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장 22-23
서정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세상에 태어난 생명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자라고 성장하는 것처럼 영적 생명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모습도 자라고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아이 신앙에서 학생신앙으로 그리고 청년신앙으로 장년신앙으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에는 받는 것에 치중하던 믿음에서 서서히 나누어주고 베푸는 신앙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영적인 자람

거듭남의 체험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거듭남은 신앙의 어린 아기로 태어나는 상태입니다. 아기는 점점 자라서 학생-청년-장년이 되는 것처럼 신앙도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아기신앙 -기적와 이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기도를 해도 즉각 응답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시기입니다. 흔히 첫사랑의 시기라고도 합니다.

학생신앙 -이제 공부할 때라는 듯 마치 아이들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아 가듯이 기사와 이적과 표적과 은사들이 멈춥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어둠의 공백이 계속됩니다.

청년신앙 -내면의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외면신앙에서 내면신앙으로 들어갑니다.

장년신앙 - 영이 자라고 열려서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상대방을 보지 않아도, 상대방의 심장을 생각만 해도 상대방의 영적 상태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이 단계까지 오르면 중보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도 모르고 어두움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원입교인, 유아세례교인, 세례교인(입교인) 등이 있습니다. 또한 활동교인이 있는 반면에 비 활동 교인이 있고, 직분을 가진 교인들과 직분이 없는 교인들이 있으며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인들이 있는 반면에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시작하는 분들도 있고 다른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교회를 옮겨와서 열심을 내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50년 동안 여러 교인들이 교회에 왔다가 50년, 40년, 30년, 20년 이상 그대로 영암교회에 나오셔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도 있고, 도중에 여러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 실족한 분들이나 또한 다른 교회에 가셔서 새롭게 열심을 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정상 다른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우리교회에 오셔서 참으로 열심인 분들도 계십니다.

열심히 봉사하던 분들이 교회를 떠날 때 멀리 이사하는 경우와 같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임목사가 싫어서, 교회가 싫어서, 동료 교인이 싫어서 떠납니다.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떠나는 성도가 일방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떠나기도 하지만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도 다 같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과정을 통해 당하는 마음의 상처를 통해서도 새로운 살을 돋게 하시고 많은 교훈을 그 과정 중에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배우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교회를 옮기는 과정의 아픔 속에서도 배우기를 거절하면 한이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교회를 기본적으로 불신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교회에서도 헌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는 과정에서 배우기를 힘쓰면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정이 많이 들고 소중한 기억이 많은 교회를 떠날 때는 더 많이 배우게 되는데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역시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서는 보다 조심하고 보다 지혜롭게 행동하게 됩니다. 때로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과정 중에 믿음이 있어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은 성숙해집니다. 그러나 믿음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은 거기서 신앙생활이 중단됩니다.

사실상 우리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교회생활 하는 것으로는 잘 모릅니다. 교회를 옮기게 된 상황, 깊은 마음의 상처를 동반한 상황에서 그 순간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이전과 변함없는 태도로 충성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그 순간에 교회를 떠나서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작 상처의 순간에, 고난의 순간에 믿음 여부가 판명 납니다.

물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엄청난 상처입니다. 그 후유증이 오래 갑니다. 특히 떠나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 교회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떠나 교회 옮기는 것은 사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목사님도 성숙할 수 있고, 성도도 성숙할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하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그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진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의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교회 의식이 너무 지나친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교회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옮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를 자기의 교회로 보는 태도이지 주님의 교회로 보는 태도는 아닙니다.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본다면 모든 교회가 다 똑같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야 하고 옮기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라는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옮길 수 있어도 함부로 옮기지 않습니다. 교회를 옮길 때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잘 옮겨야 한다는 생각까지 해야 합니다. 기존 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기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누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교회를 옮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역시 어느 누구의 교회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면 교회 옮기는 것이 지금보다 더욱 자유스럽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본적으로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닌 주님의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누가 싫어도 교회를 싫어하거나 교회를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또한 뭐라고 정의합니까?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구절은 교회에 대한 최고의 찬사요 최고의 정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가득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교회의 정의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신 목적이 있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세 가지로 교회의 중요한 목적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너무 기본적인 원리가 아닙니까?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고,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배가 갈수록 사람 중심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 하나님께 단정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위로를 받기 위해 그분께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제일 중요한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예배드릴 때 최선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을 깨우치고 살리는 것

목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얼굴이 훤해집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다 오는 사람들의 얼굴도 그처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성경 교습소가 아니고 성경학원도 아닙니다. 이 말은 배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배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은 배움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배움이 많지 않았어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지금은 성경은 많이 알았는데 설 알아서 비판의식은 늘어가기만 하고 오히려 꾀만 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익숙하지만 인격에는 미성숙한 모습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부분 예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을 못합니다. 성경공부에는 열심을 내지만 예배하는 일은 등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교회도 그냥 부흥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앞으로의 목회 이슈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건강성은 교인들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예배에 참석하는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처한 현장에서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건강성과 성도의 성숙함이 측정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의 목적이 변질되었습니다.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고 복 받고 즐거움만 찾으려는 곳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가 복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본인이 해야 할 책임을 등한시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참 제자로 훈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복음을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

교회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수평이동으로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목회하는 데는 기분이 좋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자랐기 때문에 금방 적응을 하고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이전에 보고 배웠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그 스타일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이전의 것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적응하려는 십자가의 자세가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옛날의 좋았던 것을 들고 와서 자꾸 강요합니다. 사실 좋았던 것이 그것뿐이겠습니까?

나빴던 것과 비교해서 지금 좋았던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시야도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시야는 구체적으로 가지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2-3개씩을 가지고 오면 좋은 것이 몇 백 개 몇 천 개 됩니다. 그처럼 들고 오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혹시 사정상 교회를 떠나는 교인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축복을 기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꼭 당부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교회로 가면 저의 좋은 점을 가지고 비교하지 말고 기억 속에서는  교회와 목회자를 기억하되 교회 생활 속에서는 철저히 잊어야 하며 옛날 목사님은 사랑이 많았느니, 말씀이 좋았느니, 교회분위기가 좋았느니 하지 마시고 그 교회의 방식대로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떠난 것, 지난 것을 기억해서 현재에 밑거름으로 삼으면 좋은데 그것들을 기억해서 자신의 현재를 우울하게 만들고, 현재의 삶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만든다면 과거의 아름다움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 생각을 강요하는 장소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마음과 손길을 마음껏 나눠주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용서도 나누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가만히 앉아서 섭취만 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심술궂게 되어갑니다. 나누는 교회, 나누는 교인이 되어야 교회가 바른 교회이고 희망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교회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일의 기초석을 가장 앞서서 놓는 여러분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거룩한 계산

모든 것을 물질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한 것만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

나눈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사람들

드린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들

당신은 어느 반열에 서 있습니까?

당신은 어느 계산대 앞에서 더 많은 계산을 합니까?

당신은 당신 인생의 종착점을 어디에 가서 맞으려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뿌린 씨앗을 누구와 함께 추수하려 합니까?

오늘의 모습이 당신의 전부는 아닙니다.

계산하려거든 더 거룩한 계산을 하십시오.   -고훈 목사-

우리 영암교회가 다음과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교회.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하고 감미로운 기운이 가득한 교회. 기도소리, 찬송소리, 성경 읽는 소리, 웃음소리 나는 교회. 관용과 용서와 양보와 감싸줌과 배려가 있는 교회.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소외된 사람도 없는 교회.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가 나는 교회. 생명을 사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장애인을 사랑하는 교회. 성령 충만, 주님의  임재, 기름부음, 만져주심이 있는 교회. 자연스럽고 인간적이고 순수하고 정직한 교회.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교회. 율법을 지키되 율법에 매이지 않는 융통성이 있는 교회. 복음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희생과 섬김을 나누고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 절망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삶과 죽음까지도 끝까지 나누는 교회가 된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아마도 예수님이시라면 이런 교회로 만드실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회복하려는 기독교 갱신운동이요 종교 자체의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신앙은‘세 가지 오직’으로 압축되는데 그것은‘오직 성서’‘오직 은총’‘오직 신앙’입니다. 특히 종교개혁의 중심 원리는 성경을 중시하는 것인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강대상 아래 숨겨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 교회 갱신운동이요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신앙운동이었으며 부단한 자기 갱신의 사명이 교회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물량주의 교권주의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적 급진신학 사조 등으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런 얼룩진 오늘의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개혁과 갱신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항상 새로워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계속되어야 할 명제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그 옛날 루터가 보여준 개혁의 영성을 회복해야 하고 교회개혁의 정신을 회복, 성숙된 반성과 부단한 갱신으로 국가의 위기 극복과 복음화의 막중한 사명을 능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