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삶    (고후 5:14-17 )

부활주일이 지났습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동안 40일간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부활절이 지나니까 곧 잊어버립니다. 부활절이 하나의 행사로 여겨지는 기분도 들게 됩니다. 때로 망각의 은혜도 있기는 합니다. 빨리 잊는 것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이나 곧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부활을 부활주일만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면 부활의 소중함이 희석되기 쉽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쉽게 행사로서 치루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후 제자들에게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책임 있는 신앙인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 제자들의 신앙상태는 아주 설익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베드로는 말이 수제자였지 매사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이 제자였지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은 제자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서 제자들 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니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던 시몬이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막무가내로 때리니까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예수를 때리지 말라고 호통 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도망가서 그 자리에 있지도 못한 제자들 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예수님을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처리하겠다고 허가를 받아 묘에 안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동행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민망하리만치 도망이나 다니고 숨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제자들은 참 용렬한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후에 갑자기 아주 성숙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은 다시 후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도하는데 얼마나 확신 있게 전하는지 엊그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베드로가 너무나 당당해졌습니다. 엊그제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나가서 전도하는데 3천명이나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에 너무나 자신감에 차 있었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전도의 삶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제자들은 비로소 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 지점에 서게 되면 누구보다도 행복해집니다. 이 지점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일반인이든지 사업가든지 신앙이든지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모두 그 삶이 행복해집니다.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세상에 겁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 확신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이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발견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이 지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 확신 있는 전도와 태도는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3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이 같은 변화의 분깃 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기인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는 후퇴하고 숨고 도망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주 성숙한 제자들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부활신앙이 신앙의 분기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이 만남이 없으면 그 신앙인 여전히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목회자들 가운데 부활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신학자들 가운데에도 예수부활을 부인하는 글을 써 내는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신앙풍토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들 중에는 이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신앙이 자꾸만 흔들리는 것은 이 부활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은 이 부활신앙의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무슨 사랑인가 하면 예수님의 끔찍한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을 감수하시고 가진 것 다 내어 놓으시기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영화를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그 과정을 보니까 말 그대로 있는 것 다 내주고 죽으셨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죽어 가시는 그 장면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죽음이 얼마나 처절한 죽음입니까. 그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아픔을 인내하게 했습니다.

이 사랑을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극난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넘치는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값을 알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나 입습니까. 더구나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대속하고 구속하는 사랑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되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랑을 비로소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1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8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또 예수와 함께 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서 죽으실 때 예수님만 죽으신 것 이 아닙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옛날 나, 옛사람인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나도 예수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분, 처지, 가치관이 모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우리는 책임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이치를 알고 깨달은 사람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알게 되면 무릎을 꿇게 데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례를 형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것을 꼭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때로 사람은 무지할 때가 가장 용기가 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게 되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힘입은 그리스도인은 그 격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활을 욕되게 만들기 쉽습니다.  

애벌레들이 애벌레의 삶을 다 살면 잠을 자게 됩니다. 애벌레가 잠을 자고 나면 껍데기를 벗고 마침내 나비가 됩니다. 그러면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로 살면 안 됩니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보면 두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 희망은 꽃들에게 희망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벌레가 잠자는 기간동안 꼬치 속에서 암흑생활을 잘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 애벌레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을 다 잔 후에 이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옵니다. 그리고 나비가 됩니다. 이 나비가 하늘을 날면서 꽃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제 이 나비는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닙니다. 이제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벌레가 변화하여 나비가 되듯 그렇게 엄청나게 변화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변화의 모습에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옛날의 나는 애벌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때는 마음, 정신, 생각, 삶이 모두 애벌레와 똑같았었습니다. 그래서 술 취해 땅에 뒹굴고 별것도 아닌 것들을 쫓아다니느라 하늘이 푸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대가 바로 애벌레와 같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나비가 애벌레 때를 생각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면 안 되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으로 돌아가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세속적 생활방식이나 행동방식 그리고 이기적 욕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나비는 이제 다시 시궁창으로 들어가면 나비가 아닙니다. 나비는 나비의 수준을 지켜서 하늘을 날아야 나비입니다. 나비는 이슬을 먹고 꽃을 찾아가서 꿀을 따야 그래야 나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생각, 삶, 모양, 추구점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이 부활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죽었다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배지를 보면 사람이 어디에 속한 학생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크를 보면 어디에 속한 기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 박해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 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 물고기 표시는 헬라말로 익투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다“라는 약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표시입니다. 외형적으로 나를 알리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다“라는 내면적인 자각이 더 중요합니다. 부활신앙 자에게는 이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을 이루는 사명 자들  

또 18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나비는 꽃을 찾아다닙니다. 꽃을 찾아 꿀만 따러 다니는 것이 아니고 화목을 이루며 돌아다닙니다. 나비가 꽃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며 서로 교정을 시켜줍니다. 그래서 꽃들이 마지막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는 화목을 이룰 때 열리는 결실입니다. 모든 꽃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나비와 벌들이 돌아다니며 화목을 이루는 역할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식물들은 사람들이 일일이 이 역할을 해 주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냥 놔두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이 열매를 맺는 일에 나비나 벌이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이고 화목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을 살면서 이 화목하게 하는 삶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웃과 이웃을 화목하게 하고 이웃과 그리스도인을 화목하게 하고 불화와 갈등이 있는 곳에 조화와 화평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화평이 이루어지고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사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비와 벌을 만드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을 두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이 평화와 화목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평화와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평화를 이루고 화평을 이루는 사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18절을 보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나 인내 그리고 역할을 감수하기 위해서 수고를 마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도 배운 사람으로 살려면 이 같은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한란을 당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인내하고 수고하고 역할을 감수하는 노력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감수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전 제자들은 실패하고 숨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손해 보지 않고 수고하기를 회피했습니다. 그러면 실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난 후에는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인내하고 수고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신앙의 삶은 이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실을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에 가까운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부활은 부활절 행사로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고 발휘되고 나타나고 증명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