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21-25

오늘은 여성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여성의 날은 없지만 우리교회에서는 오늘을 여성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매일 같이 가족 식사를 만들고 집안살림을 위해서 수고하는 아내들을 한번 생각해 보고 어머니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에서 여성주일로 지키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성의 역할이 너무 고맙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만드신 것이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세상에 여성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집안에 남자들만 사는 집은 그 삭막함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남자가 있으면 그 곁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남자 교도소 옆에는 꼭 여자 교도소를 짓지 않습니까. 그리고 남자들이 일하는 공장 옆에는 반드시 여자들이 일하는 공장도 함께 짓고 남학생들의 학교 옆에는 여학교를 짓고 이제는 남녀공학 학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래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들만 사는 곳에는 궁상이 철철 넘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자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아내가 늘 옆에 있으니까 남자들이 아내의 고마움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워 보십시오. 아내의 고마움이 어떤 것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남자는 아내가 없으면 제구실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남자를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제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옆에 여자가 없으면 제구실 못합니다. 그래서 아내 잃은 남자들이 빨리 재혼하지 않습니까. 돕는 배필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우니까 마지못해서 재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남성은 여성이 있음으로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이해서 남성들은 이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그릇된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은 아내는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짝입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아내를 맞이하면서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아내를 만들고 그 자리를 살로 채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입니다. 세상에 여성인 아내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이 이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여성이 이렇게 중요한 존재임에도 우리사회는 이 여성에 대해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여성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만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집안에서 살림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고 그 인식이 오늘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사회나 비하했고 종속관계로 인식하여 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그러면 여성들은 항거합니다. 여성이 늦게 창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이 남자의 몸 가운데서 가장 중앙에 있는 갈비뼈로 만드셨기 때문에 남녀가 평등하다고 우깁니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두개골 뼈로 여자를 창조했더라면 여자가 남자를 지배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의 발가락을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셨더라면 남존여비사상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자의 몸 중앙에 있는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녀는 평등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억지 이론입니다. “너희는 부모를 떠나 두 몸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 몸은 하나입니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동등하다 했으면 동등한 것이지 거기에 무슨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기준은 성경인데 성경이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지난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편견 속에서 살아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역사를 보면 여성들이 수난 받은 기록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남성위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어를 보면 그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주부”(主婦)의 부(婦)자는 여자가(女) 집안에서 빗자루(  )를 들고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상징했습니다. 남자는 밭(田)에 나가 열심히 힘(力)을 써서 일하는 형상입니다. 여자는 집에서 공손히 앉아 있다가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형글자화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는 조용히 집안에서 알뜰하게 살림하는 것을 아내 상으로 여겨왔습니다. 이것은 미국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미국도 여자가 두드러지게 나서는 것을 싫어합니다. 퍼스트 레이디도 조용하게 내조하는 것을 좋아하지 힐러리 같은 여자는 여자들이 더 싫어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만 해도 여자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디라고 여자들이 바깥출입을 했습니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등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나돌아다니고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선호사상이 지배적이어서 아들을 낳으면 얼굴을 들고 다녔고 딸을 낳으면 죄인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내리 딸만 네다섯을 낳으면 말째 딸 이름은 어김없이 종녀, 종순, 말순 이로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풍조 속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숨죽이고 살았겠습니까.

그러던 것이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이 같은 그릇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여성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에 들어앉아 있던 여성들이 비로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로 나아갔고, 교회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여자들이 유학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여자들이 남자와 함께 있으며 양반과 상놈이 어떻게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자유함의 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옛날은 고사하고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은 그래도 정신이나 생각이 깨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남자들의 그 고지식한 의식과 성격과 고루한 습관들도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이 더 깨이고 열리고 이해하고 여성을 생각하고 도우면서 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오늘 우리사회에 상당한 가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여성은 남자 못지 않은 능력이 있습니다. 남자들과 같이 공부하면 여학생들이 모두 우등생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중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사법시험에까지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뛰어납니다. 남녀가 같은 나이면 대부분 여성이 누나 같습니다.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성숙합니다. 여성들이 개발이 안되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기회만 주어지면 남성 못지 않게 일을 해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성에게는 의지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여성이 아이 낳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습니까. 그런데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또 낳습니다. 이것은 여성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또 여성은 독합니다. IMF때 남편이 실직을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집안에서 살림만 해온 아내는 세상을 모릅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실직을 했으니 얼마나 당황되고 눈앞이 캄캄할 것입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일단 현실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여자들은 팔을 걷고 나서서 일터로 나갑니다. 그러면 남편보다 더 많이 벌어옵니다.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여성은 참 무서운 존재입니다. 일단 결심만 하면 무서운 독기를 발휘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존재입니다.

오늘 여성들이 기를 쓰고 성형 수술하는 것은 그냥 볼 문제가 아닙니다. 그 밑바탕에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습니다. 능력은 있는데 외모가 조금 빠진다고 해서 입사원서를 넣으면 낙방됩니다. 그러니까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수술을 해서라도 뭔가를 해 보려는 의지가 여성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여자니까 하는 것이지 남자들은 안 합니다. 여성들은 수술하고 개선해서라도 나아가려고 합니다.

여성들에게는 그런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지금까지 개발이 안되었습니다.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성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그 능력이 모두 사장됩니다. 그것을 오늘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인물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여성들에게 점점 그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로 전환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전문직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까. 이제 여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늘 여성들은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국가의 위기 시에, 난국 시에는 하나님은 여성들을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드보라를 보십시오. 국가적인 위기 때에 하나님은 모든 남자 장수들을 물리치고 여성인 드보라를 불러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에게 능력이 없었어 보십시오. 불러내서 사용하셨겠습니까. 또 에스더를 보십시오. 민족의 위기 시에 에스더가 나서서 민족을 구원해 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보십시오.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고 숨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렬을 따라가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자들은 위기 시에는 대부분 그 위기를 타협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고지식하게 원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일하고 난 후에는 후유증이 없고 뒤탈이 없고 뒤처리가 깨끗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반드시 뒤가 흐립니다. 숫한 문제를 남깁니다. 솔로몬, 다윗, 삼손, 기드온, 노아, 아브라함, 사울, 야곱, 모세를 보십시오. 모두 한결같이 뒤끝이 흐리고 숫한 부작용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새롭게 할 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큽니까. 절대다수가 아닙니까. 한국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여자장로제도가 없습니다. 목사제도는 더욱 요원합니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이해서 이 그릇된 의식을 새롭게 했으면 합니다.


세 번째는 “여성은 신앙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여성은 신앙의 주체입니다. 신앙은 모계를 통해서 전파됩니다. 모든 남자들은 대부분 어머니나 아내를 통해서 신앙을 전달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을 보면 대부분 모계를 통해서 전수된 신앙 때문에 위인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모세, 디모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 웨슬레, 루터가 그렇습니다. 또 교회마다 보면 여성들이 대부분 신앙의 주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남전도회가 있고 여전도회가 존재하지만 이 둘을 놓고 비교해보면 서로 비교가 안됩니다. 남전도회는 하는 일이 아주 미미합니다. 물론 열심히 선교도 하고 전도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여전도회에 비교하면 비교가 안됩니다. 여전도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선교비를 얼마나 많이 지출하고 기도는 또 얼마나 많이 하고 전도는 또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리고 교회 내에서 궂은 일은 또 얼마나 도맡아 합니까. 이 다음 천국에서 받을 상이 아주 클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남자들은 못합니다. 남자들은 돈을 벌기는 해도 쓸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11조 헌금은 부인이 하고 건축헌금도 선교헌금도 부인이 합니다. 그 말은 신앙은 대부분 여자들이 주도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또 여자가 변변치 못하면 그 집안은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여자가 주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가정이 평화하고 삶이 안정됩니다. 남성 위주의 가정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고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라나는 아이들도 은연중에 의식이 기운 채 형성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 결혼을 하면 또 그런 풍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앞으로의 가정은 그렇게 남성위주가 되면 안됩니다. 앞으로는 가정폭력이나 집안에서 군림하는 것 같은 생활은 어림도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어디 부엌에 들어가느냐 하고 말했는데 그런데 앞으로는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들들을 어려서부터 부엌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며느리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오늘 청소년들의 결혼관을 보면 정말로 이상할 만큼 달라졌습니다. 20대 200쌍에게 “어떤 배우자를 원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200쌍 중 23%의 여자들이 대답하기를 “터프하고 똑똑한 남자를 원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부드럽고 가정적인 남자를 원한다”는 응답은 56%나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이 남자답고 똑똑하고 그런 사람은 싫다는 것입니다. 또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를 원한다“하는 응답은 15%이었고 “착하고 친구 같은 여자를 원한다”는 응답이 73%나 되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가정관은 이렇게 편안한 가정을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 보십시오. 머리 모습과 옷차림을 보십시오. 이제는 모양을 안 따집니다. 편안하면 됩니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편안한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오늘 여성주일을 맞아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지금 잘못 인식되고 있는 이 여성관에 대해서 바로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여성에 대한 건전한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녀들이 가정을 이룬 후에는 또 건강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활이고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지키는 생활입니다. 여성이 여성으로 대접받고 존대받는 세상이 앞서가는 세상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정이 가장 건강한 가정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