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감사 생활  (골로새서 2:6~7)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을 설명하려면 1500년대 영국교회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스페인과 영국은
그 국력에 있어 양대 산맥이라 할 만큼 쌍벽을 이루었는데 그 당시 세상은 두 나라의 침략 역사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요란했습니다. 지금의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23개국 언어가 스페인어 하나로 통하는 이유는 그
시절의 수백 년 동안 아메리카를 침략해 와 식민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문화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이 거의 40여 개국이나 됩니다. 영국이 온 세계를 지배했던 역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어와 영어만 가지면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불편이 없을 만큼 이 두 나라 언어가 세계로 확산되
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상대를 너무나 잘 알았던 두 나라는 전쟁의 충돌을 막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정치적 판단 하에 "우리
두 나라가 사이좋게 살면 세계는 우리 두 나라의 것이 될 것 아니냐?"라고 해서 왕실끼리 정략적 결혼을 했습니
다. 스페인의 공주 캐더린과 영국 왕실의 헨리 7세의 큰 아들 아더 왕자가 결혼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지 그 이후에 계속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영국의 아더 왕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죽은 대로 처리를 했으면 될 터인데 그의 동생인 헨리 8세가 형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여
기서부터 왕실과 교회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최강대국의 왕자가 무슨 여자가 없어서 죽은 형의
아내 부인인 형수를 데리고 살아야 되느냐? 기독교 국가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이렇게 교회가 들고 일어
났습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헨리 8세는 캐더린과 살아 6명의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5명의 아들이
다 죽고 메리라고 하는 딸 1명만 살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왕실에서 계속 일어나니 이때부터 헨리는 이성을
잃고 잔인해져 자기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부인도 6명을 얻었는데 그 중에 2명 둘째 부
인 앤블렌과 다섯째 부인 캐더린 하워드를 공공연히 사형시켰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게 이성을 잃으니 기독교 국
가에서 그 지도자를 좋게 보겠습니다. "이거, 나라 다 망했다!" 그러다가 헨리 8세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
은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았던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는데 또 금방 죽었습니다. 헨리 8세의 후
손들 가운데는 오직 메리라고 하는 딸 한명만 남았습니다. 그 딸밖에 없으니 여왕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습니
다. 이때 메리는 37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왕실과 영국 교회간의 마찰을 어려서부터 계속 보면서 자라왔고 더군다
나 영국 교회가 메리 여왕을 어떻게 취급했느냐 하면 "너는 사생아다. 정식으로 결혼해서 낳은 자녀가 아닌 사생
아다. 너희 아버지가 형수를 데리고 사생아를 낳았을 뿐이다."라고 자기를 그렇게 취급했으니 이 메리 여왕이 얼
마나 영국 교회에 원한이 쌓여 있겠습니까? 여왕에 올라서 가만있겠습니까? 아버지 헨리보다도 훨씬 더 잔인하
게, 피의 메리란 말을 들을 만큼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당시 영국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크랜머, 래티머,
리들리, 후퍼 감독들이 이 때 다 화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모두 불태워 죽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망명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침내 1620년 9월 필립 파더스라고 불리는 청교도 망명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기록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 올 때 남자 78명, 여자 24
명, 합해서 102명이 왔습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간 겁니다. 다만 가다가다 보니까 그들이 닿은
땅이 메사츄세스 프리모스라고 하는 땅에 배가 닿았습니다. 영국을 떠난 지 2개월 만에 거기 닿았습니다. 9월에
도착해서 곧 추위가 닥쳤는데 온 사람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에 죽었습니다. 그 이듬해 봄이 되어
인디언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옥수수, 완두콩, 밀, 보리 등을 파종을 해 첫 번째 거둔 곡식에 너무 감격해서
통나무로 예배당을 지어놓고 추수된 곡식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예배드리고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
들을 초청해서 야생 칠면조를 잡아서 요리를 만들고 팬케이크를 구워서 잔치를 벌여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
것이 유래가 되어서 지금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미국인들은 집집마다 한집에 하나씩은 칠면조 요리를 해서 나누는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해마다 더 아름답게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를 1864년 링컨 대
통령이 11월 넷째 목요일을 감사절기로 선포해 국민에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우리들의 조상
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신앙 유산을 만대에 계승하기 위해 이 날을 국가 축제일로 전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어떤 한 국가 단위가 아닌 세계적 단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축제 절기는 세
가지인데 그것이 다 기독교 행사입니다. 온 세계가 다 참여하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입니다. 유
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은 이때를 다 휴가로 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2005년이라고 하는 기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준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의 중앙에 서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온 세상은 청교도들과 인디언들이 나누었던 칠면조 파티
를 하면서 추수에 대한 감사와 즐거움을 갖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 봄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 생활을 할 때 넘치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씀을 해석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이 크지 않다고 하여도 그 여건보다 감사는 넘치듯이 하라는 뜻입니다. 별로
감사할 것이 없다 하여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항상 더해서 넘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감사를 표현
할 때가 있습니다. 감사는 우선 말부터 넘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음식 대접을 잘 받고 나서 "별로 솜씨도 없
는 음식을 먹느라고 혼났다." 이렇게 말한다든지 "그럭저럭 한 끼 떼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전달이 아닙니다.
마치 오늘과 같은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듯이 감사를 넘치게 하면 그 대접하는 자의 즐거움이 커집니다. 하나님
께도 그렇게 하란 말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같이 사역하던 부목사 한 사람이 말을 이상하게 해서 교인들 간에 시
험거리가 된 적이 있는데 그 부목사님과 심방을 마치고 나오면 "아이고, 목사님! 그 집 여자 참 재수 없게 생겼
어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돌고 돌아서 얼마나 시험 거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
라고 해도 잘 안 고쳐진단 말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온갖 일을 다 경험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목회자가 아주
기분 좋은 교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제가 30대 후반이었을 때로 기억나는데, 주일 예배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
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일 마지막에 어떤 사람 한명이 제게 다가오는데 그분은 한 60대는 되어 보였습니다. 저에
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면서 제 손을 붙잡고 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힘주어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찾
았습니다." 하시면서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순간적으로 6 25때 헤어진 우리 가족이 누가 있나 했었습니다. 내용
은 제 설교를 듣고 너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인데 표현을 어떻게 하시는지 자기는 육십 평생 자기 마음에 맞는
목사를 찾아다녔는데 오늘 찾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30대 목사가 '이야! 이런
교인도 다 만날 때가 있구나!' 그런데 그러고는 다음 주에는 교회에 안 나오는 겁니다. 나중에 다 알게 되었는데
이후로는 매주일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다니는 교회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나쁘
게 생각을 안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분 지난주일 거기서 만났습니까?" 서로 안
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민 목회를 하느라고 하도 목사들이 지쳐있으니까 하나님
이 이런 사람을 한명 주어서 이 사람은 돌아다니는 은사가 있다!' 그분은 뺑뺑 돌아다닙니다. 지금도 아마 돌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목사마다 용기를 주고 날마다 찾아다니는 분을 봤습니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 이상한 취미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빈 말이라도 이 감사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왜 하나님께 대해서 넘치는 감사를 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넘치는 감사 생활을 해야 되는 이유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거 하나면 됐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말 자체가 어떤 은혜에 대한 답변입니다. 감사한 일 가운데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
다. 우리가 어떤 때는 식사 한 끼를 나누는 정도의 감사의 가치가 있고, 어떤 때는 옷 한 벌의 사랑을 피차 나누
는 가치가 있고,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가치도 있고, 어떤 감사는 일생과 관계되는 가치도 있습니다. 물에 빠
져서 생명을 잃을 수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구해주었으면 평생 그것이 대해 감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크
고 오래가는 감사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 영생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뿐
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연결되는 영원성의 가치가 되기 때문에 이 한 가지 조건만 가지고도 너희
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었다든지 집안에 어떤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것도 조건이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경우에 있다 해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조건
하나 때문에 넘치는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편 150편 가운데 가장 귀에 익은 시편이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그 시를 생각하였던 때는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많았던 때입니다.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닐 때 갈 곳이 없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이스라엘의 가장 험
악한 산 계곡 아둘람 동굴 속에서 살면서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몰래 몰래 얻어다준 밥을 얻어먹고 살던 시
절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3,000명의 정예 군사를 동원해서 다윗 죽이기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도와주었
다고 제사장 85명을 처형했습니다. 이제 다윗의 목숨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습니다. 죽을 일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왜냐
하면 이때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상황은 최악의 자리에 있는데 오직 주
님과 함께 있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시가 하
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받아 두고두고 오늘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의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영적 은혜가 된 것입니
다. 내가 처한 상황과 위치에서 영혼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감사할 수 있는 능력!
저는 목회자로서 있는 이 갈보리교회는 대형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교회에서 목회한다는 것은 그
릇에 비해 넘치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런 교회가 아닌 개척교회, 교인이 100명도 안 되는 그런 교
회에서 목회를 한다고 하여도 저는 마음이 똑같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제가 5곳의 개척교회를 했기 때문에 그
때 마음과 지금 내 마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 년 동안에 우리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의 숫자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일 년에 등록하는 그 사람만 해도 이건 큰 교회다.'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늘 생각합니다. 더구나 저는 시골 산골이었던 여기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아마 내가 목
사가 되지 않고 그대로 여기 살았다면 동네에서 어떻게 출세를 했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아마 분당에 이렇게
아파트가 많아졌으니까 '지금쯤 내가 어느 아파트 경비실 근무를 할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고 또, 공사가 이렇
게 많아졌으니까 '공사장에 나가서 잡부 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니면 '여기에 조그마한 농토나 가지고
경운기를 떨떨거리며 운전하며 다녔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수준을 항상 생각하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제자들이 길에서 심한 다툼을 했습니다. 예수님
이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토론한 일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 누가 크냐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갖다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그 자가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빌립보서에 대한 평가는 어떠합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
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하나님이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음심이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
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 이름 앞
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
라."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넘치는 감사 생활은 내 위치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나는 대단한 인물인데 상
황이 이게 뭐냐?' 그 사람은 평생 감사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누군지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대가리가 단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
백을 들어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못하는 일이 없다고 그랬습니
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느니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
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는 자기의
위치 설정을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죄가 많은 죄수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성도였지만 자기는 꼴찌란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만삭되지 못하
여 난 자, 모자라는 사람" 자신의 위치 설정을 믿음 안에서 그렇게 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쓰셨습니까? 2000년 동안 그 사람보다 예수님을 위해 더 큰 일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은 교만한 자는 대적해서 싸워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미국을 탄생시킨 열 명의 사람
가운데 벤쟈민 프랭클린은 그의 인생 좌우명이 뭐냐고 물었을 때 "평생 머리를 숙이고 살았습니다."라고 대답했
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청년 때 가난한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자기 집은 대문이 높아서 자기 집 생각
하고 친구 집 문에 들어가다가 얕은 문설주에 이마를 부딪쳐 기절해 쓰러졌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나중에
와서 말했습니다. "벤쟈민아, 내가 너에게 이를 말이 있다. 너는 평생 머리를 숙이고 살아라." 그래서 그렇게 살
았답니다. 미국을 탄생시킨 도시는 필라델피아입니다. 지금 그 도시에 가보시면 제일 높은 시청 건물 꼭대기에
벤쟈민 프랭클린의 동상을 세워놨고 도시법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벤쟈민보다 더 높은 건물은 건축
하지 못한다." 지금도 못하고 있습니다. 영원합니다. 낮게 산 자를 하나님이 제일 높은 곳에 두는 진리입니다.
감사할 것도 없는데 무슨 감사를 하란 말입니까? "나 같은 존재는 이렇게 비천한데 하나님이 무슨 은혜를 주셨다
고 감사를 하란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영생이 약속된 그 하나 만으로도 너희는 넘치는 감사하라!"
저는 부흥회 다니다가 음식 대접 받았던 음식점 이름이 하도 길고 특이해서 안 잊어버리고 기억하는 것이 있
는데 이런 이름은 세상에서 처음 봤습니다. 음식점 간판에 뭐라고 붙었느냐 하면 "바다낚시 갔다가 꽝치고 열 받
아서 차린 횟집"라고 붙여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 세계에서 이름을 길게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DR Second
Corinthians chapter 5:17"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라고 자기 이름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이름을 가지고 있
는 사람이 의사였는데, 병원 이름도 똑같이 지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 뭡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
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왜 이렇게 지었는가? 의사
들은 환자들에게 약물, 마약 이런 것을 취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환자들한테 그런 것들을 취급하다가 자
기가 알코올,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본인이 나쁘다는 것은 더 잘 압니다. 환자들에게 그런 거 하지 말
라고 늘 가르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걸려버렸습니다. 가족들이 울며 말려도 도저히 안 됩니다. 결과
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부인도, 자녀들도 모두 집을 떠나버렸고 자신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왜 이런 모양으
로 살까?' 그런데 도저히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갈등을 겪습니다. '마지막의 선택은 자살해 죽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이웃에게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내 인생을 끝내고 말자.' 그러나 자살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는 어느
날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가 있다는 간판을 보고 거기에 참석을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는 마지막에 결
신자 기도라는 것을 하는데 "주께로 거저 갑니다."라는 찬양하면서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고 해서 제일 먼저 앞으로 나가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는데 영적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그
는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됐느냐 하면 빌리 그래함 집회의 가장 훌륭한 간증자로
선택을 받아서 빌리 그래함과 함께 집회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이름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라고 지었습니다. 그의 간증이 뭔지 아십니까?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
은 다른 조건이 아닙니다. 무슨 다른 조건들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조건, 영원히 잊지 못할 조건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 간증을 하면서 다닙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이 "당
신 나와 함께 집회하러 다닙시다."라고 해서 전 세계로 집회하러 다니며 간증자로 나서서 집회를 하는 유명한 사
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풍성한 추수 계절에 손이 비어있는 형제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우
리 자신들이 다 알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는데 한국의 은행이 참 좋습니다. 그 마이너스 통장이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나 마이너스 통장을 들여다보면서 감사할 것이 없는 형제들도 얼마
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절은 모두 그러한 사람들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영적 축복을 받았다는 겁니
다. 역사적으로 로마 황제가 명령했거나 부유층 중심에서 창조된 절기라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
다. "아니, 자기들은 풍족하게 먹고 많이 누리고 남는 자들이니까 그런 여유가 있었지, 우리 같은 무산대중이 무
슨 감사절이냐?"라고 대중적 호응을 절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고의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곤란한 사람들이
가장 빈곤한 식탁을 놓고도 영혼의 문을 열어 "청교도들이 자유를 핍박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하나만
으로도 우리는 감사하다." 이렇게 감사한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그 영적 풍성함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세계화 되었습니다. 금년 2005년에 대한민국 상황은 수많은 실직자와 극심한 경기침체로 인한 한숨이 높은 해였
다고 평가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감사를 찾아내자는 것이 이 감사절의 의미가 됩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 삶의 기본이 되는 식량 생산만은 금년에 풍년을 이루어서 너무 많아진 쌀의 처리가 정부와 농민의 고
민거리라는 소리를 들을 때, 없어서 고민하는 것보다 감사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가나안 땅 정착 과정에서 원망과 불평의 결과가 어떤 것이며 감사와 찬양의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이나 나의 가장 어려웠던 때를 기준으로 감사 차원의 삶을 살아가십시
오. 틀림없이 그 결과는 아름답고 감격하게 열매로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빈약한 추수감사절
예배가 오늘의 미국 기초가 된 그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감사 뒤에 오는 하나님의 위로가 각 가정마
다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이 감사절의 역사적 유래는 가장 어려움을 당하던 사람들이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빈곤한 식탁을 놓고 마련한 절기가 됩니다. 그때를 생각하고 오늘 우리들은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을 부끄
럽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모두에게 주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