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24-29

"가을 들녘의 추수가 이제는 거의 끝난 것 같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위해 농부들은 여름 내내 많은 고생을 합니다. 모내기에서부터 벼를 말릴 곳간에 들어가기까지 쉬는 날이 없습니다. 제 자신 농사꾼이 아니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오래 전 제 아버님이 농사짓는 것을 보니까 모를 심어 추수할 때까지 비료를 모두 세 번 뿌려줍디다. 첫 번째 모내기 후 일주일 정도 지나 뿌려 주는데 이는 뿌리를 잘 내리도록 하는 비료요, 두 번째는 뿌리가 내린 뒤 벼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 뿌리는 비료요, 세 번째는 열매를 잘 맺도록 하기 위해 뿌리는 비료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료도 너무 많이 뿌리면 벼의 생육에 지장이 오고, 너무 적게 뿌리면 벼 포기가 빈약해 추수를 많이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치 벼가 자라는 과정과 같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시기가 있고, 성장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열매를 맺는 시기가 있습니다. 인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뿌리를 내리는 시기가 있고, 성장의 시기가 있으며 또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도 있습니다. 이 때를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최근 미국의 봅 버포드(Bob Buford)라는 사람이 "후반전(Half Time)"이라는 책을 써서 많은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생을 하나의 운동 경기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인생의 전반전을 치르고 이제 후반전만 남겨놓고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대답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생이 여름철의 벼와 같다면 지금은 어떤 비료를 뿌려야 농사에 실패하지 않고 풍성한 추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봅 버포드는 이 책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35세부터라고 봅니다. 그는 ""35세부터는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성공하겠다. 부자가 되겠다."는 것에서부터 가치 있는 일, 의미 있는 일로 전환하라.""고 인생 개혁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 떠나는 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인생의 훌륭한 추수를 기대한다면 이제부터는 의미 있고, 뜻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인생을 쏟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개혁 없이는 종교의 개혁이 없고, 신앙의 새롭게 되지 않고는 교회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82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중세기 기독교가 부패하고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생명력을 잃고 있을 때,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교회의 오류 95개 조항을 게시해 놓고 우리 한번 이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를 통해 새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외친 지 48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때에 한국 교회의 각 교단이나 각 신학교에서는 개혁의 소리가 더욱 높습니다. 이제는 종교개혁보다는 교회개혁이라는 소리가 더욱 거세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종교도 새로워지고, 교회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이 새롭게 되지 않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오늘의 과제입니다.

I. 자신의 인생관과 신앙적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내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된 것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며...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며 바울은 자신이 새로워져야 하고 새롭게 결단하고 있음을 힘있게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이제는 개혁이라는 말 자체도 아무런 의미 없이 들려지는 형편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개혁을 위해 제대로 하고 있는 일들이 없다는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개척이나 종교개혁의 이론이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실정입니다. 교회가 새롭게 개혁되지 못하니까 이제는 교회 밖에서 교회 개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24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구속적 고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이 부족하거나 미완성이거나 고난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건설, 세계 선교, 이방인 선교 즉 하나님의 교회 섬기는 일로 지금도 당하고 있는 복음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고난을 기뻐하고 이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선언합니다.

오늘까지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 유례없이 성장하고 부흥해 왔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교회를 위하고 선교를 위하고 복음을 위한다고 뛰어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만을 위해서인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우리 교단 84회 총회가 지난 뒤에 어느 신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현재 총회장으로 당선된 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부회장으로 당선된 분은 교회의 참신성, 교회의 개혁성을 부르짖었고 또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 세기를 기대하면서 총회 부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거에서 부정이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는지를 신문지상에 단 한번만이라도 양심선언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이에 대한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각 교단의 수장들은 목소리를 높여 교회 개혁과 갱신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총회에 대한 생각만을 고정시키지 말고 우리 교회로,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나 자신은 하나님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자신이 교회의 중직자라면 중직자로서의 책임과 또 임직 과정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를 반성하고 나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교회 개혁이 가능하고 종교개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제직이라고 하면서 주일 안내, 헌금 봉사마저도 제대로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II.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교회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적 갱신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역과정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장벽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5절에서 ""내가 교회 일꾼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복음적인 생활, 즉 그리스도와 같은 섬김의 생활, 희생의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바른 모습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에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판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꺼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불교의 분위기는 마치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을 보고 불교는 가엾다고 생각하고 유교는 ""왜 빠졌을까? 조심해야 했는데..."" 하고 따지는 것과 같다면 기독교는 그 물 속에 텀벙 뛰어들어 건지려는 사람과 같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만약 기독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하는 종교라고 우겨대고 있기에 더욱 믿을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 주석가로 유명한 매튜 헨리가 하루는 자기의 돈지갑을 도둑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감사했는데 그 이유로 첫째는 그 많은 세월동안 오늘 처음 돈지갑을 도둑맞았기에 감사했고, 둘째는 지갑은 도둑 맞았어도 생명을 도둑맞이 않았기에 감사했고, 셋째는 이 세상에 별 사람이 다 있지만 자기 자신이 도둑이 되지 않고 도둑 맞는 사람이 된 것을 감사했고, 넷째는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의 모습은 섬기면서 기뻐하고, 손해보면서도 감사하고, 희생하면서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절대 손해보려 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 하여 소위 이기적인 집단처럼 비치기에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싸웁니까? 싸우지 마십시오. 왜 다툽니까? 다투지 마십시오. 왜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힙니까? 기쁜 미소를 지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III. 기도하는 만큼 바르게 사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만큼 기도생활을 강조하는 교회는 드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만큼이나 문제가 많은 교회도 드뭅니다. 그것은 기도와 생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문 1장9절부터 12절에서 골로새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며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게 하시고..."" 그리고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기도에 알맞는 자기의 헌신과 고난과 사명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삶이 뒷받침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만큼 바르게 사는 법을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그런 모습으로 사회에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바르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기쁘게 살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힘을 힘입어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이웃을 위해 손해를 봐도 인내하고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 북한산 국립공원이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훼손되고 있다는 뉴스를 바라보면서 ""기독교가 저게 아닌데...""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신종교, 무당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미신이나 무당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반면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이타적인 데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생을 하나의 도박에 비유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은 어떤 신을 택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잔인해질 수도 있고, 무한히 선해질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개혁과 갱신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과 인생관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바른 생활을 하는 훈련과 모범이 절실히 요구되는 그런 때에 우리는 종교개혁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출처/강동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