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4~17


2007년 정해년 돼지해입니다. 금년에 들어와서 두 가지 큰 강조점이 있는데 그 첫째는 ‘복 돼지 캐릭터’입니다. 복 돼지 캐릭터가 붙지 않으면 물건이 팔리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품에 이 복 돼지가 등장을 했고, 방송주제로도 계속 복 돼지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서점가에도 수많은 책들이 복을 주제로 돼지와 연관해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장 호황을 누렸던 업종은 무당과 점쟁이들입니다. 엄청나게 점을 많이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오늘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들은 점을 보고 나온 사람은 없는 줄로 압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 복 돼지 열풍에 휘말려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미신은 선진국에도 대단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후진국에 미신과 선진국의 미신은 성격상 구분이 있습니다. 보다 선진화된 미신도 수그러들지 않고 성행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강조되는 이슈는 변화, 개혁입니다. 일간신문들이 변화를 주제로 많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모 신문사에서 ‘변해야 산다’는 특집으로 기사를 계속 싣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정부가 변해야 되고, 기업이 변해야 되고, 노조가 변해야 되고, 교육이 변해야 된다, 모든 면에 변해야 된다는 당연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특징은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교회도 변해야 된다 라고 교회의 변화를 교회 안에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모순에서 변화가 와야 된다, 현재 우리 모습이 기준이 아니고 만족이 아니다, 우리가 모순을 많이 안고 있으면서도 모순이 없는 사람처럼 가장하는 틀을 깨야 된다, 우리가 부도덕을 많이 안고 있으면서도 마치 부도덕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우리의 인품과 행위를 다 깨트리고 변해야 된다는 요구입니다.

두 가지 새 것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귀한 변화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찢어져서 둘 다 버리게 된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둘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앞에 강조되는 말, ‘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는 변하지 않아야 새 포도주가 됩니다. 부대는 변해야만 새 부대가 됩니다. 정반대입니다.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와서 전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변하면 부패합니다. 복음은 부패하지 말아야 되는데 복음이 부패합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도 부패하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의 믿음도 부패합니다. 부패한 믿음, 그것은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변치 않아야 한다, 즉 우리가 믿는 진리는 변치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부대는 시시로 변해야 됩니다. 이 부대는 하나님과 대별되는 피조물의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 외의 것은 다 변해야 됩니다. 다 낡아집니다. 다 후패해 갑니다. 한 가지도 원형이 없습니다. 이 땅위의 모든 피조물은 변하지 않으면 새 것이라는 개념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부대는 직접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씀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메시아를 배척하는 유대주의자들의 그 낡은 사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격이 부대입니다. 인격은 날로 새로워져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 안에는 영성이 거해야 됩니다. 영성의 주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영성이 인간 마음속에 늘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늘 변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으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이제는 복을 받고 은혜를 받았으므로 받은 복을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모든 영역에 불가피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전부 낡아지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이 변화는 우리에게 늘 도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변해가 된다는 여기에 많은 도전이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마다 그 복음의 본질을 담고 교회가 변해 왔습니다. 교회의 변화에서 복음이 변하는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교회는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행정이 변해가야 합니다. 교회구조가 변해가야 합니다. 예배의 형식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찬양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전도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모든 영역의 세계교회는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놓치느냐? 놓치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터넷 세계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기존세대들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혹은 사람들이 전해주는 말을 통해 정보를 얻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인터넷 세계에서 정보를 다 접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인터넷에 복음을 실어서 전도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우리의 전도를 들을 기회가 없고 또 듣지를 않습니다. 모든 정보가 인터넷 세계로 젊은 세대들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방송을 통하여 홍보하지 않으면 자기를 알릴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교회의 복음도 방송을 통하지 않고는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문서를 통하지 않고는 복음은 교회 안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봉사를 통하지 않고는 복음이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의료봉사를 해야 합니다. 복지봉사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구제와 복지에 복음을 싫어 보내지 않고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복음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끊임없이 도구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방법과 사역은 계속 변해가야 합니다.

방법은 변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변할 것은 신앙생활의 형식입니다. 우리가 변해야 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1907년의 평양대부흥을 회복하고 계승하자는 열기와 구호와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앞으로 평양대부흥 100주년 이름으로 수많은 집회가 한국교회에 교단별로 연합별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양대부흥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자료와 증거에 보면, 그 부흥의 본질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평양대부흥을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오늘의 교회부흥을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평양대부흥의 직접적인 동기는 1907년 1월6일에서 10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때 길선주 장로가 회개하는 일로 시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교인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이 거센 회개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고, 선교사들이 회개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원산 창전교회의 교파 합동기도회에서 선교사들이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운동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길선주 장로님이 회개한 주제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형제를 질시한 죄-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사람을 괴롭힌 죄에 대해서 회개를 했습니다. 또 하나는 방위량 선교사를 미워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방위량 선교사는 초기의 선교사 가운데 이름 있는 분인데 이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 간에 알력이 더러 많았습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백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보면 ‘양대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선교사들은 양대인이다’ 서양의 큰 사람들이라고 구별을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 당시에 민도가 형편없는 우리나라 한민족들을 보고 멸시를 한 것입니다. 흑인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선교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우월감을 버리지 않고는 전도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선교사들이 그 죄를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교계 목사와 장로들도 선교사들을 상대적으로 미워하게 된 것인데 이것 때문에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죄를 길선주 장로님이 회개한 것입니다. 길선주 장로님은 후에 한국교회 초기에 7대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임직을 하게 됩니다. 이 길선주 목사님이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데이빗 선교사는 이 길선주라는 사람과 또 한 성도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를 했다고 증언을 합니다.

회개와 생활변화

그런데 이 평양 대부흥운동에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 많은 회개운동에 무엇을 회개했는가? 첫째, 사람을 미워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모두 인간끼리 상처가 많았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선교사와 한국교회 지도자들 간의 갈등, 교인들과 교인들 간의 갈등, 서로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질시했던 그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축첩’과 ‘음주’와 ‘금연’에 대한 회개가 철저히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사회는 축첩이 대중화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똑똑하고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은 다 첩을 두고 살아야 잘나게 보이는 시대였고 축첩을 사회 관습적으로 그대로 용인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 축첩이 용납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음주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것들은 죄다, 우리가 이것을 청산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다음에 곽안전 선교사님이 한국교회사를 썼는데 그 안에 나오는 내용물을 보면 수많은 성도들이 통회자복하면서 손해를 입힌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면서 놀라운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고 도덕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생활의 변화입니다.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한 그 죄를 회개하고 축첩과 음주, 흡연, 부도덕을 전부 청산하고 물질로 형제에게 손해를 끼친 일들을 전부 배상하는 도덕성의 회복이 평양대부흥운동의 본질입니다. 그와 같은 회개의 역사 앞에 하나님은 성령의 불길을 평양교회 위에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에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부흥운동을 이어가자는 것이 2007년도의 한국교회의 이슈입니다. 어떻게 해야 부흥이 일어날까요? 평양의 회개운동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재현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평양의 회개운동 없이 부흥을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집회는 백 번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너무 배부른 죄가 많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안 짓는 죄도 배가 부르면 짓는 죄가 많습니다. 우리는 진정 지금 교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은 철저히 회개할 일입니다. 성령께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죄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심령에는 절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도덕을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인 중에는 축첩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습니다. 장로, 집사 중에 내연의 처를 두고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장로, 집사로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습관적으로 술을 먹으면서 아니 술에 취해서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담배냄새를 피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 정도 문제는 한국교회가 평양부흥운동 100년 동안에 거의 청산이 되고 정착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도덕성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할 일이 없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회개할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청산할 게 없다는 말입니까? 오늘 저의 눈으로 볼 때 목사를 비롯해서 한국의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회개해야 될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돈에 얽힌 죄입니다. 돈으로 저지른 죄가 너무 많습니다. 돈 때문에 지은 죄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이 돈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철저히 그 상처를 돈으로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배상하지 않고는 물질로 지은 죄는 회개가 안 됩니다. 물질로 지은 죄는 물질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삭개오의 모델입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모든 죄가 돈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는 돈을 가지고 죄를 회개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돈으로 저지른 죄는 내가 아무리 회개해도 상대방이 내 회개를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므로 돈으로 그 상처를 보상해주어야 상대방이 내 회개를 인정해 줍니다. 그럴 때 하나님도 내 죄를 사해주는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소한 돈이라도 사람에게 상처를 준 돈이 있거든 회개하십시오. 청산하십시오. 배상해서 회개하십시오. 그것이 평양부흥운동의 본질입니다. 생활의 변화 없이, 죄의 청산 없이 우리는 입으로 회개를 많이 합니다. 구호로 회개를 많이 합니다. 집회에서 선언문으로 회개를 많이 합니다. 기도할 때 울고불고 기도로 회개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청산하는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청산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회개의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라는 회개는 청산입니다. 죄가 청산되지 않으면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집어먹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변해야 됩니다. 버려야 변하고 청산해야 변해집니다. 그래야 더러운 상태에서 못하던 것이 깨끗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새 것의 균형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균형을 말씀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포도주를 붙잡고 변하는 부대로 새 포도주가 되어야 된다는 균형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변질시키면 안 됩니다. 왜 복음이 변합니까? 왜 우리 믿음이 흔들립니까? 세상 것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내 육의 것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순물이 들어오면 순수한 것이 변합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 것인데 인간의 불순한 것들이 섞이면 우리가 믿는 복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왜 부대가 변합니까? 안 변하기 때문에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대는 계속 변해야 합니다. 항상 새 것이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이 수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수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좋은 모범을 본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좋은 교훈을 본받아야 됩니다. 좋은 것들이 들어와야, 수용이 일어나야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국수틀에서 국수가 나오는 것이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국수가 마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국수틀에 국수반죽을 넣어야 국수가 나옵니다. 우리의 인격 속에 좋은 것이 들어와야 변합니다. 현재 내 안에 불순한 것, 불결한 것, 부도덕한 이것은 깨끗한 것이 들어와야 변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수용, 기도로 수용하는 일, 성령의 역사로 수용하는 여기서 거룩함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될 우리의 믿음이 변하는 것이 위기이고 진정 변하면서 새롭게 되어야 할 우리의 인품과 우리의 행위가 변하지 않는 이것이 또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세 가지 기술면에서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하나는 전자기술이고, 하나는 우주과학이고, 하나는 생명과학입니다. 이제 우리 식단에 복제고기가 대중화될 날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이미 복제고기가 출시되었습니다. 시식도 하고 있고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식탁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자문명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얼마 전에 스타트랙 영화를 보았는데 10년 전에 스타워즈라는 우주공상과학 영화를 보면서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기하다고 느꼈는데 요즘 스타트랙을 내 심경에 전율이 일어나는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이 우주에 가서 우주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낯선 우주인들과 대화가 그대로 됩니다. 왜 그게 가능하냐? 그 사람 몸에 만능 통역기가 장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자 칩이 만능 통역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그램을 작동시키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그대로 실물처럼 내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 홀로그램 작동과 전자로봇 기능, 이 만능 전자기능을 장착하여 앞으로 학습에 도입한다면 이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한중구 교수는 경제학자로서 그의 글에서 이렇게 경제코멘트를 했습니다. ‘이것이 학습에 도입되면 학습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맨큐 교수의 강의를 듣고 싶으면 버튼만 작동하면 그 교수님이 앞에 실물처럼 다가와서 그분에게 질문할 수 있고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는 언어장벽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영어로 말해도 내가 들을 때는 한국말로 듣고, 내가 한국말로 말해도 상대방은 영어로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능 통역기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이제는 홀로그램 안에서 다 만나고 만능 통역기 안에서 언어장벽이 없어져 버리고 이제는 인간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년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기계만 작동할 줄 알면 되지 나이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경제학자의 마지막 결론이 그렇게 되면 인간은 결국은 기계를 작동하는 관리자 이상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다, 즉 위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공상과학영화가 십년 전에만 봐도 ‘아, 공상이다’ 하고 맘이 편했는데 이제는 안 그렇습니다. ‘저런 세상이 지금 내 앞에 한 발 두 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컴퓨터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얼마나 갈등을 하고 있습니까? 전자문화가 앞으로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전자로봇이 일반화되면 지금 가정생활의 패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로봇이 밥도 해주고 청소도 다 해주면 아내가 뭐가 필요하겠어요? 말 잘 듣는 로봇 하나 설치해놓으면 서로 맘 편할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뭐가 필요하겠어요? 전자로봇이 지금 단순히 일해 주는 기능정도가 아닙니다. 통역까지 다 해준다면 해외여행 할 때 장착해서 나가면 언어불편 없이 다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전자문명이 절대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우주과학이 우리에게 믿음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어떤 생물학도 인간의 인격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변치 않습니다. 이 포도주 되는 진리에다가 인간의 불순물을 섞지 말고 진리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복음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전적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그 다음의 것들은 변해가도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리에 전자문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돈이 자리를 차지하는 이것이 위기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지금 무엇이 위기냐? 하나님의 자리에 엉뚱한 것들을 갖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도 그 점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리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이 다른 것을 갖다 놓으면 우리의 신앙은 부패합니다. 하나님 자리 외의 것은 전부 변해가야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때 새로워지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재능도 시간도 돈도 복음을 위하여 쓰여질 때 그것이 새 돈이 되고, 새 시간이 되고,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