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질서는 어느 시대에나 영원불변하지만, 우주와 지구의 관계를 보는 시각은 시대마다 달랐다. 톨레미는 천동설을 통하여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보았으며, 갈릴레오와 뉴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갈릴레오의 주장이 표면적으로는 성경적인 우주의 묘사와 달랐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였지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통하여, 우주의 중심은 어디나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자연현상에 대하여 세계관을 달리할 때, 우주의 비밀과 성경의 진리를 더욱 가깝게 그리고 바르게 볼 수 있음을 과학의 역사는 우리에게 증거해주고 있다.

성경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보는 시각은 시대마다 달랐다. 초대교회는 유대적 해석과의 논쟁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전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위하여 많은 교부들과 해석학자들은 ‘풍유적 해석’(allegory)을 통하여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세로 접어들면서 교회가 세상권세와의 관계에서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기독론적 해석 보다는 ‘덕성의 함양’을 위한 성경해석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말씀이었다. 종교개혁시대로 접어들면,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세우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성경’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성경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성경해석의 기초가 되었다.

지난 2000년 간의 성경해석사를 돌아보면, 그 어느 방법도 유일무이하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도 완전무결한 성경해석을 독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성경해석자들은 성경 앞에 겸손하여야 하며, 우리의 전통과 편견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가리지 않도록 애쓸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위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성경해석의 원리를 세우고, 우리의 모든 해석이 성경자체의 증언과 ‘성령의 조명’에 종속되도록 하는 큰 해석의 원리를 제시하게 되었다.

‘성경의 여성관’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우리의 전통과 편견을 벗고, 더 큰 ‘성경적 세계관’과 ‘인간관’ 속에서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인간창조 기사에서 구약의 여성관을 보며, 구약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들의 모습과 활동을 통하여 ‘여성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의 여성관


성경적 우주관과 인간관의 기초를 세워주는 창세기의 첫 세 장에서 여성은 세 본문에서 세가지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1.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여성(창1:26-31)

성경적 인간상의 대헌장이 되는 첫 인간 창조기사에서 ‘남자와 여자’는 둘 다 함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책임과 특권을 부여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신다(1:26). 네레이터는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1:27). 그는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을 들려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 본문에서 ‘여성’은 분명히 남성과 동일하게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으며, (2) 창조주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3) ‘만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 “인간의 전인격적인 국면 곧 영혼과 육체 속에, 모든 재능과 능력 속에, 모든 상태와 관계 속에 반영된 존재론적이고 기능적인 모든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인간의 감정, 이성, 의지, 개성, 사고력, 도덕성, 영성 모두가 하나님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골3:10).

(2) 첫 남자와 첫 여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도 놀랍다. 성경에서 ‘복’은 대부분 ‘생명력’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바로 이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결혼질서를 통하여 더욱 번성하며, 이 세상을 채워가는 것이 창조질서임을 보여준다.

(3)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함께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는 명령을 주신다(1:28). 이것을 우리는 소위 ‘문화명령’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정복’과 ‘다스림’은 ‘착취와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올바른 ‘보호와 관리’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2. 남성과 여성의 인격적 동등성과 상호보충성(창2:18-25)

창세기 1장은 우주적 관점 속에서 ‘땅’과 ‘남녀로 이루어진 인간’의 창조를 말한다면, 2장은 에덴 동산의 배경에서 ‘부부로서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즉, 1장이 인류를 구성하는 남녀 상호간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체적이며, 일반적인 관점’이라면, 2장은 ‘구체적으로 부부 관계 속에서의 남녀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1) 남편의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2:18)

두 번째 창조기사에서 여성의 탄생은 첫 번째 창조 기사와 다른 관점에서 제시되고 있다. 앞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으로 인간창조가 시작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로 시작한다. 즉, 사람이 홀로 사는 것은 창조의 정상적인 질서가 아니며, 따라서 부부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절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용어는 창조의 원형적 질서에 있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성’을 뒷받침하는 데 많이 오용되었다. 이 구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그와 동등하며 어울리는 짝으로서, 돕는 자’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 말 ‘배필’로 번역된 원어는 ‘그와 맞은 편에 있는 자’를 말하기 때문에, 아담과 유사성과 동등성을 가진 자이다. 또한 ‘돕는 자’(`ezer)라는 단어 역시 종속성을 뒷받침해 주지는 않는다. 이 칭호는 주로 하나님에게 사용되며(대하28:23; 12:19; 14:10; 25:8; 26:7, 13 등), 대부분 강자가 약자를 돕는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즉, 하와는 아담의 완전한 동반자이며, 땅을 함께 정복하고 다스릴 동역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와는 아담에게 “완전한 짝이며, 서로 돕는 동반 관계를 갖고 있다.”

(2) ‘결혼 언약으로 연합하는 남성과 여성’(2:21-23)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아담의 고독을 보고 좋지 않게 생각하시고,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에서 취하여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로 데려오자,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라는 탄성을 지른다(창2:23). 여기에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두 사람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연대성’과 ‘친밀감’의 최상급적인 표현으로서 ‘언약관계’를 말해준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열등성과 종속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상호보충성과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 타락으로 인한 부부간의 상호분리와 주도권다툼(창3:16)

앞에 제시된 두 가지 관점에서의 남녀 관계, 즉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상호 동등성(창1:26-28) 및 (2) 남녀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긴밀성과 상호보충성(창2:18-25)은 에덴 동산에서의 타락과 추방으로 근본적인 왜곡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제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본문은,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이다(3:16).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타락 후의 부부 관계에 대한 규범’으로 본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가인과 죄의 관계를 묘사하는 본문, 즉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와 구문구조에 있어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모하다’와 ‘다스리다’라는 두 동사가 각 구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기를 (사모할 것이다)”로 보는 것이 문맥에 더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은 하와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본문이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를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대한 규범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첫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심각하게 일어날 것에 대한 ‘사실적 서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리하여, 타락 전에 부부는 서로에게 완전한 반려자였지만, 타락 후에는 관계가 왜곡되어 서로의 주장을 위하여 갈등할 것에 대한 묘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구약성경의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파라다임은 창세기 1장에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관’이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 관점으로 제시된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하와와 아담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 질서(2장)와 타락 후의 갈등관계(3장)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구약의 여성상

구약성경은 남녀와 부부 관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한 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하여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들러내며, “여족장, 구원자, 지혜자, 예언자, 왕후와 정치가, 위대한 어머니와 헌신자, 유혹자, 피해자, 관습과 제도의 개혁자”의 다양한 모습으로 분석하여 보았다. 구약성경에는 풍부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지면 관계로 대표적인 사람들 만 살펴보려고 한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인들은 삶의 여정 속에서 다양한 ‘순종과 불순종’, ‘승리와 패배’, ‘축복과 징계’를 경험하였지만, 그들의 삶을 부각시킬 수 있는 중심 특징들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보았다.

2.1. 여족장들

(1) ‘열국의 어머니 사라’ (창17:16). 사라는 족장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그 남편의 순례길에 한평생 함께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원래이름은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시면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6)고 약속해 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11:11)며 사라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2) ‘큰 민족의 어머니’ 하갈(창21:18).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대리모 겸 후처가 된 사라의 여종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무시하여 결국 집에서 내어 쫓긴다. 그러나 그녀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두 번이나 체험하며,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하여,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는 신탁을 받는다(창21:18). 이스마엘은 이후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다(창25:12-18).

(3) ‘천만인의 어머니’ 리브가(창24:60).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갈 때, 모든 식구들은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는 축복을 한다(창24:60). 이후, 리브가는 이삭을 통하여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된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고 논증하면서(롬9:7),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다”고 하며(롬9:10), 리브가가 약속의 계통을 이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4)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룻4:11). 이후 국가를 이룬 이스라엘 12지파는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창29:31-30:24; 35:16-20). 룻기에 따르면, 베들레헴의 백성들과 장로들은 이 두 여인에 대하여, ‘이스라엘 집을 세운 두 사람’이라고 부른다(룻4:11).

(5) ‘다윗 집을 세운’ 효부 룻. 구약성경에서 여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두 권 중 첫 권은 ‘룻’의 이름을 따라 불려지고 있다. 룻은 원래 모압 여인으로서 이방인이었지만, 나오미의 한 아들과 결혼한다.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와 함께 빈손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올 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1:16)라는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한다. 룻은 청상과부가 아무런 사회적, 가족적 보장도 없이 남의 나라에 오며, 친척집에 가서 ‘이삭줍기’로 연명한다. 룻은 온순하며, 예의바르고, 충성스럽고, 책임감이 넘치며, 결단력이 있는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후,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집’을 세운다(마1:5). 그의 아들 오벳은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된다(룻4:14). 룻은 ‘일곱 아들 보다 더 좋은 자부’로 높이 칭송을 받는다(4:15). 룻은 ‘여족장’으로 여겨지기는 어렵지만, 다윗 왕가를 일으킨 여인으로서 준 여족장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2. 구원자들

(1) ‘출애굽의 여성 지도자’ 및 ‘첫 여선지자’ 미리암(출15:20-21). 미리암은 이제 독립 국가를 이루어가는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첫 애국열사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나일 강에서 악어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동생 ‘모세’를 기지와 재치로 구원하며, 바로의 딸에게 모세를 맡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홍해를 건넌 후, ‘여선지자’ 미리암은 많은 여인들을 이끌고, 구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출15:20-21). 따라서 우리는 미리암에 대하여 ‘출애굽의 여성 지도자’라는 칭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미리암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함으로’ 예언자 직분의 권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에 걸리지만, 곧 회복되고 진 안으로 들어온다. 이 때, 미리암이 진으로 돌아오기까지 ‘백성들은 행진하지 않았다’고 한다(민12:15), 이후 오경저자는 ‘미리암의 죽음과 엄숙한 장례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민20:1). 역대기 저자는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라고 소개하며(대상 6:3), 미가 선지자는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며(미6:4), 구속사에서 미리암의 위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 ‘가나안 정복의 관문을 연’ 라합(수2:24-25). 빗장을 굳게 잠그고 필사의 항전을 다짐하고 있던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정탐군을 보내지만 그들은 발각되었다. 이 때 여리고의 ‘기생’으로 있던 라합은 그들을 숨겨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중요한 역사적 고백을 하며(수2:9-11; 민13-14장), 그들을 무사히 돌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라합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으며(약2:21, 25), 그녀의 헌신을 통하여 가나안 정복의 첫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라합은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되어 살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다(마1:5).

(3) ‘사사 시대의 잔다크’ 드보라. 사사기에서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처음 소개된다(삿4:4). 여성이 이렇게 ‘아내’로서 ‘여선지자’와 ‘사사’라는 이중적 칭호를 가진 것은 오직 여기에 나온다. 이후 드보라는 철병거 900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시스라와 싸우기 위하여 직접 다볼 산으로 나아가며, 전투 명령을 내리고(삿4:14),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사 시대에 가장 치열하였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 때, ‘헤벨의 아내’였던 ‘야엘’은 시스라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하며 안심시킨 후,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찍어 죽인다’(삿4:21). 이 암울한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여성 지도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이 후 드보라는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구약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 가운데 하나인 ‘드보라의 노래’를 남긴다(삿5장).

(4) 바벨론 포로 후 ‘흩어진 유대인의 구원자’ 에스더(에스더9:29-32). 구약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두 번째 책인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아닥사스다 2세)의 왕후로 등장한다. 이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은 아각 족속 하만에 의하여 전멸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왕후가 된 에스더는 그의 삼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며 결단을 내린다(4:16). 그가 왕의 부름이 없이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지만, 생명을 걸고 나아가 민족을 구하게 되었다. 또한 에스더는 왕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지략과 총명함으로 그녀와 그녀의 민족이 당한 부당한 위기를 알리며, 결국 온 백성들은 구원을 받으며, 그들의 적이었던 하만을 심판한다.

2.3. 지혜자들

(1) ‘이스라엘 태아들을 살린’ 십브라와 부아(출1:15-22). 이집트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대하여 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이들을 출산할 때 바로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두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렸다”(1:17). 바로의 엄중한 문책이 있었지만, 이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 시간’에 차이가 있음을 지혜롭게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왕명을 어길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큰 복을 내려주신다(20-21절).

(2) ‘다윗을 피흘리는 죄에서 건진’ 아비가일(삼상25:30). 아비가일은 그 현명함으로써, 다윗과 나발의 충돌을 피하게 한다. 사무엘서 저자는 아비가일과 나발에 대하여,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라고 말한다(삼상25:3). 이 때 다윗은 바란 광야에 숨어 살고 있었으며, 나발은 마온 동네에서 가장 큰 부호로서, 수천 마리의 양과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그 동안 다윗의 종들은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이런 축제의 날에 환영과 보상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발은 ‘주정뱅이’요 ‘은혜를 모욕으로 갚은 자’로 나타난다. 다윗은 심히 분노하였으며, 나발과 그 모든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나아간다. 이 때, 아비가일은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지체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녀는 다윗의 분노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다윗을 달래기 위하여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뛰어간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나아간다.” 아비가일은 두려움이 없이 다윗 앞으로 나아가, 남편의 잘못을 대신하여 사과한다. 이 부분은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청이다(25:24-31절).뿐만 아니라, 다윗의 미래에 대해 예언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다윗이 ‘개인적인 복수건’ 때문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권면한다(30절).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비가엘을 칭찬한다(32-33절).

(2) ‘이스라엘의 지혜를 보전하고 있는 성을 건진 아벨의 한 여인’(삼하20:18). 압살롬 반란 직후에 다윗의 예루살렘 귀환을 거부하던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킨 후, 요압의 추격을 받고 아벨 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 때 요압은 이 성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은 후, 이 성을 헐려고 하였다. 이 때 아벨의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의 지혜’를 보전하고 있는 이 성을 허물 수 없다고 말하고(삼하20:18), 이 성은 ‘여호와의 기업’이므로 보존하여야 함을 역설한다(19절). 요압은 그가 원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세바라고 말하자, 여인은 성 안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며 힘을 합하여 세바를 요압에게 넘겨주고 성을 보존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 이름 없는 여인은 ‘전쟁의 포화에 잿더미가 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성’을 보전한다.

2.4. 선지자들

이미 앞에 나온 미리암과 드보라는 ‘여선지자’로 불려지고 있다. 이 칭호는 포로전기에는 이사야의 아내(사8:3)와 포로후기 노디야에게 주어지고 있다(느6:14).

(1) ‘요시야 종교개혁의 동역자’ 훌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 중 하나인 요시야 종교개혁은 여선지자 훌다를 통하여 시작되고 있다. 요시야는 성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으며(왕하22:3-13; 대하34:8-21), 그 안에 담긴 ‘언약의 저주’를 읽고 옷을 찢으며 충격을 받는다. 이 때, 요시야 왕은 대제사장인 힐기야를 비롯한 그의 최고의 관리들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내어 말씀의 진정성에 대하여 묻게 한다.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였다”(왕하22:14). 율법책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선지자들이 왕명을 받들고 훌다에게 나아가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때는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지만,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것도 특이하다. 훌다는 영성과 지성을 함께 겸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요시야 왕은 그의 어머니에게 영향을 크게 받은 왕이기 때문에, 아마 어머니를 통하여 훌다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훌다는 모세 예언의 진정성을 확인해주며, 또한 유다의 미래와 요시야에 대하여도 예언한다. 여기에서 훌다는 ‘여호와의 말씀이’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모세의 말씀 대로 온 나라가 징계를 받을 것에 대하여 말씀을 대언한다(16, 18, 19절). 이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은 큰 감동을 받으며, 언약갱신을 하고 종교개혁을 이룬다(왕하23:1-24; 대하34:29-35:19).

훌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하여, 유대전통에서는 훌다가 신학교에서 공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탈굼에서는 이 ‘둘째 구역’을 ‘공부하는 집’(Beyit Ulpana)으로 번역한다. 랍비 라쉬에 따르면, “그녀는 그 시대 장로들에게 토라를 가르쳤는데 그것이 미쉬나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예루살렘에는 ‘훌다’를 기념하여 이름을 붙인 ‘훌다의 문’이 두 개 있다.

(2)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을 최후의 전투 전에 위로한’ 엔돌의 여인(삼상28:24). 이 여인은 접신자를 제거하는 사울의 박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회에서 평생동안 추방자로 살았으며 아마 엔돌의 동굴에 숨어 살았던 것 같다. 사울은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자, 그가 추방과 사형령을 내렸던 ‘접신자’를 찾아간다. 이 여인은 두려움 가운데 절망 속에 빠진 사울에게 초혼술을 통하여 사울의 운명을 말해준다. 사울이 이 여인의 예언을 듣고 기절하여 쓰러지자, 이 여인은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최고의 음식으로 대접하고 있다.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삼상28:24). 이 여인의 영성은 왜곡되었으며, 레위기에서 금지하는 술법을 사용하고 있지만(레20:27), 하나님과 선지자 사무엘에게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첫 왕에게 최후의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2.5. 왕후들과 정치가들

(1)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 확증한’ 스바의 여왕(왕상10:1-13).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남아라비아 반도에서 수많은 보물과 향료를 가지고 솔로몬에게 나아온다. 그녀는 아마 솔로몬과 무역로를 터기 위하여 방문한듯 하다. 스바의 여왕은 매우 지혜로웠으며, 솔로몬의 건축술과 왕궁 행정 시스템을 검토하며 무역협정을 맺고, 솔로몬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2) ‘바알 선교사이며 악의 화신이 된’ 이세벨(왕상16:29-33). 열왕기 기자는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 체계적으로 도입한 여인으로서 이세벨을 지목한다. 아합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반야웨주의의 기수가 되며,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과 제단까지 세운다(왕상16:32). 이세벨은 선지자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고, 실제적으로 죽였다(왕상18:13). 그녀는 또한 이스르엘의 농부였던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모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조작을 하며, 결국 나봇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후, 이세벨은 여인 가운데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왕하9:22).

(3) ‘다윗의 보좌에 앉은 악녀’ 아달랴(왕하8:26). 열왕기자는 “아하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더라”로 소개한다. 아달랴는 일면 ‘오므리의 딸’(왕하8:26)로, 혹은 ‘아합의 딸’로 소개되므로(왕하8:18, 26), 아마 ‘오므리의 손녀’요 ‘아합의 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북 왕국 공주로서 남 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내로 시집왔다. 북왕국에서는 예후의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친정식구들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도 살해되었다(왕하11:1-12). 이 때, 아달랴는 남왕국에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모든 왕의 씨를 진멸하였다’(11:1). 이 여인은 홀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친손자들마저 죽이려고 하는 ‘표독하고 사악한 여인’으로 그려진다(왕하11:1-20; 왕하10:12-14참조). 아달랴는 유일하게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유다 왕국을 6년간 다스린 여인으로 나타나며, 열왕기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역대기자는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라고 평가한다(대하 24:7).


2.6. 위대한 어머니들과 헌신자들

(1)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출6:20; 민26:59). 요게벳은 레위의 딸로서, 제사장 전통을 잘 이어받았다. 그녀는 아론을 제사장으로 구별하여 바쳤다. 그녀는 모세가 ‘경건한 아이’(출2:2, 행7:20; 히11:23)로서, 뭔가 아이에게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요게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었다. 바로는 마치 헤롯처럼 모든 히브리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요게벳은 바로의 칙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세 달 동안 아들을 숨겨 기른다. 이후에 딸 미리암의 도움으로 바로 공주의 집에서 모세를 직접 키운다.

(2) ‘남편 모세를 죽음에서 살린’ 십보라(출4:24-26). 십보라는 모세의 아내로서, 모세가 소명을 받고 이집트로 들어갈 때,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죽이려 하자, 십보라는 순간적으로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목숨을 살린다(출4:24-26).

(3) ‘기도의 여인’ 한나(삼상1:12-16). 구약성경에서 어머니의 이상이다. 우리의 신사임당과 같다. 첫 선지자요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낳고 기른다. 한나는 마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다(삼상2:2-10; 눅1:46-55). 그녀는 사라, 리브가, 라헬처럼 무자의 고통 가운데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께 심령을 쏟는다(삼상1:11). 그녀는 엘리 제사장에게 ‘주의 여종’이라고 반복하여 말한다(삼상1:16, 18). 엘리는 한나가 취한 줄 알았다.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 속에서 간절함, 진지함, 숭고함을 볼 수 있다. 한나는 마리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며, ‘약자를 돌보시고 사회를 개혁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한다.

2.7. 유혹자들

(1) ‘요셉을 유혹하고 감옥에 넣은’ 보디발의 아내(창39:6-20). 이 여인은 이집트 왕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아내였다. 그녀는 육감적인 여인이었고, 요셉을 지속적으로 유혹하였지만(창39:7), 요셉의 끈질긴 거부에 분노를 느끼며, 결국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소리지르며, 결국 요셉을 감옥에 넣는다(창39:14).

(2) ‘삼손을 욕망의 노예로 만든’ 들릴라(삿16:1-22). 들릴라는 매우 관능적인 여인이었으며, 속임수에도 능하였다. 그녀는 삼손이 가지고 있는 힘의 비밀을 캐어내기 위하여, 울며 애원한다. 결국 삼손의 비밀을 블레셋 사람에게 전한 후, 그녀는 거액의 포상금을 받았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며, 발은 차꼬에를 차여 치욕을 당하며 결국 그를 모욕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는다(잠5:3-4).

2.9. 피해자들

(1) ‘성폭행의 희생자가 된’ 야곱의 딸 디나(창34:1-4).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그의 딸 디나는 세겜에 놀러 갔다가 그 동네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창34:1-4). 디나는 ‘아름다운 딸’이었고, 결혼 적령기에 있었으며, 야곱의 유일한 딸이었기 때문에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세겜은 비록 디나를 사랑하였지만 혼전 성폭행은 디나와 그 가족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이후 디나의 오빠들은 세겜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게 되고, 야곱은 큰 위기에 처한다. 창세기의 저자는 디나의 아픈 이야기를 34장 전장에 걸쳐 하고 있다.

(2) ‘아버지의 잘못된 서원으로 자신을 바친’ 입다의 딸(삿11:38). 입다는 ‘큰 용사’였다(삿11:1).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다(삿11:30-31). 그의 서원은 한나의 서원과 큰 대조를 이룬다. 한나는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 바친다’는 서원을 하였다. 입다는 승리를 얻기 위하여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로 나아간다(이것은 드보라가 ‘서원 없이’ 전쟁터에 나간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암몬 족속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딸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집에서 뛰어나오자 탄식한다(11:35).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서원을 갚으라고 한다(36절). 그녀는 아버지의 잘못을 모두 스스로 책임지며, 동무들과 함께 ‘그녀의 처녀성을 위하여 애곡한다’(11:38). 우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큰 헌신을 하였다.

2.10. 관습과 제도의 개혁자

(1) ‘여성상속권’을 입법화한 슬로보핫의 딸들(민27:1-11). 온 세상이 딸에게는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고 있을 때, 슬로보핫의 딸들인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는 이 문제의 심각성과 부당성을 모세에게 알린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4절). 이 때 모세는 매우 곤란해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지니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이것은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율례’가 된다.

(2) ‘부림절’의 기원을 만든 에스더(에9:32).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을 건진 후, 유대인들은 이 큰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림절’을 정한다. 지금도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매년 3월 14, 15일에 부림절을 지키며, 에스더서 두루마리를 읽는다.

3. 전체적인 조망

우리는 ‘여성상’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물론 여성과 연관된 여러 법들, 제도들, 관습들 (예, 출20:17; 신24:1-4; 레12:1-5; 27:1-8; 민30:3-17 등) 및 지혜문학(예, 잠31장), 시문학(예, 시128), 예언문학(예, 말2:13-16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성의 모습들은 다루지 못하였다. 또한 구약성경에 여성들의 다양하고 전체적인 모습들을 21세기의 독자들인 우리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점들은 이 글에서 살피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다양한 여성상들을 보면 여성 억압적이기 보다 해방적이며, 여성들의 활동과 사역을 제도적으로 ‘닫으려고’ 하기 보다는 ‘열어주려’ 함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여성들에게 부여되고 주어진 법, 제도, 역할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요약하자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에서 서로 동등하며, 상호보충적임을 첫 장에서부터 ‘대헌장’으로 천명한다. 따라서 인류의 삶에서 성차별은 극복되어야 하며 성폭력은 추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인간의 존엄성’에 헌신하여야 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결코 ‘열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 둘 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남녀의 역할은 가정을 중심으로 재조정되고 있다.

‘여성의 역할’을 중심으로 구약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왕국이 등장하기 전에는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하지만, 왕국이 탄생하고 국가가 제도화 되면서 여성들의 역할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신약성경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예수님 당시와 사도행전 초기에는 놀라운 믿음의 여성들이 많았지만, 교회가 제도화 되고 조직화 되면서 여성의 역할은 점점 줄어든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남녀로 구성된 우리들에게서 회복하기 위하여 오셨다. 요엘 선지자는 바로 이 종말론적인 회복이 새언약의 선물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았다(욜2:28-32; 렘31:33-34).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새 언약의 선물로 오신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성취된다(행2:16-21). 사도 바울은 갈 3:23-29에서 구속 역사를 ‘믿음이 오기 전의 율법 시대’와 ‘믿음이 온 후 복음의 시대’라는 두 분수령으로 나눈 후, 복음의 시대에는 그 동안 인류를 인종적으로 나누었던 ‘유대인과 헬라인,’ 경제적으로 나누었던 ‘종과 자유인,’ 그리고 성적으로 나누었던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어지고,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선언한다. 이 비전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길 사모한다.

출처/김정우 교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