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예수와의 만남   (고전 15:3-11 )

사람은 눈만 뜨면 사람들과 만남을 이룹니다. 농경시대에는 하루 종일 한사람도 만나는 일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는데 오늘은 하루도 만남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며 살아갑니다. 만남에는 좋은 만남도 있지만 악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못 만나서 불행해지는 사람도 발생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교회 안에서 만남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도 한두 번씩 만남을 이루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아주 좋은 만남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평생 그리고 천국에 가서도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모와의 만남, 형제간의 만남, 부부간의 만남도 소중한 만남입니다. 신앙생활도 이 계기와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어떤 계기, 만남,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체험하는 것이고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여곡절 끝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만남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람들을 부지런히 다니며 만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람을 만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와의 만남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먼저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게바는 베드로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 이름은 어부 때 아직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이름입니다. 이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예수님께서 게바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게바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 게바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게바에게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보면 대장부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옹졸하고 비겁하고 허풍떨고 큰소리를 잘 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런 모습들이 일신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 베드로는 신실한 인간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습으로 나가서 전도를 합니다. 베드로가 나가서 얼마나 용기 있게 예수를 자신 있게 소리 높여 전합니까. 그래서 한 집회에서 3천 명씩이나 회개시키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예수 사후 나머지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사역을 완수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죽을 때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생전에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부활 후에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와 기회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주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실수를 많이 하고 배반했다고 버리셨더라면 지금 우리들은 모두 주께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버림을 받아도 수도 없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수 많이 하는 베드로를 다시 찾아와 기회를 주신 것은 그 속에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 충성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성숙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직업을 12번도 더 바꾼 사람입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주위로부터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김 받은 사람입니다. 뱃사공, 농부, 노동자, 장사꾼, 군인, 우체국 직원, 법률사무소직원을 거쳐 안 되겠다 싶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여러 번 낙방 끝에 변호사가 됩니다. 이 사람이 후에 국회의원이 되고 상원의원이 되고 마침내는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사람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사람이 링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실패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거치는 동안 여물어지고 연단되어 마침내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후에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은 그의 그 실패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그 실패를 기회로 삼도록 버리지 않고 그를 다시 사용하신 예수님의 배려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이렇게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신을 거듭합니다. 베드로는 이 실패들을 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명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칼 힐티는 “인간 최고의 날은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턴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달성할 때 까지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막론하고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열두 제자”들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 게바에게 보이시고 12제자들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시점으로 보아 지금은 12제자가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탈락했고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통칭 12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과정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다는 불행하게 탈락했습니다. 도마는 불신앙자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두 부끄럽게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먼저 이 제자들부터 만나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명색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명색이 제자라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세상 같았으면 그 제자들은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벌써 버림받고 퇴출당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조금 부족하면 그냥 버려버립니다. 그냥 잘라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감싸 안으시고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죽을 각오를 하고 다니며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주님은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오백여성도”들입니다.

6절을 보면 “500여 성도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오백여 성도들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예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전면에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면에 나서서 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전면에 나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전면에 나서도 안 됩니다. 대부분은 뒤에서 말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 나타나 있는 사람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언제나 더 큰일을 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뒤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 나타난 사람들만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사회를 보면 참 시끄럽습니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그 사회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정말 근실한 사람들은 말없이 묵묵히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건강한 시민이 다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이 오백여 성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생존시에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묵묵히 뒤를 따랐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충실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기억하고 부활 후 먼저 그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네 번째는 “야고보”입니다.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몇 명의 친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들이 하나같이 생전에 예수님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요 7:5절을 보면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외롭게 살았던 분입니다. 동생들도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를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적극적으로 따라다녔는데 정작 가족들이나 동족들은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사역자에게는 이것이 가장 외로운 일입니다. 목사가 되었는데도 부모님들이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 처럼 외로운 것이 없습니다. 모두 배후에서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기도후원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기도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한 가지 고통이 있다. 그것은 내 백성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 고통이다. 내 백성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저주를 받는다 해도 기쁘게 받겠다”고 했습니다. 이 가족, 친지, 형제들이 함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그 자리에 12제자 말고 동생 야고보도 그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것은 내 피니 나를 기념하라”하고 돌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 야고보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야고보가 포도주 잔을 받아서 집어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고보도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야고보가 화가 난 것은 왜 형님은 그 좋은 언변, 능력, 기적행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이 시대에 할 일을 하고 출세도 할 수 있는데 왜 자꾸만 죽는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상해서 포도주 잔을 집어던지고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형님이 마음만 먹으로 얼마든지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로마도 무서워 할 정도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적도 행하고 다닙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냈습니다.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며칠 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여들은 그 인파들, 그것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지금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자꾸만 죽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도 나는 이제 죽는다, 죽으면 삼일 만에 살아난다, 그러더니 이것은 내 피니 마시고 나를 기념하라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포도주 잔을 집어 던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하자면 야고보의 생각은 백번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가 예수님을 깊이 알지를 못했습니다. 본 것이 인간예수만 본 것입니다. 재주를 부리고 능력만 행하는 인간 예수만 본 것입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이 야고보에게 단독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나타나셔서 “이제는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야고보가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주여 이 개만도 못한 종을 왜 이리 사랑하시나이까”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이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열렬한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고 야고보서를 써 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 사람들이 이렇게 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렇게 제자들과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시느라 분부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절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 사도바울은 기독교사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다고 합니다. 머리는 벗겨졌습니다. 눈썹은 새까맣고 시력이 좋지 않아서 검은 돋보기안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참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 야망이 대단히 컷 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인생이 순간적으로 일변하여 철두철미한 예수맨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오직 예수만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여한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후 어거스틴, 프랜시스, 산다씽, 루터, 웨슬레, 칼빈, 무디, 모두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그 시대를 능력 있는 전도자들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생생하게, 뜨겁게 만나고 체험했으면 합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난 신앙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고 믿는 믿음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직접 만나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그런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그 믿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 속에 자신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경험과 체험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경험이 삶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 가족 중 누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보면 감각이 달라집니다. 내 가족 중 누가 장애인이 있으면 길을 가다가 장애인을 보면 느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어느 광고에 “강아지를 세일합니다”하고 났습니다. 어린 소년이 강아지가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게에 가 보니까 한 마리에 만원씩 팔았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는 2천원 밖에 없습니다. 보니까 2천 원짜리 강아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다리하나가 없는 강아지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선뜻 그 강아지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그 강아지는 평생 돌보아야 하고 보기도 흉할 텐데 괜찮겠느냐고 몇 번이나 묻습니다. 어린 아이는 괜찮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자신의 다리를 번쩍 들어 보이면서 “나도 다리 하나를 절어요”하고 말합니다. 내가 아픔을 가지면 세상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는 마음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세상에 시험의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부터 그 신앙이 모두 구체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열심히 돌아다니시면서 제자들과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이제 부활주일은 지났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시려고 부지런히 돌아다니십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