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5-1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촌락에 도착하셨을 때 10명의 문둥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문둥병이 치료되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환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 문둥병 환자를 격리하는 곳이 소록도인데 지금은 환자가 많이 줄어서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큰 교회였던 소록도 교회가 작은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 문둥병은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지를 못하고 덩굴이나 다리 밑에서 따로 살았으며 건강한 사람을 보면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깨끗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서 건강한 사람에게 그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문둥병이 걸리면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해 오는 문둥이는 돌로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환자들은 어디를 가도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 였습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든 개처럼, 죽기를 기다리는 버림받은 말처럼 허우적거리면서 살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문둥이들이 주님을 만나서 순식간에 그 병이 나았다는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 문둥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모두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끔직한 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병으로 마음으로나 정신적으로, 생활도 완전히 병든 사람들입니다. 한가지의 질병은 다른 병들을 가져와서 그들 모두는 죽음을 향하여 날마다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그들에게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사회도 없습니다. 그들은 10명이 집단으로 다니지만 모두 따로 따로의 고통을 가지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사실 이런 점이 많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따로 따로의 문제로 고민하는 일이 많고, 자식이 있어도 자식에게 말할 수 없는 외로움도 있습니다. 더욱이 인생의 길이 죽음에 가까우면 더욱 이런 감정이 심화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생 길을 " 나그네 길, 나그네길의 세월, 험악한 세월이라 하고[창 47:9]"라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2]"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 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전 6:12]"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3]"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2.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네로 들어오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서 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확실히 신앙은 어떤 운명의 장난보다 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죽음, 좌절, 실망, 소외와 고독을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믿음은 이 문제들을 능히 해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믿음은 우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게 합니다.      

3.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게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완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유한 명칭인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예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믿음입니다.

1). 그들은 완전하지는 못해도 예수님에게 나와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2).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일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말씀이 되여 있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썩어 가는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기 위해 성전으로 갑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문둥병이 치료된 것을 확인 받고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새는 들에 놓을 지며[레 14:7]'라는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병중에 있을 때에는 감히 성전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민 5:2]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민 5:3]"
그런데 그들은 제사장에게 갑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해도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끔 병든 사람을 고치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막 5:34]"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믿음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봉사하는 믿음을 각각 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는 일치합니다.

4. 그들은 모두 병이 낳았습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완전히 낳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감격해서 껑충 껑충 뛰고 소리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좋아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건강할 때는 건강의 기쁨을 몰랐는데 절망적인 질병에서 건강을 찾으니 너무 감격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것은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은 감격과 구원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달라지므로 모든 세상이 다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 성도들에게도 이런 신앙적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 중요한 문제가 그들 사이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똑같이 아파하고 고통하고 병을 낳고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가지의 다른 길을 갑니다. 9명은 너무 기뻐서 자기 갈 길로 갑니다. 춤을 추며 갑니다. 소리소리 지르며 갑니다. 다시 태여 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자기를 고치신 예수님에게 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절을 합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 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죄에서 구원을 얻는 사람입니다. 죄가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사람을 지옥에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이 들었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입니다. 죄 용서 받은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생활입니다. 이 환자들은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감사한 사람이고 9명은 그냥 지나친 사람들입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즉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한 그 한 사람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눅 17:18]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9]"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은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이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다시 주님에게 와서 감사했을 때 그들에게 주실 또 다른 축복이 있었는데 9명은 그것을 받지 못해서 아쉬워하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병나은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또 다른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입니다. 성경에 가장 좋은 기회를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 속에 있다가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가롯인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돈 꿰를 맡은 신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을 보니 영리한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져 버렸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 편이 있는데 지옥의 제일 마지막인 9층 지옥에는 가롯 유다가 벌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롯 유다의 벌은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배은망덕의 시작은 감사할 줄 모르는데 부터입니다. 배은망덕은 짐승에게는 없는 성격이며 사람에게만 있는 성격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계속적인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입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잠 15:10]" 그리고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롬 1:22]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감사를 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열 명 중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주 훌륭한 감사를 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의 병이 낳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속히 예수님에게 달려갔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제사장도 그에게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신속히 해야 합니다. 즉석에서 해야 합니다. 즉석에서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 119:60]"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도 감사하고 예수님에게도 감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든 사람, 절망 중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병이 낳자 예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자기를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먼저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 주님은 그런 그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9]"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의 감사는 모든 일에 대한 감사를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어도 감사를 합니다. 그야 말로 전천후 감사를 합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셋째, 그는 겸손히 감사를 했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눅 17:16]"라고 했습니다. 여기 엎드렸다는 말은 경배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감사에는 이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질보다도 마음, 그리고 정성이 담긴 물질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고 했습니다. 이 감사가 넘쳐 그는 죽도록 충성을 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감사가 진실하고 겸손하고 정성스러운 감사가 되어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은 이중적인 축복을 받은 것 같은 큰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