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수  (요 14:21-23)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복음의 진수”라는 좀 어려운 제목을 붙였습니다. 칼 힐티라는 분이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2월 24일자 일기에서 칼 힐티는 기독교의 신앙은 세 가지 말씀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세 마디말고 나머지 말씀들은 모두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진리 그리고 기독교의 진수는 다음의 세 마디 말씀 속에 모두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 말씀을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그 말씀이 다음의 세 말씀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7:3”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믿음이 뭐냐 하면 “예수를 아는 일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알고 그를 믿는 일 그것이 믿음이고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예수를 알기만 하면 다 되는데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보여주어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도 예수를 아는데 유식한 분들 중에 예수를 모르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으로 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복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그 복을 찾느라고 동분서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복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중의 복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이 이 예수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유산보다 큰 유산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예수를 확실하게 믿게 해 주고 알게 해 주었다면 그 부모는 부모의 역할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다되는 것으로 아는데 재산은 없어도 예수는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재산인가는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를 알고 믿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예수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을 만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수년 전에 라이나 화이트라는 18세 된 소년이 에이즈로 죽어 가는 것을 미국 TV가 보도하고 신문이 앞다퉈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았습니다. 그때 수술을 하다가 수혈을 했는데 그만 에이즈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년이 마침내 5년 후에 죽어갑니다. 그때 죽어 가는 그 소년의 투병기를 TV가 다큐로 보도했습니다. 이 소년이 죽어갈 때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다녀갔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특사를 보내서 소년을 위로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도 앞다퉈서 병원을 다녀갔습니다. 이 소년이 마지막 죽어갈 때 그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미국 국민들을 감동시켜서 많은 사람들을 울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한다니 아버지는 가슴이 아프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저에게 예수님을 가르쳐 알게 해 주셨잖아요, 저는 주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아버지는 누구보다 저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나는 조금 빨리 가는 것뿐이에요, 아빠의 말씀대로 나는 천국에 갈꺼예요“. 여러분,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아는 힘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가장 절망가운데 처했을 때 힘이 나오도록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 믿음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 예수를 아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지식입니까. 세상의 지식을 다 통달했다 한들 그 순간에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아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지식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삶이고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세상에 주시기 위해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두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14:21”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성경에 보면 계명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하라”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이 참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하라는 말과 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들을 보면 때로 사람을 구속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속박하는 느낌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젊은이들이 교회에 잘 나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모두 구속하고 속박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계명들은 알고 보면 속박이 아니고 더구나 구속도 아니고 그것은 큰복이고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참견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라하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런 참견을 몹시 싫어합니다. 모두 잔소리로 알고 간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잔소리가 깊은 관심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인정입니다. 보호하는 마음입니다. 전방에 가 보면 길옆에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뢰지대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울타리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왜 우리를 자유스럽게 돌아다니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 놓았느냐 하고 돌아다니면 망합니다. 그것은 사랑이고 은혜이고 배려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이 사랑의 간섭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계명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방법입니다. 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은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하고 헌신을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일들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힘들지만 계명도 지키고 의무도 행하고 땀도 흘리고 수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단언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제시하신 계명들을 지키려면 우선 수고가 필요합니다. 인내도 필요하고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려면 수고를 해야 하는데 그 수고를 감수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계명들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배려에서 나온 계명들입니다. 알고 보면 그 계명들은 모두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주신 것이 아니고 행복을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보람을 주시려고 은혜를 주시려고 주어진 조건이고 과정들입니다.

“주일을 지키라” 그것은 복을 주시려고 주신 명령입니다. “11조를 드려라” 그것도 복을 주시려고 세워 놓으신 조건입니다. “선을 행하라” 그것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조건들을 제시하시고 우리에게 꾸준하게 선을 행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고 즐겁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선을 행하면 우선 나 자신에게 행복함이 주어지고 즐거움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는 곳에 반드시 이 행복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먼저 내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네가 행복해집니다. 또한 이 세상이 건강해지고 밝아집니다.

얼마 전에 나온 통계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미국 미시건 대학 사회연구소의 심리학자 스테파니 브라운이라는 사람의 연구 결과입니다. 오래 사는 장수노인 423쌍을 대상으로 그들이 왜 장수하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한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웃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을 위해서 서로 돕고 봉사하고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심부름도 해 주고 봉사하며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삶에서 그 노인들은 삶에 기쁨을 얻으며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장수하게 하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인류의 기본 나이는 12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돕는 생활이 없고 혼자 살아가기 때문에 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위주입니다. 자기본위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행복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삶에 맛을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본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고가 발생하고 탈선이 일어나고 문제가 터지고 불행이 있습니다. 모두 나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속이고 뺏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시끄럽고 내가 불행해지고 네가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애완용 거북이를 길렀습니다. 이 아이가 그 거북이를 참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이 거북이가 죽어서 엎어져 있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위로해 주면서 대신 장례식을 잘 해주고 묘비도 세워주고 매일같이 꽃을 꽂아주면 되지 않느냐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거북이 장례식 준비를 했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죽은 거북이 시체를 가지러 가서 집으려 하니까 거북이가 일어나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거북이가 죽지 않고 엎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거북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았으니 기뻐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낙심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거북이를 쳐다보았다 장례식장을 보았다 한참동안 번갈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 거북이 죽여요”.

  사람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삶이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고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고 복을 받고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함과 깊은 감격과 은혜는 계명들을 지키며 살아가는데서 나옵니다. 여러분 보람이 어디서 나옵니까. 행복함과 즐거움이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놀러 다니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비싼 돈을 주고 고급 음식에서 음식을 먹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수고했을 때 주어집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했을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많은 계명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고 내 사랑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함께 하고 더불어 살고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말씀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요한복음 15: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러분, 복중의 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부작용이 없고 탈이 없고 부패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서 잡힌 고기는 많았어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해서 거둔 만나는 모아놓아도 썩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쌓아놓습니다. 쌓아놓으면 무엇합니까. 썩어버리는데, 부작용이 일어나는데, 체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뇌물은 받을 때는 기분 좋을는지 모르지만 곧 바로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옳은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벌어들인 재물은 반드시 그 삶에 부작용을 일으켜서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고난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고난도 내가 잘못해서 주어진 고난은 아픔이 큽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면목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고난은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 속에 웃음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입과 눈만 움직이는 완전한 불구자입니다. 그분이 눈짓과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그 시집의 이름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책입니다. 가수들이 그 시에다 곡을 붙여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를 +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나에게 이런 큰 기사가 없었던들 어찌 그토록 완악한 내 동포 일본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아픔과 잔인한 고통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열 배 백 배 천 배의 고통도 참을 수 있다“.

이 고통이 하나님이 주신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 앞에서 불평보다는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의미를 바로 인식하니까 오히려 그 고통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밖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오묘하며 신비합니까.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그만 계명도 속박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계명을 구속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얼마나 얕은 생각이고 철없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하고 음미할수록 맛이 있습니다. 깊이가 있습니다. 차원이 있습니다. 오묘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신묘막측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에 이 믿음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시는가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진정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