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31~32

교회설립 113주년 기념주일예배 설교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나간 113년 동안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893년, 하나님은 미국 선교사 Samuel Moore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 승동교회를 설립케 하셨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신분의 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그러면서 무어 목사님은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최하층 계급에 속했던 백정들에게도 전연 차별이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백정들은 거지보다도 더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백정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의 사상은 한마디로 “묻지 말라”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10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신분을 묻지 말라    2. 직업을 묻지 말라    3. 계급을 묻지 말라  

4. 당파를 묻지 말라    5. 학업을 묻지 말라    6. 재산을 묻지 말라  

7. 고향을 묻지 말라    8. 나이를 묻지 말라    9. 소득을 묻지 말라  

10. 과거를 묻지 말라

이는 우리 모두가 늘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4: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이미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음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힘써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 된 것을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우리 노회의 교직자회에서 어떤 미국 목사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의 한 여자 성도에게서 들은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여자 성도분이 비행기를 탔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여자 성도분이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기독교인이시지요.”

그러자 그는 놀랍게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 성도님은 미안스럽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사단에게 기도했습니다.”

그 여자 성도님은 너무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아니, 선생님은 사단에게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이번 주 내에 미국에 있는 30여 개의 교회가 서로 다투다가 분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사단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 성도님이 당혹스러워했던 것은 그 사단숭배자가 사단에게 기도하면서 너무도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눅22:31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농부가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를 보셨을 것입니다. 키의 앞부분은 넓고 평평합니다. 뒷부분은 좁고 안으로 오그라져 있습니다. 농부는 밀과 같은 곡식을 키에 담고서, 그것을 까부릅니다. 어떻게 까부릅니까? 때로는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위아래로 흔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키 안에는 알곡만 남게 하고 잡물은 다 키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밀 까부르듯이 우리들을 뒤흔들려고 합니다. 때로는 환난의 바람으로 뒤흔들어 놓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뒤흔들어 놓습니다. 사단이 우리들을 그렇게 뒤흔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6:37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내어쫓지도, 잃어버리지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지키시고 돌보시는 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 곧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에 따라서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32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본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반전을 가져오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격스러운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우리를 청구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8:34에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 값으로 교회를 사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이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이름도 승동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요, 날마다 승리하는 교회며, 앞으로도 영원히 승리하게 될 교회인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편은 존귀한 자리요, 영광스러운 자리요, 높임을 받은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셨기에, 예수님의 몸인 교회도 예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요11:41-4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간구도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사단은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지나간 113년 동안 사단은 우리 교회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흔들었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갈등을 통해서, 일제의 탄압을 통해서, 6.25동란을 통해서, 자유주의 신신학을 통해서, 도시 재개발이라는 법규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시고,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승동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뚝 설 것입니다. 영원할 것입니다.

찬송가 245장 1절입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지금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우리를 청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단의 청구보다 더 강력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원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휠씬 더 원하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바라는 것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휠씬 더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히3:1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비록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우리를 청구하더라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예수님은 사단보다 더 강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사단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를 자신의 키 속에 넣고 아무리 우리를 뒤흔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이십니다.
32절 중반부 말씀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만약 돌이킨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조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돌이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3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입니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리라는 사실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단이 베드로를 키질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2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단은 밀 까부르듯 하려고 베드로를 청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사단이 베드로를 키질하지 못하도록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베드로를 키질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키질 가운데서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키질을 역이용하셨던 것입니다.

키질을 하면 알곡만 남고 그외의 잡물들은 다 땅에 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사단의 키질을 역이용해서 큰소리 치기를 좋아했던 베드로의 교만이, 자만이 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혈기가 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붙들고 있었던 인간적인 모든 의가 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저 겸손하게 예수님만 의지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의 키질 속에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쓰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쓰셨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모세는 나이가 40이 되기까지 애굽의 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습니다. 그리해서 그 말과 행사가 능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 많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에게 붙어있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이 다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를 이용하셔서 모세의 자아를 철저하게 깨뜨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가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믿음으로 의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위대하게 쓰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교우 여러분! 우리 승동교회는 모세와 같은 교회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교회입니다. 우리 승동교회는 한국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요, 어머니 교회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들의 앞장을 서서, 민족의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바로 우리 승동교회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 동안 우리를 모세와 같이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통일 한국의 민족 복음화와 국제화 시대의 세계 선교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사단의 키질 속으로 내어주셨습니다. 1959년과 1960년, 우리 승동교회는 한국의 장로교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될 때, 그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사단은 그때 우리 교회를 몹시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앞날을 위해서 그 때 그 일을 허용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돌이키게 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그때로부터 희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희년이 되면, 50년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풀립니다. 원상태가 됩니다. 희년까지 이제는 불과 3~4년 남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분열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아시면서도, 사단이 우리를 키질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예수님은 희년이 되면 우리가 돌이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승동교회는 다시금 한국의 모교회, 어머니 교회로서, 모세처럼, 바울처럼 크게 쓰임을 받는 교회, 귀하게 쓰임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32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은 부시시한 미국의 대통령이 한 말이 아닙니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도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만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 곧 예수님의 어명은 반드시 그대로 됩니다.

“네 형제들 굳게 하라”고 베드로에게 명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홀로 가지신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남은 여생 고기나 잡으면서, 그럭저럭 조용하게 숨어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사도직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베드로가 형제들을 굳게 하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롯 유다로 인해서 공백이 된 자리를 제비뽑아 메우는 일에 주역이 되었습니다. 누가 오순절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으로 형제들을 굳게 했습니까?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누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굳게 했습니까?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그가 기록한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형제들을 굳게 했습니다. 그의 서신서에는 예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형제들을 굳게 하는 내용들이 특별히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컨대 벧전5:8~10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또 벧후1:10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고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했던 것처럼, 우리 승동교회도 그 동안 한국의 모교회로서 해야할 사명을 잊고서 이날까지 지내오지는 않았습니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왕으로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명하신 예수님! 오늘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서 우리에게도 똑같이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새벽 닭 우는소리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소리를 듣고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희년을 통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교회와 교단의 분열을 가지고 왔던 것을 회개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았던 것을 회개합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쌓여 살았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 속에 파묻혀 살았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가 새롭게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주어 교회에서 멀어지게 한 것을 회개합시다.

이 모든 것에서 돌이킨 후에, 우리는 한국교회의 모교회로서, 이 나라의 모든 형제들, 아니 전 세계 모든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명은 모세와 같고, 베드로와 같은 우리 승동교회에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사역을 친히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32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를 돌이켜주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한국의 모든 교회들을 앞장서서 이끌고 나아갈 선구자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키 위해 믿음으로 우리의 입을 넓게 여십시다. 교회 3대 비전에 따라 삼만 이천명의 성도와 백 명의 선교사 파송과 예배당 재건축의 비전을 품고 열심히 뛰십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비전을 친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승동교회에 이것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목격하실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