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 가운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다. 누구에게 가산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첫째입니까? 둘째입니까?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이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런 아들, 이런 종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충성된 종은 사람들을 맡아 양식을 나눠줍니다.
45절에는 “주인에게 그 집 사람을 맡아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고 합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나누어주는 것이 충성된 종의 할 일입니다. 이런 종은 자기 것처럼 관리하고, 자기의 것처럼 알뜰하게 나누어줍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충성스러우니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28:14에는 말씀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은 정말 대단한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찬송할 때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지 않습니까?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또 땅의 모든 족속이 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사심없이 전달합니다. 잘 맡아 나눠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입니다. 나눠주는 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어떤 섬김이든 충성심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충성이 없으면 섬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과부들에게 구제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가난한 성도에게 물품을 나눠주는 일입니다. 이 일은 초대교회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처음에는 사도들의 직무였습니다. 그리고 구제 문제가 교회에 확산되자 훗날에는 집사들의 직무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구제할 때에 교회의 것을 가지고 나눠줍니다. 그런데 구제가 자칫 자기 생색내기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누어줄 때는 아무 사심없이 균등한 배분의 법칙으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래야 충성스런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단어와 욕심이란 단어가 어울립니까? 충성된 자가 자기 것만 챙깁니까? 충성과 욕심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충성된 자는 욕심이 없습니다. 충성된 자는 자기 것을 먼저 챙기지 않습니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판단이 아니라 주인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고 일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를 보세요. 나눔이 기초가 아니라 독점, 착복이 기초입니다.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이 된 듯한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무슨 충성이 보입니까? 충성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삶을 보고 있는 것같습니다.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는데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는데 강의를 취소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두명밖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해 겨울 시카고 거리는 유난히 추었는데도 그는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일주일에 이틀동안 한번도 빠짐이 없이 계속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 년이 흘러갔습니다.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충성된 종은 양식을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지식을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신앙과 지혜를 충실히 나누어줍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만인의 주인으로 철저히 자유롭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예속된 만인의 종으로 철저히 충성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충실합니다.
셋째, 충성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일합니다.
46절에는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는 두 종류의 종이 등장합니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입니다. 충성된 종의 반대는 불충한 종이 아니라 악한 종입니다. 불충한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충성합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변함 없이 게으릅니다. 꾸준한 것도 두 가지입니다. 충성으로 꾸준한 사람이 있고, 게으름으로 꾸준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끔은 평생 변함 없이 꾸준하게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도 두 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변함 없이 게으른 이런 사람은 영원히 살지요. 그런데 지옥에서 영원히 삽니다. 야곱은 삼촌의 집에 가서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하루 같이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둘째 딸을 먼저 주는 법이 없다고 하여 첫째 딸 레아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합니다. 이 때도 성경은 7년을 하루같이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하여 14년을 하루같이 일하였습니다. 이런 꾸준한 마음이 충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같으면 장가 안가고 말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14년을 한결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야곱의 성공 비결입니다. 그의 충성입니다. 충성은 자신에 대해서도 충실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불충한 자는 남에 대해서는 더 불충합니다.
캘빈 밀러는 다음과 같은 글을 그의 책에 남겼습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다음 4가지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물질과 재능을 충성스럽게 관리해야 한다.
셋째,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넷째,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영광스런 특성을 부여받았다”.
따지고 보면 네 가지 다 충성된 자가 가질 시간관이며 자세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서 부랴부랴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인도교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때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게 된 맥아더 장군의 눈은 문뜩 강 이쪽편에 서있는 부동자세의 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탄 지프를 타고 이 병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느냐?” 이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있을 작정인가?” 이때 이 병사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위급하고, 지휘 계통은 사라지고, 지휘관들도 도망하는 형편에서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그날로 당장 미군 병력의 출동 명령을 내리고, UN군이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전투를 뒤집어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결론
벌써 마지막 주일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합니다. 며칠 전 전남 장성 백양사의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열반에 들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서옹 스님은 앉아서 열반에 든 ‘좌탈입망’(坐脫立亡)하였다고 하여 세인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자세를 보고 극찬하고,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봅니다.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들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에 “예”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어요” 했지만 뒤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아들입니까? “예”하고 갔으면 좋았겠지만 “아니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간 아들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를 향해 가느냐, 누구를 향해 충성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봐야 알고,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여 마지막에 주님이 오실 때에 이런 충성된 종이 되어서 복 있는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말을 맞이할 때에 끝이 좋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인생의 끝에서 끝이 좋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