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형으로써의 부활   (고전15:35-44 )


인간의 몸, 또는 삶에는 세 번의 변형이 있습니다.

먼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다만 육체를 가진 생물학적 형체로만 형성 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을 가진 인간으로 형성됩니다. 그러한 형성 과정이 약 10개월 걸립니다.

인간으로 형성된 생명체는 정상적으로 10개월이 지나면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세상에 나온 새 생명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고 어머니 품에서 시작하여 가정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형성되어 갑니다.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할 나이가 되면 직장과 가정을 갖게 되고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살아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人間은 질병, 실패, 고통, 갈등, 좌절, 고독, 슬픔을 통해서 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경험적으로 배워가게 됩니다. 현실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생의 연한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노년기에, 어떤 사람은 중년기나 장년기, 또는 청년기 유아기에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은 이 현실의 삶을 단축시키기도 하고 연장시키기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불멸의 요소가 있어서 죽어도 그 불멸의 요소가 살아갈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묘지에는 그 사람이 사용하던 집기들을 함께 넣어 매장했습니다.

미개인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체로 형성되는 과정과, 형성된 후에 현실에서 살아가는 기간, 그리고 인간의 혼이 사후의 세계에 가서 머무는 단계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환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원시 종교와 이방 종교에서 생의 마지막은 육체가 없는 혼만으로 존재하는 유령과 같은 존재, 아니면 환생하여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단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영혼불멸이나, 환생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삶의 변형-몸의 변형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변형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죽은 후에 시작되지 않고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새 생명의 삶으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요11:25-26)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새 생명의 삶은 부활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 새 생명의 삶은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만 내재적인 기쁨, 희망만이 아닙니다.

그 새 생명은 몸의 형체도 구체적으로 변형시켜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세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도 느끼거나 들여다 볼 수 없는 깊은 무의식 세계에서 성령에 의한 새로운 몸, 삶에로 향한 태동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형체를 만드는 미세한 생식 세포가 여자의 인체부분의 가장 숨겨진 부분에서 생명체로 잉태되는 것과 같이, 부활의 새 생명의 영은 우리의 인격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나 자신(영)을 깨웁니다.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혀 전혀 다른 세계를 보지 못했던 미개인과 같은 영이 깨어나면서 새로운 형체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어떤 육신적 형체를 추구합니다.

"이 육신은 교제, 의사소통, 그리고 자아정체성의 수단으로서 필수적입니다."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의 영혼이 입은 육체의 형체와 진정한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육체의 형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눈매, 언어의 표현, 손짓, 걷는 모습, 교제는 그 전과는 점진적으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자아중심이 아닌 그를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새로운 소명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설명하기 위해 씨앗을 그 표상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한 씨앗의 표상에는 신비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각 씨앗에는 고유한 몸이 있다고 했습니다. 씨앗으로 있을 때에는 그 몸이 나타나지 않지만 일단 땅에 심겨져 썩어 새 생명으로 태어날 때 그 씨앗에 담겨진 고유한 몸이 드러납니다. 그 때에 드러나는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의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영혼만이 아닌 분명히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몸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부활 전의 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형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격 전체의 변형을 의미합니다. 그 변형된 몸은 옛것과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씨앗과 그 씨앗에서 생겨난 새로운 식물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육적인 존재와 부활의 몸 사에에는 그와 같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연속성은 '나'라는 존재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활 전의 나의 인격적 특성, 즉 나의 성격, 나의 모습이 부활의 때에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더 참된 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부활 때에 부활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단절된다면 우리는 나 자신도 나를 알아볼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함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신앙 생활하던 형제, 자매들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것이라"(고전13:12)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 현실에서 우리 각자의 몸의 형체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래의 나의 형체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것에 의해서도 가리워지거나 억압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 본능적인 모습입니다. 그러한 나의 모습은 매우 거칠기도 하고, 유아적이기도 하고, 수집어하기도 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공동체 생활에서는 가급적 숨겨져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그러한 모습이 들어날 때 우리는 서로 상처를 받거나 상대방을 거부하거나 실망합니다.

다른 하나는 꾸며진 나의 형체입니다. 이것은 주로 자기 인식이 생기면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도덕, 종교, 체면, 분장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모습이 공동체 생활에서는 피상적인 교제, 꾸며진 언어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로 서로 좋은척 하거나, 상대방의 심기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웃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의 새 영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로 형성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형체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는 본능적인 모습, 꾸며진 모습들이 떡잎처럼 떨어져 나가면서 진실, 우의, 사랑, 이해, 받아들임으로 그 형체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삶에서 우리는 행복, 의미, 기쁨을 경헙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몸은 세 번째에 속하는 몸의 형체로서 온전한 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미래에 숨겨진 온전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한 가지 달라진 것은 그 전에 입었던 육체의 몸이 아닌 부활의 새몸으로 바뀝니다.

부활 전에 입고 있던 내몸이 새 피조물의 삶이었다고 하드래도, 나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나의 몸은 어디까지나 흙(물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44)고 했습니다. 씨앗이 땅에 심기워져 그것을 감끵던 물질들이 분해되는 것처럼, 우리의 육의 몸도 죽고 부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씨앗에서 나온 생명에게 새로운 형체를 부여하시기 때문에 그 씨앗과 새로운 식물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육적인 존재와 우리의 영의 몸 사이에도 그와 같이 연속성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몸은 부활 전의 몸과는 완전히 다른 몸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단순이 겉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인격을 의미합니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포함해서 몸 전체의 변형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부활의 표상으로 제시한 씨앗과 같이 죽음은 한 인간의 삶의 형태와 삶의 변형이지 삶이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존Dasein에서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아울러 새로운 몸의 형체, 즉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진 부활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이 현세의 삶으로 다시 돌아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감, 즉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을 뜻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본문54절의 내용대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 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멸할 이 삶 전체에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멸할 삶 전체에 그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은 52절에 의하면 변화와 변용(빌3:21)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치유와 화해와 완성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은 하나님에게서는 그 무엇도 상실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마지막 순간뿐만 아니라, 그의 전 역사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상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디오 필름에 담겨져서 영원의 하늘 속에 보존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삶은 거의 대부분이 실수, 질병, 눈물, 한숨, 탄식의 경험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전 역사는 이미 화해되었고, 올바르게 회복되었고, 치유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삶의 역사로서의 발견입니다.

이 현세에서 심한 장애인으로 살던 삶이나,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삶도 부활의 때에서는 치유되고, 보상되고, 완성된 삶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그 때가 기쁨과 은혜, 감사, 영광의 때가 됩니다.

부활이 새 창조라함은 완전히 옛 것과의 단절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멸할 이 삶의 영원한 삶으로서 새 창조를 의미 합니다.

곧 우리의 삶이 신적인 삶 속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에서 새 창조입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영soul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내재를 의미합니다.

신학자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의 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몸과 영혼, 과거와 미래, 사회적인 관계와 자연적인 관계를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실현 됩니다. 이 하나님의 영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살며 하나님의"빛나는 얼굴"은 그의 영의 현존 속에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뜻에서 죽음은 인격 전체의 폐기가 아니고 인간의 삶의 형태의 변형입니다."

부활의 몸은 창조 때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던 본래의 나의 형체입니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속의 은혜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참 나 자신의 모습니다.

우리 각자는 어머니의 몸에서 형성되는 시간부터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가운데 있는 본래의 나의 나됨으로 되어 갈 수 없는 부정적인 인자들로 형성됩니다. 거기에는 나의 부모의 운명, 어머니 태에서 형성되는 기간동안 받는 영향은 이미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른 손상된 형체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러한 죄의 영향에서 구속되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참 나의 형체로 되어 갈 수 있는 구속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그러한 구속의 은총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체의 몸이며,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부활의 영광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에 살면서 그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 소망 가운데 있는 우리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지난 주와 금 주가 다르고 , 작년과 금 년이 다릅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