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7:17-24 요 20:19-23  

가장 귀한 선물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건강 아닐까요? 한 가정에서 가장이 쓰러진다면 그 가정에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들이 생길까요? 가정에서 가장의 존재, 어머니의 존재,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귀중한 선물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첫째가 좋은 건강과 풍성한 영성일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여 왕성하게 일하고, 영성이 충만하여 영적인 지도를 잘 하는 것이야 말로 교회를 위한 헌신일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돌아가신 분이 있다면, 그 남편이 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살아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당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우리에게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그저 매 년 한번씩 지나가는 절기로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활신앙없는 부활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탄절 축제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유럽사람들은 부활절을 국가 전체에서 절기로 지킵니다. 부활절을 기념하여 학교는 3 주일간 방학에 들어갑니다. 3주일씩 휴무를 하는 개인 병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활절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갖가지 부활절 계란을 선물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부활절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문제는 그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없다는 점입니다. 부활절 음악회도 있고, 부활절 카드도, 선물도 있고, 휴가와 방학도 있는데 정작 부활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부활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이 없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절대로 정신적인 승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나시다면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부활한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정말 봐야 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직접 대화하고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삶이 변합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인생을 새롭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부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열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네 가지 말씀 ? 네 가지 선물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집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네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네 가지 선물이 들어 있습니다.


1.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의 선물

부활하신 주님의 첫째 선물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였습니다.

평강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만이 평화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샬롬을 주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1. 샬롬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사람들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사랑이 깊으면 슬픔도 큰 법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큰 슬픔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몇시간 후면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다가 장사를 지낼 시간이 불과 한 두 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몇 명의 여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예수님의 시신을 씻기고, 향료를 바르고 베옷을 감고 장사를 지내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애서 대강대강 장례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안타까움이 이 여인들을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이 여자들의 무리 속에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마자 새벽에 마리아는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마리아는 슬피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인줄 모릅니다. 동산지기인줄 알고 대답합니다.

“당신이 우리 주님을 옮겼으면 어디 두었는지 말해주세요.”

이때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십니다. 이제서야 마리아는 그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듣던 낯익은 음성, 부드러운 음성, 사랑이 깃든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마리아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슬픔은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슬픈지 모릅니다. 부모님의 돌아가심,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 사고와 재난, 질병, 고난, 실패, 좌절, 재앙, 갈등, 미움, 증오, 질투 등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 인생은 낮에도 슬픔과 걱정 속에서 움직여야 하고 밤에는 숨 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슬픔에 가위눌려 살아갑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평화를 주노라.’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잃어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자식을, 형제를, 부모를, 친구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5년, 10년이 지나도록 그 아픔이 사라지지 않아 언제나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위로의 음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슬픔을 버리고 기쁨의 웃음을 웃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샬롬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다음으로 열명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열 명의 장정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하며 환호하던 백성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못 박으시오’ 소리질렀습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제자들은 감히 길에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공포감이 파도처럼,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밤에도 낮에도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제자들이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이 세상에는 스탈린, 히틀러에 의한 잔인한 박해가, 독재자의 폭력이, 전쟁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직장을 언제 잃을지 모르는 공포,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내가 쌓은 큰 명성이 결정적인 손해를 입고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원인모를 공포가 있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위대한 의인에게 고난이 몰려오자 그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부자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방의 최대 부자요, 인격자요, 의인이요,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이처럼 복을 누리며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의로웠던 믿음의 사람 욥조차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20대의 젊은이들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래 문제, 졸업, 취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내가 준비하는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인간관계와 결혼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떠나가면 어떡하나?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죽으면 어떡하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부활신앙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샬롬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밖에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도마는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경험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합리주의적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의심을 버렸습니다.

의심은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두 마음을 한마음되게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오면 불안한 의심이 사라지고 믿음이 생깁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사명의 선물

부활하신 주님의 두번째 선물은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선물은 파송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할 일을 잃었습니다. 무노동의 비극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일감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이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우리는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3. 성령을 받으라 ? 성령의 선물

예수님의 세번째 선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첫째 선물인 평화도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본질이 평화의 영입니다.

두번째 선물인 파송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선물로 받고서 비로소 예수님의 파송 명령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들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는 숨이 없이는 말을 못합니다. 말은 숨을 내쉬며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행위와 숨을 내쉬며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는 동시적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서 산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하나님의 숨결, 성령이 인간에게 들어와서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이요, 숨이요, 생명입니다. 성령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생명은 힘입니다. 용기입니다.

숨을 내쉬며 하는 말은 생명을 담아서 내 뿜는 말인 것입니다. 영이 담긴 말입니다.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말은 생명을 담아서 하는 것입니다. 영이 담긴 말은 영을 전하고 생명이 담긴 말은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말을 통해서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부활의 영으로 하는 말은 재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를 부활의 주님께서 다시 한번 생명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혼을 재창조 하십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십니다.


4. 죄를 용서하라 ? 용서의 선물

예수님의 네번째 선물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용서는 거듭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이 새 생명을 가지고 가장 먼저하는 일이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하는 일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심판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완전히 승리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권세

그런데 용서는 큰 권세입니다. 용서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약속입니다. 사람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이루어 진다는 것은 굉장한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대에 누인 채 예수께로 날라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기운을 내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 용서의 권위를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9).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죄 용서의 권위를 모든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3).

이제 오순절 제자들이 예루살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에 갑자기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받은 제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나라 말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제일 먼저 앞장서서 설교를 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결론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체험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세례받은 사람의 수가 삼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소식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용서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의무

다음으로 죄사함의 선포는 우리에게 의무입니다. 우리의 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메워 주신 멍에입니다. 세상의 죄의 멍에가 아니라, 하늘 나라를 향한 거룩한 부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근심과 걱정과 증오와 미움의 짐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벼운 짐입니다. 용서의 가벼운 짐을 지는 사람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 집니다. 그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용서의 반대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관한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안하는 것은 용서의 대상을 죄의 상태에 머물게 두는 것입니다.

권세와 권력은 잘 사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용서의 특권을 잘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용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아름다운 특권, 권세를 쓰십시오. 권세를 쓰지 않으면 빼앗기게 됩니다. 용서의 의무를 빨리 행하시기 바랍니다. 의무를 하지 않으면 벌 받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용서의 능력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있어야 우리가 이 세상에 평화의 일군이 되고, 사명자로 살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용서를 통한 화해를 전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살립니다. 사회의 암흑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온갖 병자와 장애인들에게, 가난에 찌든 사람들, 무수한 죄인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 남자들의 착취의 대상이 된 여자들, 착취하는 남자들, 물욕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을 살립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은 멀리만 계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계셨던 분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일 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 광고에 불과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배란 한낱 과거의 희생 제사일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온 우주의 잠을 깨우고 하나님 나라를 낳는 산고를 겪게 합니다.

부활 신앙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 계셔서 숨쉬고 계시는 것을 느낍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교회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으로 변합니다.

부활신앙이 있어야 선교가 성령강림의 축제로 변하며,

부활신앙이 있어야 예배는 구속의 사건의 기념이 되고 천국 잔치에 미리 참여하는 기쁨이 됩니다.

부활신앙이 있어야 우리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생명력으로 충만한 여러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