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 1~12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사역 이전에 예수님이 전파하실 복음을 미리 맛보기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천국복음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2절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아주 간단하지만 의미 있는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한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습니다. 5, 6절을 봅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온 사방에서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내용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게 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을 알았기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 안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즉 예수님이 오시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는데 그 전에 쭉정이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세례 요한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소리만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담대하게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회개하라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라고 선포하였는데 우선 ‘회개’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회개는 무슨 뜻입니까? 흔히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입니다. ‘메타노에오’에서 ‘메타’는 ‘다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에오’는 ‘생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회개를 원문 그대로 풀어 보면 ‘생각이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7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동일하게 세례를 받으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신약성경 곳곳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외식하는 자’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유대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이방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는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눅 18: 9~14에는 바리새인의 이런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성전에 들어옵니다. 눅 18: 11~12을 읽어 드립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  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이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아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께서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한 이유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당장의 진노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받으려 했던 세례는 단순한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만을 의식해서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 했을 뿐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라고 선포한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 과정을 어떻게 되던 상관없이 ‘결과만 좋으면 된다’라는 단순한 생각,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의미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공부 좀 해라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돈 벌어서 남 주냐?’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지만 공부해서 남을 주어야 합니다. 돈 벌어서 남을 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부해서 남 주고 돈 벌어서 남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제 우리는 2004년을 10일 남짓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난 2004년을 돌아보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왔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책임과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갇혀 살았던 것을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모든 것들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흩어질 때와 모일 때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할 때도 있지만 흩어질 때도 있습니다. 주일을 비롯한 예배 시간에는 모이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흩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해서 교회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으로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 17: 18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속한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살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그렇게 살았고 세상을 변화시킨 인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고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미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무도 교회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교회에는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 연수가 오래 될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화 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아무런 감동과 느낌없이 그저 반복되어지는 습관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신앙생활이 아니라 단순한 종교생활이 됩니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편지는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인 계 2: 4~5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종교생활로 전락되어 버리게 됩니다. 처음 행위를 버린 에베소교회에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2005년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 처음 행위가 있는지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꾸고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했던 것들 나 중심적으로 하려 했던 모든 생각들을 바꾸어 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