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7-8

오늘 세분의 장로님이 은퇴를 하십니다. 한분은 정년으로 은퇴하시고 두 분은 아직 정년이 많이 남아있는데 조기 자원은퇴를 하십니다. 세분 모두 신앙 안에서 살고 신앙 안에서 헌신의 삶을 살다가 오늘 일선에서 물러나 앉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마라톤 선수가 끝까지 뛰어서 완주한 것처럼 그동안 정신없이 신앙의 경주를 위해서 뛰어가던 경기에서 완주하는 시간입니다. 경기에서 일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완주하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 장애인들이 경주에 나서서 그 힘든 몸으로 뛰고 달리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일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완주하는 것도 대단한 아름다움입니다.

언젠가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부부가 심각하게 갈등합니다. 남편은 언제나 달리기 연습을 했습니다. 달리기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에 등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로 부부가 상당히 갈등이 깊어져 갔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달리기 연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내는 남편의 달리기 연습을 전혀 도와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주 외롭게 달리기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 경주의 날이 밝아왔습니다. 그날 부인은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경기장에 나갔습니다. 남편은 많은 참가자들 속에 끼어서 힘차게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뛰어갔던 선수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사람 두 사람씩 돌아옵니다. 그런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선수들이 거의 다 들어왔는데도 남편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도중에 포기했나, 혹시 넘어져 다친 것은 아닌가, 내가 따뜻하게 협력하지 않아서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가 별생각이 어지럽게 스쳐갔습니다. 경기가 해산되고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려는 순간 멀리서 한사람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걸어오는 것이 아니고 맥이 풀린 다리가 휘청거리면서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또 일어나고 그러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 부인은 그 사람이 남편인 것을 알고는 달려갔습니다. 남편은 완전히 탈진상태로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무의식적으로 골인지점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거부했습니다. 누군가 도와주면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겨우 일어나서 또 걷고 또 쓰러지고 그러면 또 가까스로 일어나고 또 걷고 얼마 남지 않은 골인 지점을 향해서 그렇게 애처롭고 힘든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골인지점은 몇 십 미터밖에 남지 않았는데 바로 그 앞에서 또 쓰러지고 나뒹굴고 아내는 옆에서 안타까워 죽겠는데 도와서 일으켜 주려고 해도 거부하고 자신이 있는 힘을 다해서 또 일어나서 걷다가 또 쓸어졌습니다. 그때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이 어찌되는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아주 가까스로 골인지점까지 다가가서 골인 선에 손을 대고 그만 남편은 실신해 버렸습니다. 이 남편은 아주 힘들게 완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때 그 아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남편을 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땀으로 얼룩진 남편을 끌어안고 키스를 합니다. 그때 박수갈채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관중들은 떠날 줄 모르고 환호와 박수로 완주한 그 남편에게 화답해 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여러분, 일등도 소중하지만 때로는 완주가 더 아름답고 위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너무 일등만 치켜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등한 사람에게만 박수를 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일등만 하려고 별 수단을 다 쓰고 편법을 쓰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이 은퇴식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신앙인 됨의 복”입니다.

저는 인생에서 최고의 복은 예수를 알게 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로로 예수를 알게 되었든 우리가 예수를 알고 살아가게 된 것은 복중의 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믿고 싶은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참 답답할 것입니다. 믿고는 싶은데 도대체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것도 참 딱한 일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아무나 가지는 것입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복입니까. 우리는 이것이 복이고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은 평생을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은혜를 입은 분들입니다. 우리들 역시 지금 이렇게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인 됨의 복, 이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혜이고 복입니다.

두 번째는 “직분자 됨의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 뿐 아니고 예수를 위해서 직분을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장로의 직분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만도 영광인데 그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직분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뜻을 가져야 합니다. 이 다음에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때 우리는 그 의미와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직분을 받아서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천국의 새예루살렘에는 큰 성곽이 있는데 그 성곽의 열두 문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하늘나라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광이 아닙니까. 또 그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의 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12사도 중에 바돌로매, 다대오, 시몬같은 제자는 명색이 제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들은 아무 한 것이 없이 이름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천국 새예루살렘 성전의 기초석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마 그것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위한 사도된 것을 그렇게 영광으로 알았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여러 번 여러 번 “사도된 나 바울은“하고 말합니다. 바울처럼 사도된 것을 좋아하고 자랑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소중한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소중한 직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무슨 일이나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서울의 어느 유명한 장로교회에서 임직을 했는데 직장에서 퇴직하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살면서 주일날이면 두 부부가 본교회로 올라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시무직까지 은퇴한 후에는 한달에 한번은 11조를 들고 반드시 본교회로 올라와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어느 장로님은 인도네시아에 가서 사업을 하는데 자신이 기도를 맡은 주일과 한달의 첫 주일은 꼭 본 교회에 돌아와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남편이 지방의 시장으로 부임을 했는데 수요일이면 반드시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와 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수요일 예배의 찬양대원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 4부예배때 서울의 어느 큰 교회 장로님 내외분이 와 앉아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몇 주 전에 교회에서 시무장로직에서 은퇴를 했다고 합니다. 시무할 때는 다른 교회에 갈 수가 없어서 가 보고 싶어도 가질 못했는데 이제는 은퇴를 했기 때문에 평소 가 보고 싶었던 교회를 순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직분의식입니다. 직분자에게는 이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와 집사가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맡은 직에 충실한 것이 임직자의 자세입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은 반평생을 그 장로직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공식적으로 시무직에서 은퇴하고 물러나 앉게 됩니다. 축복입니다. 직분은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직분들이 소중한 것을 오늘 새롭게 인식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잘 끝냄의 복” 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참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미래나 장래를 예측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내 운명의 내일을 알 수 없고 나의 앞길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옛날에는 미래가 아주 분명했습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정년이 보장되었습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어느 정도는 그대로 살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이 예측이 안 됩니다. 오늘 근무하던 일자리에서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지 나 자신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오늘은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잘 근무하다가 명예스럽게 은퇴하고 정년을 맞는 일이 흔치 않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년이 되어서 명예스럽게 은퇴하는 분들을 보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 한편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또 마음으로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나도 저렇게 성공스럽게 은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잘 끝냄의 복, 이것도 상당한 복입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은 아무 대가 없이 장로직을 잘 수행하다가 오늘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끝맺음이 분명하고 명예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은혜이고 복입니다.  

네 번째는 “좋은 인상 남김의 복” 입니다.


성공스럽게 은퇴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은퇴한다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떠날 때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좋은 전통을 남겨주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떠날 때 모두가 아쉽게 생각하는 떠남이 은혜로운 끝마침입니다. 모두가 지겹게 생각하다가 떠나는 날 사람들이 시원하다 하는 떠남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그래서 떠날 때가 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내가 은퇴할 때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 성공했다고 평가해 줄 것인가, 아니면 평가에 인색할 것인가, 이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가장 바른 평가는 사후에 내리는 평가라고 합니다. 생전에 하는 평가를 가치가 없습니다. 정승을 지낸 사람의 평가는 죽은 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정승이 살아 있을 때는 정승집의 개도 후한 평가를 받는 법입니다. 자리에서 임기를 끝내고 내려왔을 때 내려지는 평가가 진정한 평가입니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내려와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을 때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집니다. 그 평가가 진정한 평가입니다. 목회자도 목회를 다 마치고 난 후에 성도들이 내려주는 평가가 진정한 평가입니다. 장로도 은퇴하는 날 내려지는 평가가 진정한 평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죽기 얼마 전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인생을 다 살고 죽은 후에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평가를 받으려면 평소에 사람을 사랑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가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일을 끝냈을 때, 정년을 맞았을 때, 일생을 다 살고 난 후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평가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들 수록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까워오면 더욱 힘써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세분은 모두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또 두 분은 아직 정년이 몇 년 남았는데 젊은 분들에게 일을 맡기고 조기 은퇴를 하십니다. 모두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한일에 대해서 공인을 받는다는 것을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세분 장로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은퇴하시는 세분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끝마침의 만족함과 하나님의 상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 평생을 주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바울은 한시도 쉴 시간 없이 동분서주하며 오직 사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어느 날 종말이 가까워 옴을 알고 그때의 심경을 고백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얼마나 만족함의 고백입니까. 우리들이 세상에서 일을 끝마칠 때도 이렇게 만족함이 있고 신앙이 길을 다 걸어가고 마칠 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정년은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뛰었다는 말입니다. 성공스럽게 잘 마쳤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보람에 살고 뜻에 사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신앙인은 사명에 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생각했던 그대로 만족스럽게 신앙이 길을 잘 걷고 끝마쳤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오늘 정년으로 완주하신 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도 적절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 가장 성스럽게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주어진 직분을 충실하게 이루어내는 결단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은혜의 삶이고 축복의 삶이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로부터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은혜를 입고 복을 받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